제목: 상처 입은 두 생명의 안아줌, 상호주관성
“엄마, 살려줘.”
그녀는 드디어 올 것이 왔음을 직감했다. 몇 주째 이어지는 짧은 문자에 한참 마음을 졸여오던 터였다. 쿵쾅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처리해야 할 일의 순서들을 생각해 보았다. 어떻게 하면 데려올 수 있을까. 지금은 그것 하나만 생각하자 마음을 다잡고 다잡았다.
데려오고 싶다고 쉽게 데려올 수 없는 곳, 그곳은 그런 곳이었다. 할 수 있다면 그 무엇이라도 해서 고통스러워하는 아이를 해방시켜 주고 싶었다.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해야 할까. 발을 동동 구르는 그녀의 머릿속으로, 남들과 조금은 다른 결로 살아왔던 아이의 지난 시간들이 스쳐 지나갔다.
아이는 어려서부터 흔히 말하는 사회성이 조금 부족한 아이였다. 무리에 섞이기보다 혼자 골똘히 생각하는 것과 그림 그리는 걸 좋아했고 음감이 발달해 있었다. 그녀는 사회성 훈련에 좋다는 여러 활동들에 참여시켜 보았으나 아이는 기대만큼 크게 흥미를 갖지 못했다.
사춘기를 지나며 아이의 특성이 더 드러나기 시작했는데, 아이는 배우지도 않은 음악을 혼자 만들었고 그림을 배우고 싶다고 해서 그렇게 해주었다. 다행스럽게 소수의 친구는 있어서 그런대로 학교생활을 해나갈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아이는 음악과 그림이라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세상과 소통하며 또래집단에서 오는 스트레스를 승화시킨 것이었다.
그러나 보통의 아이보다 예민한 감성을 가진 아이는 집단생활을 늘 버거워했다. 대학생이 된 이후에는 청소년기보다 또래 관계에 에너지를 덜 쓰긴 했지만, 함께 과제를 수행해야 하는 과정 속에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곤 했다. 많이 힘들면 병원에 가보자 권했지만, 거부했었기에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입대를 앞둔 어느 날, 아들이 먼저 그녀에게 병원에 가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렇게 가게 된 병원에서 여러 검사 끝에 우울, 불안이 높게 나왔고, 아이는 ‘그냥 가서 극복해 보겠다’는 다짐의 말을 남기고 약도 놔둔 채 입대를 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그렇게 애쓰던 아이는 동기 하나 없는 자대의 한 근무처로 배치되었고, 그곳에서 겪은 맞선임의 은밀한 괴롭힘이 결국 화근이 되었다. 고통스럽게 버티던 어느 날부터 아이에게 공황증세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피 말리는 일련의 과정들을 지나 아이를 데리러 부대를 향해 내달리던 그날. 가속 페달을 밟는 발끝이 미세하게 떨려왔고, 차창 밖으로 스쳐 가는 풍경들은 모두 무채색의 파편이 되어 흩어졌다. 주변이 어떤 풍경이었는지, 심지어 그 부대 위치가 어디였는지조차 그녀는 정확히 기억하지 못한다. 수많은 이들의 불안을 다뤄왔던 직업적 이성도 아이의 생존 위기 앞에서는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아이는 지금 어떤 상태일지, 정말 조기 전역이 확정된 게 맞기는 한 건지, 설마 도착했는데 더 과정이 남았으니 다른 곳에서 대기해야 한다던지 하진 않겠지? 오만가지 불미스러운 시나리오가 침투했다. ‘아니야, 설마 그런 일은 없겠지…’ 불안이 이성을 압도하여 머리가 멍해졌던 시간으로 기억한다.
남편과 함께 초조하게 기다리다 만난 아들의 모습을 보며, 다시 한번 심장이 쿵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이전부터 약간 있던 아토피가 온 얼굴과 몸을 붉게 뒤집어 놓았고, 안 그래도 마른 아이가 살이 더 빠져 큰 키가 위태롭게 휘청거리고 있었다. ‘대체 너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 내 아들아.….’
엄마의 스킨십을 별로 좋아하지 않던 커다란 아이가 ‘이제 살았구나!’ 하는 안도의 한숨과 함께 와락, 그녀를 품에 안았다. 푸석한 군복이 그녀의 얼굴에 닿았다. 아들의 몸을 가두고 있던 갑갑한 그 천의 감촉에 갑자기 소름이 끼쳤다. 간절한 기도가 응답된 가슴 벅찬 순간이었다.
‘내 아들이 이제 살겠구나!’
그렇게 집으로 돌아온 아이는 한동안 넋이 나간 것처럼 멍하게 지냈다. 상담을 권해보았지만, 그냥 조용히 쉬고 싶다는 말만 했다. 방문을 닫은 채 하루 종일 누워 있는 아이를 지켜보며, 자기만의 동굴에서 회복되어 나오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기다렸다.
설거지를 하고 반찬을 만들며 그녀는 아이 방의 고요한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좋아하는 음악을 듣고 있는 건지 대체로 조용한 날들이 이어졌고, 어느 날은 불빛 사이로 간간이 키보드 소리가 들리기도 했다. 게임으로 친해졌다는 외국 형들과 이 밤에 소통 중인 걸까. 한편으로는 아들이 누군가와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에 안도했다.
다행히 끼니때가 되면 아이는 문을 열고 나왔고, 특별할 것 없는 이야기를 나누며 같이 밥을 먹었다. 그릇을 다 비운 모습을 보면, 아이가 어렸을 때 밥 한 그릇을 다 먹이고 나서 느꼈던 흐뭇함이 그녀의 마음에 차올랐다.
밥을 먹으면 아이는 다시 동굴 속으로 들어갔다. 문 밖에서 아들을 기다리는 그녀의 마음도 아이의 표정에 따라 오락가락하던 날들이 이어졌다.
지금 아이에게 무엇이 필요할까. 엄마인 나는 무얼 해야 하는 걸까.
그러다가 그녀는 우연히 한 카페를 통해 유기묘를 임시보호하는 곳에서 데려다 키워줄 사람을 구하는 글을 보게 되었다. 엄마에겐 까칠하게만 굴던 사춘기 아들이 외할머니 댁에서 새끼 고양이를 품에 안고 맨바닥에서 뒹굴던 모습이 기억났다. 그 생경한 모습에 그녀도 놀랐던 순간이었다.
‘이거다!’
카페에서 그 글을 본 순간 그녀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저 연약한 아기 고양이가 어쩌면 아들을 안아줄 수 있을 거라는 걸.
온 가족이 생후 1개월 정도 된 고양이 두 마리를 모셔왔다. 아들은 찰나의 망설임 끝에 한쪽 발끝에만 흰색 털이 나 있는 까만색 턱시도 고양이를 안아 올렸다. 막내는 꼬리가 부러진 듯한 삼색 고양이를 안았다. 엄마를 사고로 잃은 아이들이라고 했다.
큰 키의 두 아들이 여리디여린 새끼 고양이를 조심스레 끌어안고 집에 오는 내내, 구부정히 어깨를 기울인 채 두려움에 앙칼지게 울어대던 녀석들을 어르고 달랬다. 집에 돌아와 거실 바닥에 캐리지를 내려놓고 문을 열자, 가냘픈 다리를 발발 떨며 두 녀석이 조심스레 발을 내밀었다. 두려움과 불안으로 잔뜩 긴장한 채.
우리 모두는 그때 고양이를 키우는 데 지식이 별로 없었다. 첫날부터 아기 고양이들이 새벽에 잠을 안 자고 끝도 없이 움직인다는 사실에 놀랐고, 앞으로 통잠은 자기 힘들 것이라는 현실에 조금 괴로웠다.
그녀가 사용하는 안방을 어린 고양이들이 제집처럼 여기는 것 같았다. 특히 장롱 안을 좋아해서 문을 닫지도 못한 채 열어 놓고 지냈는데, 새벽마다 장롱 속에서 달그락거리고 야옹거리는 통에 곤혹스러웠다. 한 생명을 키워야 하는 무게가 어깨를 짓누르는 것 같았다.
굳게 닫혀있던 아들의 방문을 그 어리고 연약한 아기 고양이들이 힘 하나 들이지 않고 24시간 열어놓게 만들었다. 맨바닥에 어린 고양이를 안고 뒹굴었던 사춘기 소년이, 엄마 잃은 어린 고양이들에게 자기 침대를 내어 주며 함께 뒹구는 청년이 되어 있었다.
사료를 끼니마다 챙겨주고, 화장실 모래를 갈아주고, 발톱을 잘라주고, 털을 빗기며 엄마의 부재를 채워주었다. 아들이 주는 사랑을 먹으며 아기 고양이들이 쑥쑥 자라났다.
맥없이 풀려있던 아들의 눈에 생기가 돌기 시작했다. 극도로 말을 아끼던 입에서 어린 냥이들을 어르고 달래는 사랑스러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상처 입은 세 생명이 따스한 품을 내어주고, 내어 맡기며 서로의 헐은 곳을 감싸 안는다. 지켜보던 그녀의 가슴에도 생명이 넘실거린다.
[P.S. 작가의 시선] 정신분석에서는 독립된 두 주체가 만나 서로의 고유한 내면을 마주하며 새로운 치유의 가능성을 열어가는 과정을 ‘상호주관성(Intersubjectivity)’이라 한다. 아들과 유기묘가 나누는 이 깊은 교감 역시 그 궤를 같이한다. 서로를 통제나 돌봄의 대상이 아닌, 있는 그대로의 주체로 인정하며 회복의 시간을 나누는 이 모습에서 우리는 상호 교감이 지닌 치유의 힘을 발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