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낳은 후 경력 단절이 되어 오랫동안 일을 안 하고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재취업을 하면서 깨달은 점이 내가 그동안 쉬기만 했던 게 결코 아니었다는 사실이었다.
아무리 살림을 놓아버린 것처럼, 제대로 건사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적어도 아이를 키우고 뒷바라지하는 일이라도 하고 있었던 거였다.
엄마가 하는 역할이 실로 어마어마한 1인 다역이었다는 것을... 그래서 사회에 나가 어떤 일을 하더라도 집에서 애 키우면서 살림하는 일보다 수월하게 느껴진다는 것을 절실히 깨닫고 있는 시간이었다.
그래서 처음에 너무 신기하게 느껴졌던 사실이, 나는 마치 평소와 다름없이 취미 생활을 하고 오히려 취미활동 보다도 더 재밌게 놀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인데, 그 일로 돈을 벌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너무 오랫동안 ‘무보수’의 일을 하고 있었던 거였다.
내 아이를 돌보는 일이고, 내 가족이 살아가기 위한 일들, 그리고 내가 좋아서 하는 일들이니까 무보수인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지만, 그 일의 업무 강도로 봤을 때 사회에서는 당연히 그에 해당하는 일당이 지급되어야 하는 그런 일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
아무리 게을리 집안일을 하고 연주나 독서 모임들 같은 취미 활동을 하고 있었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나는 결코 쉬지 않았고 특히 아이가 어렸을 때에는 집중해서 육아라는 일을 해냈던 거였다.
육아라는 일을 내가 너무 좋아했기 때문에 ‘힘든 일’이라고 느끼지 못했을 뿐...
그런데도 점점 더 놀고 있다는 기분이 들었던 건, 아이에게 손이 덜 가면서부터였던 것 같다.
남편이 피아노 치고 있는 나를 보면서 팔자 좋다고 비아냥거렸던 그날, 그 시점부터,
육아 핑계로 소홀히 했던 다른 집안일들을 여전히 놓은 채, 아이는 많이 커서 손이 덜 가는데 조금 더 생긴 여유 시간에 살림을 더 열심히 하기보다 취미 생활에만 더 몰두하고 있는 나를 보면서 남편이 잠깐 배 아파한다고 느꼈던 것 같다.
아마도 그 시점부터 나 자신도 내가 놀고 있다는 생각을 계속 더 가지게 되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돌이켜보니 그 취미생활조차도, 그 생활로 돈이 생기지는 않았을 뿐이지 그 일 자체가 일하는 것과 ‘일의 강도’에 있어서 크게 다르지 않았던 거다.
‘일’에서 가장 큰 부분은 내 시간 중 일정 부분을 ‘회사에게 내어준다’는 사실일 거다.
내 시간의 일정 부분을 그 일에 바친다는 개념에서 최저 시급이라는 계산법도 나오는 것일 텐데, 내 시간을 어딘가에 꾸준히 바치고 있었지만, ‘나 자신을 위해서’였다는 이유만으로 그 일의 대가를 다른 어딘가에 요구할 수 없었던 것일 뿐... 나는 끊임없이 무언가에 나의 시간을 대가 없이 꾸준히 바치고 있었던 거다.
언제부터인가 그 일이 ‘나 자신의 기쁨’ 때문이 아니라 책임과 의무, 역할이나 습관에 따라 영혼 없이 휩쓸려가고 있다는 자각을 하게 되었을 때, ‘대가 없이 바치는 내 시간’에 대한 ‘현타’가 왔던 것 같다.
돈에 좌우되지 않는 순수한 기쁨, 헌신, 사랑으로 그 일에 몰입하고 있다는 행복감이 사라지면서, 역할과 의무, 책임, 습관에 의해서만 휩쓸려 가고 있다고 느꼈을 때,...
‘이럴 거면 차라리 돈을 벌지’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 같다.
어떤 일을 기꺼이 하게 되는 ‘동력’을 생각해 보게 되었는데, 나는 그 ‘동력’이 ‘사랑, 열정, 헌신’이기를 바랐던 것 같다. 그 ‘동력’이 ‘돈’이 되는 것을 거부하는 마음이 있었다. 돈에 끌려가는 것에 대한 환멸, 돈에 좌지우지되고 싶지 않다는 고집이나 오만, 결벽증 때문이었을까?
한때 돈을 쫓아가는 것 같았던 내 모습이 너무 싫었었기 때문일까. 의식하지 않으려 해도 어쩔 수 없이 의식하게 되고 마는... 이 세상에 살아가는 한 주저앉고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는... 돈에 굴복하고 싶지 않지만 어쩔 수 없이 굴복할 수밖에 없는 현실.... 그리고 거의 자동화된 교환의 심리가 내재되어 있는 것 같은 무의식에 대한 반발심 때문이었을까...
그런데 ‘사랑, 열정, 헌신’이 사라진 자리에 ‘역할, 의무, 책임’만 남게 되면, 그 의무감으로 어느 정도 일을 해나가는 ‘동력’이 될 수 있지만, 작은 일들로도 마음이 무너져버려 쉽게 ‘현타’가 올 수도 있는 것 같다. 내가 이 일을 왜 하고 있지?라는 내면의 물음이 계속 솟구쳐 오르는 시간들을 겪게 된다.
그 처음의 ‘동력’들이 사라진 자리에 최종적으로 남는 ‘동력’이 그래서 결국은 ‘돈’ 인지도 모르겠다.
대가 없이 기꺼이 주던 것들에 이제는 점점 대가를 요구하게 되는 심리...
특히, 열정으로 기꺼이 나 자신을 바쳐왔던 것들에서 이제는 당연한 것처럼 대가 없이 계속 나의 것을 내놓으라고 요구받는 것 같은 기분을 느끼게 될 때...
더 이상 내게 순수한 기쁨을 주지 못하는 것들에 대해 영혼 없이 내 시간을 갈아 넣고 있기만 할 뿐이라는 생각이 들 때, 차라리 이 시간에 돈을 벌지 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다.
그래서 ‘돌봄 문제’에 있어서도, ‘사랑, 헌신, 열정’으로 처음에 기꺼이 하다가, 처음의 그 마음이 희석되면 ‘역할, 의무, 책임’으로 그 일을 겨우 지속해 나가게 되고, 그런 책임의식만으로는 더 이상 지속하기 어려워지면서 결국 ‘돌봄 비용’에 대해 차라리 돈으로라도 보상받고 싶은 심리가 생기게 되는 것... 그게 사실 현 사회 시스템에서 내재되어 버린 무의식을 거스를 수 없는 자연스러운 흐름이고 ‘순환’ 인지도 모르겠다.
사랑이냐, 의무냐, 돈이냐 하는 물음에서 이거냐 저거냐 하는 한쪽의 대답만을 요구하는 물음 자체가 잘못되었던 것 같고, 세상 이치가 다 그렇듯 이것도 순환의 연결고리 속에 끊임없이 상태 변화를 하며 존재하는 과정일 뿐인 듯하다.
돈으로라도 보상받아 그 일을 하다가 회복되고 치유된 마음은 다시 사랑 열정 헌신으로 돌아갈 수도 있는 연결고리...
의무 책임에서 바로 다시 사랑, 헌신, 열정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은 흐름을 역행하는 거라 배로 힘든 일이었을 거다.
그러고 보면 ‘글쓰기’에 있어서 ‘마감’과 ‘벌금’이 가지는 효과도 그 순환의 연결고리 속에 있었던 것 같다.
처음에 ‘글쓰기’에 대한 열정으로 도전하지만 열정은 쉽게 희석되고 사라지는 법이라, ‘마감’이라는 장치가 조금 더 지속할 수 있는 ‘동력’이 되는데, 그런 책임, 의무조차 제대로 작동하지 않으면 최종적으로 ‘돈’이 개입되어 ‘벌금제도’ 또는 ‘보상제도’라는 ‘동력’이 요구되기도 하고, 결국 ‘돈’에 굴복하며 글쓰기를 하다가 그렇게라도 쓰다 보니 다시 글쓰기에 대한 열정이 생기기도 하는 흐름도 마찬가지였을 것 같다는 생각.
돈으로 보상받는 일을 정식으로 하게 되면서... 집안 일보다도, 취미로 하던 일들 보다도 더 재밌게 ‘일’을 하고 있는데, ‘일당’이 생긴다는 사실이 오랜만에 신기했다.
‘무보수’로 했던 취미 활동에서도 많은 ‘피로감’을 느껴왔던 터라, ‘일’이 오히려 ‘취미’보다도 더 재밌게 느껴질 지경인데 ‘수입’까지 들어온다는 사실이...
‘좋아하는 일’이 목적이 아니라 처음에는 ‘돈을 버는 직업’을 구했을 뿐이었는데, 그 일을 통해 다시 오랫동안 잃어버리고 있었던 ‘사랑, 열정, 헌신’의 마음이 새로운 일을 통해 생겨나는 것 같다.
사실은 그동안 반대로 생각했었다.
돈을 의식하거나 돈이 기준이 되지 않고 내가 좋아하는 일에 몰입하고, 좋아하는 일을 했을 뿐인데 그 일로 언젠가 나중에 돈이 생긴다면 감사할 일이겠지만, 어쨌든 ‘돈’이 ‘목적’이 되고 싶지는 않았었다. 그런데 한편으로 좋아하던 일이 돈을 버는 ‘일’이 된다면, 그 좋아하던 일을 싫어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었는데, ‘일’이 되기 전부터조차도, 좋아하던 그 일이 이제는 마냥 좋기만 하지는 않았던 거다. 돈과 상관없이도 그 일이 이제는 ‘일’로 느껴지면서 더 이상 즐겁지 않고 마음이 무거웠던 거다.
그런데 거꾸로, 돈을 목적으로 일을 했는데, 그 일이 좋아질 수 있다는 사실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것 같다.
지금이 그런 상황인 것 같다.
그동안 취미활동이었음에도 여러 모임, 행사들은 지켜야 하는 의무, 일처럼 느껴지면서 많이 부담스러웠던 것 같다.
그런데 오히려 지금 하는 일은, 이른 아침 출근시간이 설레기까지 하는 상황이니... ‘돈을 벌자’라는 마음으로 시작하게 된 일에 새로움과 즐거움, 활력이 생기면서, 사랑과 열정까지 새롭게 생겨나는 것 같아, 그동안 ‘반대의 경우’로만 나아가려 했던 마음이 사실은 고집이었고, 고지식했던 거였구나라는 사실을 새롭게 깨닫고 있다
그래서 ‘잠시 멈춤’의 시간은, 챗바퀴처럼 타성에 젖어 흘러가고 있던 것에 방향을 바꾸기 위해 나에게도 꼭 필요한 시간이었던 것 같다.
나는 무언가에 휩쓸려버릴까 봐, 다른 것에 쉽게 휩쓸려버리지 않을 내공을 갖출 수 있을 때까지 멈추어야 할 것 같아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결국 책 자체에 휩쓸리고 있었고 그 자체를 이제는 멈췄어야 했다는 사실을 한참 동안 깨닫지 못했던 거였다.
사실 ‘책’보다도 나중에는 ‘모임’에 휩쓸리고 있었다는 사실...
급류에 휩쓸려 갈 때 어딘가로부터 던져진 밧줄처럼... 나에게 다가오는 ‘말들’이 있었다.
밧줄이라고 착각하면서 수많은 지푸라기들을 잡으려고 하고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단단한 밧줄처럼 급류에 휩쓸려가는 나를 멈추게 하는 ‘말들’...
급류에 휩쓸려 당도하게 되는 지점이 낭떠러지일지, 아니면 더 좋은 어떤 것에 도달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 그 휩쓸림을 거스른 것인지, 내가 잡은 밧줄이 더 이상한 곳으로 나를 데려다 놓은 것은 아닌지... 정답은 알 수 없고, ‘정답’이 존재하는 것도 아니겠지만....
어쨌든 현재 내가 이 모험을 즐기고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지 않을까.
의지 없이 휩쓸려 왠지 ‘죽음’ 쪽으로만 더 가까워져가고 있을 뿐이라고 느꼈던 것 같은 마음이 ‘삶’ 쪽으로 방향을 틀은 것 같은 느낌...
우물쭈물하며 갈등하고 있던 나에게 잠시 멈춰 방향을 바꿀 수 있도록 다가왔던 말들은 다음과 같은 말들이었다.
“다 끊고 하늘을 보세요”
“언니, 언니가 예전에 했던 일을 다시 하면 좋을 것 같아요. 저는 직업의 선한 영향력을 믿어요”
예전에 했던 일에 대해 ‘악한 영향력’의 가능성을 생각했던 것은 두려움이고 회피이고 핑계였는지도 모르겠다. 직업이 문제가 아니라 ‘나의 태도’가 문제였을 것이고 어떤 직업이든 나의 태도에 따라 세상에 해를 끼치는 일을 할 수도 있겠지만, 선한 영향력이 될 수 있는 가능성이 훨씬 더 크다는 사실까지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거였다.
다 끊고 하늘을 보았더니 그 공백, 그 틈으로 그동안 책에 휩쓸리면서 더 멀어졌었던 오랜 친구를 만날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생겼고, 아이를 낳기 전 내가 열정적으로 일하는 모습을 가장 가까이서 보았던 그 친구가 조심스럽게 건네었던 말이 다음날 무심코 잡코리아에 이력서를 올리도록 했고... 그 일이 나를 또 뜻하지 않았던 어느 장소로 데려다 놓았고, 하늘에, 땅에 더 가까워지는 일에 마음이 갔고... 오래전과 다른 방식으로 나는 다시 ‘조경’이라는 업으로 돌아가서 지금 흠뻑 빠져들어 글자로 만들어진 종이 책이 아닌 자연의 책을 마음껏 읽고 있는 중인 것이다.
그런데 이제는 이 일을 겪어보고 나니 반드시 꼭 ‘조경’이 아니더라도, 다른 어떤 일들도 다 기꺼이 할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으로 확장되어 가는 것 같은 선순환...
절에 들어가고 싶어도, 청소부터 해야 한다는 수행의 과정에서 탈락될 것 같아 득도하기는 평생 어려울 것 같았는데, 이제는 이 세상에서의 모든 일들까지도 득도를 위한 ‘수행의 과정’처럼 느껴져 몰입해서 하다 보니 하산해도 될 것 같은 마음이 된 것 같다고 비유한다면 너무 이른 오만인지도 모르겠지만, 절에 들어가서 청소하는 것까지도 이제 몰입하고 즐길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마음, 그런 자신감이 생겼다고 해야 할까
(2024. 5. 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