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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독서 모임 날. 퇴근 시간이 지나자 복도는 한산해졌다. 급하게 처리할 메일이 있어 5분 정도 늦게 14층 모임 장소에 갔다.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책상 위 모든 시선이 나를 향했다. 그 순간 나는 바로 미소 지었다. 그녀가 맞은편에 있었다. 가볍게 사람들과 눈인사하고 문 앞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회장처럼 보이는 사람이 구석 자리를 안내했지만 문 앞이 편하다고 이야기했다. 인원이 6명이라 구석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30대와 40대로 보이는 여자와 TV에서 자주 본 아나운서 국장과 그의 남자 후배. 그리고 국민학교 이야기를 하는 40대 남자와 그녀가 있었다. 그녀는 허리를 곧게 세우고 앉아 사람들이 말할 때마다 뭔가를 수첩에 적었다.
“저는 시사교양국에서 자연다큐를 제작하는 사람입니다.”
자기소개를 짧게 했다. 사람들이 모두 입을 벌려 놀란 표정을 지었다.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면 거의 자리에 없을 텐데 어떻게 모임에 왔냐며 신기한 동물탐험에 나오는 희귀동물을 보는 눈초리들이었다. 바로 앞에 앉은 그녀와 눈이 마주치자, 심장이 고장 난 펌프처럼 사정없이 요동쳤다. 그녀를 보자 준비한 말들이 머릿속에서 모두 사라져 버렸다. 나는 그녀 때문에 이곳에 온 것이라고 말할 수 없었다. 책은 잘 안 읽지만 연애는 관심이 있어서 왔다고 말하자 모두 웃었다. 내가 왜 그때 속마음을 이야기했는지 당황스러웠다. 멍하게 천정을 보고 있는 나에게 누군가 어떤 프로그램을 만들었는지 물었다. 입봉작인 <다람쥐의 사랑과 야망>을 이야기할 순 없었다. 다람쥐의 귀여움으로 어느 정도 시청률을 선방하리라는 예상을 깨고 시청률이 애국가보다도 낮게 나와 사무실에서 말들이 많았다. 자연 다큐멘터리는 이제 그만하자는 소리와 이제 너희들도 회사를 생각하고 제작하면 좋겠다는 쓴소리를 들은 터라 다람쥐 이야기를 그만하고 싶었다. 요즘은 식물에 관한 책을 보고 있는데, 그냥 밭에 토마토 줄기만 심어도 알아서 자라는 토마토 이야기를 만들겠다는 소리를 하며 횡설수설하자 그녀는 웃었고 다른 사람들은 잠시 서로의 얼굴을 보거나 나를 빤히 쳐다봤다.
정적을 깬 것은 아나운서 국장이었다. 책 이야기를 하자며 그녀는 퍼트리샤 하이스미스가 쓴 <소금의 값>에 대해 말하며, 영화 <캐롤> 이야기를 시작했다. 다음 사람들도 들어보지도 못한 책 제목을 이야기하면서 그와 관련된 영화 이야기를 했다. 사람들이 한참 떠들었지만 그들의 말은 들리지 않았다. 자기소개 때 뱉어낸 말들을 곱씹자 땀이 이마에 송골송골 맺혔다. 말을 다시 담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면서 머리가 지끈거렸다. 사람들은 돌아가며 자신들의 생각을 이야기했고, 그녀 또한 책에 대한 의견을 말했다. 그녀의 이야기를 들으며 그나마 마음의 안정을 되찾았다. 나는 그녀가 읽으라고 권한 소설에 대해 유튜브에서 본 리뷰를 조금 그럴싸하게 내 것처럼 이야기하고 끝을 냈다. 외운 말을 주워섬기면서 사람들의 표정을 조금씩 살폈는데 어디에서 베낀 것을 눈치 채지 못한 것 같았다. 누군가 내게 좋아하는 멜로영화를 물었다. 그 순간 사람들의 시선이 나에게 향했다. 뭔가 그럴싸한 제목을 말하고 싶었지만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나온 영화 제목은 주성치의 <서유기월광보합>이었다.
자기소개 때만큼이나 사람들은 황당한 표정을 짓거나 그게 무슨 영화인가 하는 눈초리였다. 한두 명은 그냥 아는 척 고개를 끄덕였다. 망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그녀가 웃으면 말했다.
“그렇죠. <서유기월광보합>도 사랑 영화죠. 사랑의 유통 기한을 정한다면 만년으로 하겠소. 영화의 명대사죠.”
“그건 <중경삼림> 대사 아닌가요?” 누군가 말하자, 그녀가 답했다.
“이 영화에서도 나와요.”
“지수 씨도 이 영화 아시네요?” 그녀를 쳐다보며 말했다.
“잘 알죠.” 지수는 웃기만 한 채 더 말을 잇지 않았다. ‘주성치가 출연한 영화는 유치한 줄 알았는데’ 하고 누군가 말했다. 부국장님의 호출로 마지막까지 앉아 있지 못했다. 더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이런 상황에서는 탈출하는 것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다음 날 그녀가 보낸 메일이 왔다. 다음 모임 안내와 함께 읽을 책에 대한 설명이었다. 다음 책은 마가렛 애트우드의 <시녀 이야기>였다. 마가렛까진 알겠는데 그 뒤의 이름은 처음 들었다. <시녀 이야기>라니. 임상수 감독의 <하녀>가 생각났다. 두꺼운 책이라 회원들은 한 달 전에 안내가 됐는데 신입회원인 나에겐 버거울 수 있으니, 무리해서 읽지 않아도 된다는 친절한 내용이었다. 나를 배려한 말들이 고맙게 느껴졌다. 나는 마지막에 있는 문장을 보고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책이 한 권 남았습니다. 시간 될 때 자리에 오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