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호음이 이어졌다. 모든 상담원이 통화 중이었다. 대기 번호는 15번. 상담원이 적어서인지 아니면 죽으려고 하는 놈들이, 아니 정확히 이야기하면 자살하는 놈들이 많은 걸까!
전화기 꺼줘. TV 화면에 뉴스 속보가 나오고 있었다. 무표정한 남자가 입을 벙긋거리고 있었다. 백두산 폭발 후 추가 폭발이 예상된다는 빨간 폰트의 자막이 하단에서 깜박거렸다. 창밖에는 비가 쏟아지고 있었다. 죽기 딱 좋은 날씨 같기도 했다.
TV 오디오 켜줘. 날씨 예보가 이어졌다. 기상 캐스터는 크리스마스 전날까지 기온이 조금 떨어질 예정이며 오늘은 25도 정도까지 올라갈 예정이라고 말했다. 온난화 때문이기도 했지만, 계절의 변화가 없어진 지 이미 10년도 넘은 것 같았다. 뉴스 후 안락시아에 대한 광고가 이어졌다. GenAI개발 이후 AI 개발은 더욱 가속화되었고, 과거 사람들은 인구 절벽을 걱정했지만, 인공지능을 탑재한 기계(우리는 이걸 A휴먼이라고 부르지만) 이들이 인간을 대체하면서 잉여 인간을 더 걱정해야 하는 세상이 되었다. 직업을 잃은 많은 사람이 지방으로 밀리거나 집을 잃은 사람들이 역과 지하철마다 넘쳐났다. 교화를 위한 시설과 싼 숙소를 건설했지만 다 임시방편이었다. 더 큰 문제는 자살하는 사람들이었다. 자살이 사회 문제가 된 것은 한강과 건물에서 투신하거나 자살 운전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면서부터였다. 처리야 A휴먼이 하면 되었지만 널린 시체를 보는 것이 일상이 되자 사람들은 소리쳤다. 깨끗하게 좀 살자고.
몇 년 뒤 안락사가 합법화되었고 결국 자살 합법화도 국회를 통과했다. 편하게 안락시아라는 자살 키트를 통해 10분 안에 목숨을 끊을 수 있었다. 단 생명복지부 산하에 있는 국민생명연장관리공단의 상담을 통해서 합법적인 절차를 거쳐야 가능했다. 오후가 되어도 대기 숫자는 비슷할 것 같았다. 국민생명연장관리공단에 전화 연결해 줘! 몇 번의 신호음 후 안내 목소리가 들렸다. 귀하의 대기번호는 5번입니다. 그냥 대기를 걸어 놓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다.
안락시아 부작용 검색해 줘. TV 화면에는 회색 옷의 여자가 미소를 띠며 말을 하고 있었다. 광고 말고 안락시아 부작용 검색해 줘. 같은 여자의 얼굴이 다시 화면에 나오기 시작했다. 정부가 막아 놓은 것인지 실제 부작용이 없는 것인지 알 수 없지만, 화면 속 여자는 안락시아의 사용법을 안내하면서 안락하게 생을 마무리할 수 있다고 밝게 말하고 있었다.
안락시아 고통이 없는지 광고 말고 일반 영상으로 확인해 줘. 사람들이 올린 안락시아 영상들이 화면에 줄줄이 나왔다. 혼자 찍은 영상과 지인들이 촬영한 영상으로 보이는 것들이었다. 모두 엄지손가락만 한 튜브를 콧구멍에 넣고 눈을 감고 있었고, 잠을 자듯 평온해 보였다.
자살하려는 사람 옆에서 촬영하는 저들은 뭐지 하는 생각을 하는 순간, 잠을 자는 남자 목 위로 줄이 쭈욱 그어졌다. 전화 연결되었다는 화면이 뜨고 얼굴 없이 오디오가 들렸다. 사전 질문을 한다는 기계음이었다.
이름을 대세요. 김경환. 지문이나 안구로 본인 확인해 주세요. 오른쪽 엄지손가락으로 화면 중앙을 눌렀다. 본인 확인되었습니다. 서비스 번호를 눌러주세요. 안락시아 관련 빠른 접수 문의는 1번, 안락시아 관련 배송 문의는 2번. 1번 버튼을 누르는 순간 상담원이 나왔다.
김경환 님 맞으시죠?
네
안락시아 빠른 접수를 원하시나요?
네
바로 접수 처리하겠습니다. 집 주소가 서울시 서대문구 북아현동 12-0번지 3층 맞나요?
네
안락시아 키트 확인해 드리겠습니다. 압축된 질소가스 1리터와 2리터 중 선택해 주시죠.
아……. 그 차이가 있나요?
속도 차이죠. 가스를 마시고 5분 안에 영원한 수면을 하던가, 10분이 걸릴 수도 있고요.
그럼, 2리터가 빠른 거죠?
네
고통이 있는 것은 아니죠?
고통은 없습니다. 자세한 사항은 첨부된 설명서를 보시면 됩니다. 어떤 거로 하시겠습니까?
그럼 2리터로.
네. 배송은 택배와 퀵이 있습니다. 택배는 접수 상황을 보니 한 3.4일 걸리고 퀵은 오늘 저녁이면 받아볼 수 있습니다. 가격 차이는 10배고요.
아. 그럼 택배로 하겠습니다.
택배로 접수됐습니다. 비용은 복지비용에서 차감됩니다. 이상 김경환 님 접수 마쳤습니다.
전화 화면 옆으로 국민생명연장관리공단 발신으로 한 메시지가 보였다.
문의 사항 없으면 이상 상담을 마치겠습니.
아. 저기요. 저기요. 급한 마음에 말을 비집고 들어갔다.
네?
끝인가요?
네.
아니 절차가 이렇게 간단한가요?
무슨 말씀인가요?
자살하려고, 아니 사람이 죽을 수도 있는데 뭔가 절차를 조금 더 확인하는 게 없나요?
그게 불만이시면, 불편사항 데스크에 접수 부탁드립니다. 그쪽 상담원과 연락 가능합니다.
목소리만 들어서는 사람인지 AI인지 알 수 없는 상담원 답변이 이어졌다.
불만은 아닌데 더 확인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면 전화 후 불편사항 데스크로 바로 연결해 드리겠습니다. 질문이 없으면 안내를 마무리하겠습니다. 접수 후 안내되는 상담원 별점에 좋은 점수 부탁드립니다.
뭐라고! 이 기계 새끼가 무슨 별점이 필요하지라고 생각하는 순간, 별점은 상담원 등급에 영향을 미칩니다. 공정한 피드백 부탁드립니다. 상담원은 또박또박 말을 내뱉고 내가 대답하기 전에 전화를 끊어버렸다. 바로 신호 연결음이 이어졌다. 잠시 후 목소리가 들렸다. 귀하의 대기 순서는 56번입니다.
나도 모르게 한숨이 나왔다. 화면 속 TV에서는 옛 영화 장면이 흘러나왔다. 음 소거된 남자가 여자에게 소리치고 있었고, 창문을 치는 빗소리는 그쳤지만 바람이 더 거세게 방안에 울리고 있었다. 화면에는 별점 표시 문자와 함께 세상에서 가장 인자할 것 표정의 상담원 얼굴이 나를 보고 미소 짓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