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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군 Oct 26. 2023

[단편소설]독서동호회

5

                                                                                 5

 

 그녀는 이렇게 빨리 왔느냐고 큰 눈을 더욱 크게 뜨며 탕비실로 나를 안내했다. 그곳 서랍 속에서 책을 꺼내며 그녀가 말했다.


  “저도 팬이에요.”

  “네?”

  “주성치 팬이요.”

  주성치를 좋아하는 사람은 주변에서 처음 봤다고 그녀가 말했다. 나이 대가 홍콩영화를 좋아할 세대가 아닌 것 같다고 묻자, 지수는 그녀의 아빠가 홍콩영화를 좋아해서 같이 홍콩도 다녀왔다고 했다.

  “그런데 박 피디님도 그 나이 대가 아니지 않나요?”

  “엄마가 성룡 팬이어서 홍콩영화를 자주 보여줬어요.”

  “저도 어렸을 때 성룡 영화 많이 봤는데. 어머니께서 굉장히 활동적이신가 봐요.”

  “네 그러셨던 것 같기도 하고.”

  어린 시절 기억은 변하기 쉽다. 내 기억 저편에 숨어 있다가 유기체처럼 좋은 쪽으로든 나쁜 쪽으로든 원하는 것으로 선택되어, 어느 순간 피부 틈새를 기어 나와 털끝에서 나를 깨웠다.

  “저는 B급을 워낙 좋아해서 주성치를 좋아했어요. 박 피디님은 왜 좋아하세요?”

  “제가 A급이 아니어서 그런가 봅니다.”

  그녀가 말없이 나를 쳐다보자, 그녀의 눈을 보며 혼잣말처럼 말했다.

  “주성치 좋아하는 분이 제 주변에 있는지는 몰랐네요.”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재미있잖아요. 과거로 돌아가는 것도 흥미롭고.”

  “그렇죠. 과거로 가서 사람도 다시 구하고.”

  “맞아요. 피디님은 과거로 간다면 누굴 구하고 싶으세요?”

  수많은 타임머신 영화를 봤지만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과거로 가서 다시 하고 싶은 것은 무엇일까.

  “글쎄요, 제가 영웅도 아니고, 누굴 구할 순 없겠지만…… 문 정도는 열 수 있겠네요.”

  “네? 닫는 게 아니고요?”

  “어렸을 때 시골 외갓집에서 잠깐 지냈는데, 트럭에 동물들을 싣고 온 아저씨가 있었어요. 군것질할 것도 팔고, 귀여운 동물들도 보여줬는데, 쳇바퀴 안에 갇혀 있는 다람쥐를 봤어요. 다른 동물들도 많은데 이상하게 다람쥐가 더 불쌍해 보였죠, 쇠 철장에 달린 헐렁한 고리만 열면 다람쥐가 도망칠 수 있을 것 같아서 아저씨 몰래 고리를 열었는데 다람쥐가 나가질 못했어요. 문을 혼자 열지 못하더라고요.”

  말을 더 잇지 못하고 멍하게 있자 그녀가 웃으며 말했다

  “피디님. 진짜 다큐 감독님 아니랄까 봐, 동물사랑! 나라사랑! 아무튼, 책이 두꺼운데 무리해서 읽다가 탈나시면 안 되니까, 천천히 읽으세요.”

  무리하지 말라는 그녀의 말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사무실에 돌아왔다. 그동안 살면서 무리해서 한 것이 무엇일까. 그렇게 한 것이 있을까? 그녀가 준 책이 유난히 두꺼워 보였다.


  유튜브에서 <시녀 이야기>를 검색해 봤다. 미국 드라마로 만들어진 소설이었다. 살펴보니 <핸드메이즈 테일>이란 제목으로 얼마 전 본 드라마 원작이었다. 남자들이 세상을 지배한다는 독특한 상상력 때문에 호기심 있게 봤지만 조금 지루해 별점을 3개 준 미드였다. 내용을 알고 있으니 왠지 모를 자신감이 생겼다. 옆자리를 봤다. 김 선배와 조연출이 노트북 화면을 보며 열심히 무엇인가를 하고 있었다. 쭈그리고 앉아서 뭔가를 쓰는 조연출과 허리를 세우고 노트북을 정면으로 쳐다보는 김 선배가 보였다. 이번에는 저번과 달리 사람들의 눈치를 보며 유튜브에서 본 내용으로 짜깁기한 것이 아닌 제대로 그녀와 마주하고 싶었다. <시녀 이야기>는 531페이지의 책이었다. 다행히 다음 주는 특별한 계획이 없었다. 2주 동안 531페이지라면 최소 하루에 37페이지를 읽어야 했다. 물리적 시간이 부족할 것 같아서 화장실에서, 카페에서, 지하철에서 닥치는 대로 책을 읽었다.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은 줄을 치면서 한 단어씩 천천히 읽었고, 주말 동안 집에 박혀 책을 읽었다. 

  시간은 정말 상대적일까? 촬영장에서나 산속에서는 그렇게 가지 않던 2주일이 눈 깜박할 사이 흘렀다. 하지만 기대하고 참석한 독서 모임에 그녀는 보이지 않았다. 주변에 물어보고 싶었다. 그녀가 어디에 갔는지. 하지만 모두 그녀의 부재에 관해서는 말하지 않고 책에 관해서만 언급했다. 빨간 옷에 흰 두건을 한 여자들이 책 표지 위에서 나를 보고 있었다. 너덜너덜한 책을 열자, 다양한 색의 볼펜들로 적힌 글씨가 책 여백에 한가득 보였다. 대부분 물음표와 why로 시작하는 문장을 보며, 정말 그녀는 어디에 갔을지 궁금했다.

  모임이 끝나고 허탈한 마음을 달래며 야근하는 사람들 틈을 한 바퀴 돌고 탕비실 옆 계단의 문을 열었다. 조명이 약해 조금 어두운 계단을 향해 한 발을 내딛자, 어디선가 여자 울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렸다. 아래층에서 휴대폰으로 뭔가 이야기하는 여자. 불빛이 흐려 사물을 분별하기 어려웠지만, 그녀는 왠지 지수 같았다. 반 층 아래 계단에서 창밖을 보고 있는 뒷모습이었지만 낯익었다. 그녀는 울고 있었다. 기억 속 엄마처럼. 

    

  울지마. 경환아!     

  엄마가 떠날 때 그녀의 눈물이 광대뼈를 타고 흘렀다. 엄마의 다리를 붙잡고 늘어졌지만 아빠는 나를 떼어내 옷장에 가뒀다. 울음소리가 신음이 될 때까지 옷장 틈 사이의 빛을 보며 어둠이 눈에 익어 내 모습이 보일 때까지 숨죽여 있었다. 엄마가 보고 싶어 떼를 쓸 때면 그럴 때마다 옷장에 갇혔다. 그 속에서 실눈으로 틈 사이로 보이는 가족사진에 초점을 맞추었다.  맞춰도 맞춰도 보이지 않는 엄마 얼굴을 보았다.

  혹시 내 발걸음 소리가 들릴까 봐 얼음처럼 굳어서 ‘14F’라고 씌어있는 벽의 숫자를 보고 있었다. 잠시 후 문을 여는 소리가 계단에 울렸다. 열린 문틈 사이로 한 줄기 빛이 그녀의 모습을 비추다 사그라졌다. 그녀가 떠난 빈자리를 보며 팔을 긁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15층에 사무실로 돌아왔다. 손끝에 피가 묻어 있었다. 휴지로 손을 닦고 밴드로 상처를 꼭 싸맸다. 반들반들한 밴드를 만지자 부드러운 감촉이 느껴졌다.     

  며칠 뒤 1층 로비에서 지수를 만났다. 가볍게 그녀와 인사를 하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저번 모임에는 안 나오셨던데.”

 “네, 일이 좀 있어서…….”

  그녀의 손에는 책이 들려 있었다.

  “무슨 책 읽으세요?”

  “여행책이요.” 그녀가 살짝 책을 올리자 <그 좋았던 시간에>라는 제목이 보였다. 건물 위에 작게 사람이 서 있는 표지였다.

  “재미있나요?”

  “네. 시도 있고 여행지 사진도 있고 볼만한 것 같아요.”

  여행을 좋아하느냐고 묻고 싶었지만, 11층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사람들이 들어왔다. 14층에 도착하자 가벼운 눈인사를 하고 그녀가 내렸다. 짧은 머리를 한 그녀가 닫히는 문 사이로 멀어지는 것을 보는 순간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엘리베이터 문의 작은 틈 사이에 손을 넣었다. 덜컹거리며 작은 충격과 함께 문이 열렸고 나는 복도로 나가 그녀에게 소리쳤다.

  “지수 씨, 책 다 읽으면 저도 볼 수 있을까요?”

  그녀는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이며 미소 지었다. 나는 손을 들어 한 번 흔든 후 머리를 긁으며 다음 모임에서 보자고 말하고 다시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점심시간이라 올라오기까지 한참 걸리는 엘리베이터를 보며 다음 프로그램은 다람쥐 때문에 자라난 나무 이야기를 준비해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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