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 나를 부르는 소리
프롤로그
“누구에게도 쉽게 꺼내지 못한 이야기,
오늘은 조금만 솔직해지고 싶습니다.”
비 오는 날, 나를 부르는 소리
— 일흔다섯의 긴 독백
살다 보니,
어느새 일흔다섯이 되어 있었다.
남들은
“정말 대단하십니다, 아직도 정정하시네요.”
따뜻한 말 한마디를 건네지만
나는 그 말의 온도를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라
입꼬리만 얇게 올린 채
그 말을 조용히 발치에 내려놓는다.
겉으로는 멀쩡한 사람처럼 걷지만
하루가 끝나 문을 닫고 들어오면
말할 곳을 잃은 마음들이
허공에 떠 있다가
천천히 내 가슴 쪽으로 스며든다.
사람들 틈에서 웃고 있어도
문득, 혼자인 듯한 적막이
등 뒤로 흘러드는 나이.
그럴 때면 조용히 나에게 묻곤 한다.
‘친구’라는 말은
도대체 어디까지를 의미하는가.
부끄럼 없이 마음을 맡길 수 있는 사람,
내가 조금 흔들려도
나를 놓지 않을 사람.
그런 이가
과연 내게 있었던가.
어쩌면 내가 글 속에서 ‘친구여’라 부른 존재는
다른 누구도 아니라,
평생을 버티고 견뎌온
나 자신에게
몰래 붙여둔
마지막 다정한 호칭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어머니가 떠난 뒤
집안의 온기는 서서히 흩어지고,
사람은 그대로인데
우리 사이에는
말없이 넓어지는 거리와
쉽게 마르지 않는 적막만 남았다.
형제들의 우애도,
친척들의 발걸음도
멀리 들판 저쪽으로 천천히 사라져 가는 풍경처럼
희미해졌다.
누가 등을 돌린 것도 아닌데
누구도 먼저 다가오지 않았다.
그저 서로의 마음이
말없이 뒷걸음질을 하듯 멀어질 뿐이었다.
남은 것이라곤
넓고, 그리고 조금은 무겁게 느껴지는 집 한 채.
사람들은 말한다.
“그 집이면 노후는 걱정 없으시겠네요.”
하지만 나는 안다.
그 집은
나와 아내가
평생을 걸어 쌓아 올린
세월의 마지막 자리라는 것을.
가끔은 말한다.
팔아서 조금 편하게 살자고,
“죽으면 가지고 갈 것도 아니지 않으냐”라고
내가 먼저 현실을 들이밀어 보아도
삶은 뜻대로 풀리지 않는다.
아내는
추억을 붙든 손을 놓지 못한 채
같은 지붕 아래에서
각자의 방식으로
마음을 겨우 지탱하며 버티고 있을 뿐이다.
아내는
참 착하고 예쁜 사람이다.
세월이 아프다고 몸이 먼저 알려오는 나이인데도
코마 상태인 딸에게
들릴지 모를 말을
하루에도 몇 번씩
살포시, 다정하게 건넨다.
그 모습은
가슴이 저리도록 아름답다.
그런데도
그 다정함이
요즘은 이상하게
나에게만은 도착하지 못한다.
작은 한숨,
짧은 짜증,
예민한 말투로 돌아오기도 한다.
이해가 되면서도,
솔직히 말하면
억울하고, 서운하고,
가끔은 막막하다.
딸아이가 병상에 누운 지
벌써 다섯 해.
그 길었던 시간 동안
아내 마음 깊은 곳에서는
보이지 않는 살점이
하나둘 닳아 없어졌을 것이다.
그래서
나에게만 울어도 된다고
마음이 알아서 허락한 건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걸 너무 잘 안다.
안다고 해서
받아내는 일이
쉬운 건 아니지만.
밤이면
둘은 같은 집에 누워 있어도
각자의 아픔을 끌어안은 채
다른 파도처럼 출렁인다.
말하지 못한 감정들이
천천히
억눌린 숨처럼 차오른다.
비 내리는 퇴근길,
차창에 비친 내 얼굴을 바라본다.
참 오래 견뎌온 사람이
낯설게 서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낯섦이
따뜻하다.
그 얼굴에게
오늘만큼은
살며시 이렇게 말해본다.
“괜찮다…
정말 잘 살아왔다.
참 오래 버텼다.”
그건
누가 대신 건네주는 위로가 아니다.
내가 나에게 건네는,
마지막으로 남은
한 줌의 온기 같은 말이다.
그리고
흐린 창 너머
고요한 빗소리 사이로
누군가 내 이름을 부르는 듯한
잔잔한 울림이 스며온다.
“나요…
오늘도 고맙다.
내일도…
조금만 더 살아보자.”
에필로그
“오늘도 나는,
내 자리를 조용히 지켜보며
하루를 견딥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