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제 : 그 분)
1화. 비밀
소설가 정해는 놀라운 재능을 가진 작가였다. 첫 소설집부터 베스트 셀러를 기록 했고, 이후 4년 동안 네 권의 장편 소설을 썼는데, 이 작품들 모두 엄청난 판매부수를 기록했다. 정해는 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저는 비가 오는 날에만 글을 씁니다. 빗방울이 떨어지는 불규칙한 소리를 듣고 있노라면 그 분이 오십니다. 이때가 비로소 글을 쓸 준비가 된 것이죠. 인터뷰어는 정해의 이 말을 우스갯 소리로 받아 넘기지만 이는 사실이었다.
정해에게는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는 비밀이 있었다. 그것은 집필에 들어갈 때마다 귀신이 찾아와 말을 건다는 사실. 귀신의 연령, 성별, 인종은 다양했고 작품 당 한 명씩만 찾아왔다. 그리고 비가 오는 날에만 왔다. 이때, 누가 찾아오느냐에 따라 소설의 장르와 스토리 그리고 주제가 정해졌다. 글은 전적으로 이들의 속삭임을 토씨 하나 다르지 않게 받아 적으며 완성됐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탄생한 소설들이정해의 필모를 화려하게 채워 나가고 있었다.
최근 정해는 신작 집필에 들어간 상태였다. 예보한 대로 비가 내리고 있었다. 이번에도 늦은 시간에 어두운 거실 귀신이 홀연히 모습을 드러냈다. 헌데, 이번에 나타난 귀신은 전과 달리 기괴했다. 몸은 앙상한 수준을 넘어 거죽만 남은 상태였는데, 가장 이상한 점은 검은 입이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치아가 모두 흑빛이었다. 이는 일본의 전통 문화 ‘오하구로‘를 떠올리게도 했다. 귀신의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감지한 정해는 어쩌면 굉장한 작품이 탄생할 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품는다. 귀신은 정해의 맞은편 자리에 앉더니 입을 열었다. 검은 치아가 드러나며 이야기가 시작됐다.
미일 태평양 전쟁이 촉발된 시기였다. 쿠슈 지방, 불행에 짓눌린 한 일본인 여성이 살고 있었다. 이름은 아키코(あきこ). 그녀는 전쟁의 포화로 양친과 남편을 잃었고 두 살 난 딸은 전염병으로 숨졌다. 세상에 홀로 남겨진 아키코는 자신에게 닥친 불행을 받아들이지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다. 하지만 인근을 지나던 승려가 그녀를 살렸다. 승려는 모든 것이 전생의 업보에서 비롯된 것이니 누구도 원망하지 말라고 했다. 차라리 남은 생에 선업을 더 쌓아 후생의 복을 마련하라는 말을 전했다. 이 소리는 아키코가 가장 듣기 싫어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그 다음 얘기가 귓가를 파고 들었다. 승려는 아키코가 전생에 맺은 누군가와의 지독한 악연이 현생을 망친 거라고 말했다. 그리고 그 불행의 원흉이 된 사람이 3년 뒤, 도쿠시마현 한 마을에서 ‘쿠지마’라는 이름으로 다시 태어날 거라고 말했다. 그를 찾아가 선업을 쌓으면 악연의 고리가 풀리게 될 것이라고 조언했다. 하지만 아키코의 뜻은 반대였다. 만약, 승려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 놈을 찾아내 복수하고 싶었다. 하지만 승려의 말을 온전히 믿기에는 무리였다.. 승려는 ‘땅이 해를 낳을 것이다’라는 이상한 말을 남기고 떠났다. 그리고 다음 날, 아키코는 자신이 딛고 선 땅이 진동하는 것을 느꼈다. 엄청난 굉음이 들려왔다. 원자폭탄이었다... 처음 맞닥뜨리는 공포와 전율이 온 몸을 휘감았다. 원폭투하로 핵겨울이 찾아왔고, 아키코는 거대한 섬광과 함께 버섯 구름이 찍힌 신문 속 사진을 보며, 땅이 해를 낳을 것이라던 승려의 말을 떠올렸다. 그의 말이 사실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에게 닥친 불행의 원흉이 3년 뒤 도쿠시마현의 한 마을에서 ‘쿠지마“라는 이름으로 태어난다는 말. 만약 그 말이 사실이라면, 복수하고 싶었다.
아키코는 기다렸다. 쿠지마가 태어날 때까지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악행도 서슴치 않았다. 생존을 위해 남의 것을 훔쳤다. 시간이 흐를수록 아키코의 손은 피로 얼룩졌다. 하지만 그녀의 정신은 더 또렷해지고 신체는 강건해졌다. 아키코는 이런 자신을 증오했다. ‘쿠지마‘라는 이름의 원흉이 정말로 태어난다면 함께 죽으리라 결심했다. 승려의 얘기를 들은 지 삼년이 다 돼가고 있었다. 아키코는 도쿠시마현으로 길을 떠났다.
2화. 입을 다물다.
정해의 소설은 여기서 멈춰 있기를 9개월 째였다. 귀신이 침묵했기 때문이다. 아무리 말을 걸어도 검은 입은 굳게 닫혀 열리지 않았다. 정해는 태어나 처음 창작통이라는 것을 겪게 되고, 수면제 없이는 잠들지 못했다. 점점 말라갔고 날이 섰다. 주변인 누구도 다가오지 못했다. 정해는 결국 혼자서 소설을 마무리 지어 출판사로 보냈다. 뒷부분은 다음과 같았다.
아키코가 도착한 곳에는 만삭의 산모가 직물 염색 공방 장인과 부부로 살고 있었다. 아기를 키우기에 좋은 환경이었다. 산모의 부른 배를 본 아키코는 분노를 느꼈다. 젖도 떼기 전에 병에 걸려 죽은 딸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아키코는 산모가 혼자 있을 때를 노려 집으로 잠입했다. 그리고 칼을 꺼내 겨눴다. 지난 3년간 온갖 고초를 겪은 아키코의 모습은 산모를 경악케 했다. 산모는 돈을 주겠다며 제발 아기 만은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산모의 간절한 호소는 아키코를 더 자극하고 있었다.
얼마 후, 온 몸에 피를 묻힌 아키코가 어두운 숲속 길을 걷고 있었다. 서러운 울음이 멈추지 않았다. 삼나무 숲속에 이르자, 걸음을 멈추고 나무에 줄을 걸었다. 죽음 말고는 이제 더이상 그녀를 구원할 수 있는 길은 없다고 생각했다. 목을 메고 발을 떼려는데, 어둠 속에서 폭도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아키코는 이들 중 한 사내를 기억했다. 예언을 남기고 떠난 승려였다. 하지만 지금은 파계승이 되어 있었고, 어떤 충격을 받았는지 미쳐버린 상태였다. 아키코는 당시 승려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생生은 각자가 지은 업業에 의해 결정된다는 말. 파계승은 칼을 세우고 아키코를 향해 걸어왔다. 표정에는 그 어떤 감정도 담겨 있지 않았다. 그저 폭도들의 광기에 이끌려 움직이고 있었다.
같은 시각, 공방의 산모가 의식을 찾았다. 남편이 막 태어난 아기를 품에 안고 있었다. 산모는 아키코가 칼을 겨눈 순간, 하혈과 함께 산통이 시작된 것을 기억했다. 아랫배가 찢어질 듯 아팠고, 이후는 기억나지 않았다. 남편이 말하길, 도착했을 때 아기는 무사히 태어나 천에 감싸져 있었고 노리개가 놓여 있었다고 했다. 아키코의 죽은 딸이 가지고 놀던 노리개였다.
정해의 소설을 끝까지 읽은 편집장의 반응은 싸늘했다. 정해로서는 처음 느껴보는 수치심과 모멸감이었다. 정해가 불같이 화를 내자 편집장은 당황했다. 직원들이 수군댔다. 정해의 날 선 반응보다 몰라볼 정도로 퀭해진 모습이 더 충격이었다. 정해는 긴 검은 생머리를 늘어뜨린 데다가 얇고 흰 옷을 입고 있었는데, 이 모습은 검은 입을 한 귀신의 모습과 닮아 있었다. 하지만 누구도 이 사실을 눈치챌 순 없었다. 정해 자신 조차도. 정해는 결국 집필을 중단하고, 정신과 치료를 시작했다. 하지만 귀신은 계속 주변을 배회했다. 산책을 하거나 운전을 하거나 심지어 애인과 관계를 가질 때도 나타났다. 치료에 차도가 없자, 결국 이름 난 영매를 찾아 나섰다. 정해는 태어나 누구에게도 말한 적 없는 비밀을 털어놓아야 했다. 지금까지 쌓아올린 부와 명성이 사실 귀신의 도움을 통해서였다는 얘기를 듣게 된 영매는 정해를 돌려보냈다. 어두운 굿당에 앉은 영매는 홀로 의식을 치렀다. 온 몸이 땀으로 흥건해지면서 무언가와의 교감이 시작됐다. 처연하고 애통하고 악에 받친 표정이 번갈아 나타났다. 영매와는 다른 젊은 여자의 흐느낌 소리가 터져 나오고 있었다.
며칠 뒤, 영매는 정해를 불러 귀신에 대해 알아낸 바를 말했다. 귀신은 지금 원과 한으로 가득 차 있으며, 정해의 주변을 계속 맴도는 이유는 듣고 싶은 말이 있어서라고 했다. 그 말을 정해가 해주면, 귀신도 소설을 완성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라 했다. 정해가 해줄 말이란 진심어린 사과였다. 당혹스러웠다. 무슨 잘못을 했는 지도 모르는데 무슨 사과를 한단 말인가. 영매는 그것을 알아내려면 위령제를 지내야 한다면서 일억을 현금으로 요구했다. 속히 귀신에게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 굿을 하기로 결정한다.
비가 오는 날에 맞춰 정해의 작업실에 위령제 준비가 끝났다. 작업대에 노트북이 놓이고 그 앞에 정해가 앉았다. 주변으로 금줄이 쳐지고 부적과 기물들이 세워졌다. 준비를 끝낸 영매와 무녀들이자리를 떴다. 밤이 되자 빗소리와 함께 노트북 불빛만이 어둠을 밝혔다. 그리고 잠시 후, 귀신이 거실 너머에서 홀연히 모습을 드러냈다. 천천히 다가와 정해를 내려다보자, 영매가 시킨 대로 바닥에 넙죽 엎드렸다. 모두 내 잘못이니 한번만 용서해달라며 머리를 조아리며 빌었다. 정해의 하소연을 듣던 귀신이 자세를 낮추더니 속삭였다. 소설의 결말이 들려오고 있었다.
3화. 카르마 베이비 (KARMA BABY)
승려의 예언에 따라 3년을 기다린 아키코는 도쿠시마현 마을에 도착했다. 원흉이 태어날 곳은 아이조메 (쪽빛 직물 염색) 공방이었다. 공방의 장인은 만삭의 여자와 살고 있었다. 아키코는 산모의 뱃속에 든 저것이 자신의 불행의 원흉인 ’쿠지마‘라고 확신했다. 인근을 배회하며 저것이 태어나기만을 기다렸다. 한편, 공방 조수들 중에는 미군과 조선인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 사내가 있었다. 2차대전 패망으로 미군과 조선에 대한 대한 적개심으로 가득 차 있던 일본인 조수들은 이 사내를 멸시했다. 하지만 아키코는 사내를 연민에 찬 눈으로 지켜봤다. 자신만큼 불행한 삶을 살아가는 또다른 인간을 만난 기분이었다. 시선을 감지한 사내가 아키코의 눈 앞에 불쑥 나타났다. 아키코는 칼을 꺼내 경계했지만, 사내는 웃으며 따뜻한 음식을 건넸다. 아키코는 사내와 말이 통하지 않았지만, 오랫동안 느껴보지 못한 온기에 마음이 동했다. 그리고 음식을 받아 입에 넣었다. 그리고 잠시 후, 쏟아지는 잠을 이기지 못하고 아키코는 쓰러지고 만다.
눈을 떠보니, 어둡고 밀폐된 공간이었다. 인간의 두개골을 그린 그림들이 벽에 붙어 있었다. 사내는 두상과 골격의 형태에 따라 인간의 특질이 정해진다는 ’골상학‘을 몰래 연구하고 있었다. 이는 독일에서 유래한 이론으로 수백 만 유대인을 학살하는데 근거가 된 학문이었다. 사내는 이 골상학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자신을 학대하고 멸시하는 일본인에 대해 긴 연구를 해오고 있었던 것이다. 묘지를 파헤쳐 두개골을 수집했고, 공방의 직물 염료를 가져와 칠하고 분류했다. 짙은 먹색부터 밝은 쪽빛까지 다양했다. 더 많은 표본이 필요했던 사내는 산 사람들까지 유인해 살해하고 거죽을 발라내 뼈를 얻었다. 모두 일본인들이었다. 사내는 지금 아키코를 작업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공포와 충격에 휩싸인 아키코는 움직일 수 없었다. 살려달라는 말도 나오지 않았다. 먼 곳에서 아기 울음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쿠지마‘가 드디어 태어났다고 아키코는 짐작했다. 하지만 이제 늦었다. 사내가 손에 쥔 예리한 칼이 아키코의 두개골을 파고 들었다. 시뻘건 선혈이 바닥을 적셨다. 아키코는 뜬 눈으로 숨을 거뒀다. 사내는 무표정한 얼굴로 거침없이 작업을 이어나갔다. 뼈와 근육 잘리는 소리가 공간을 가득 메웠다. 잠시 후, 발골 작업이 끝난 아키코의 두개골이 가장 하등한 등급인 짙은 먹색으로 칠해졌다. 사내는 피가 뭍은 상의를 벗고 다른 헌군복으로 갈아 입었다. 가슴께에는 ’쿠지마‘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승려가 예언한 그 이름이었다.
정해를 바라보는 검은 입의 귀신이 활짝 웃고 있었다. 크게 벌어진 입 속에서 흙빛의 치아가 온전히 드러났다. 극도의 공포와 충격이 정해를 덮쳤다. 귀신은 가늘고 기다란 손가락으로 입술을 쥐더니 자신의 얼굴 거죽을 벗겨냈다. 피부가 뒤집히면서 근육과 혈관들이 찢어졌다. 얼굴 뼈가 드러났다. 두개골은 검은 치아와 같은 짙은 먹색이었다. 뼈와 시뻘건 근육과 혈관들이 흉측하게 드러난 귀신이 정해를 내려다봤다. 휘둥그레진 정해의 동공에는 살기를 띤 채 노려보는 ‘아키코’의 모습이 반사돼 보였다. 그리고 정해를 내려다보는 귀신의 검은 동공 속에는 그 옛날 아키코를 살해한 혼혈 사내 ‘쿠지마’가 공포에 질린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정해는 그제야 깨달았다. 생生은 각자가 지은 업業에 의해 결정된다는 승려의 얘기를... 블랙아웃.
다음날 아침, 밤새 내리던 비가 그쳤다. 노트북 화면에 소설이 완성돼 있었다. 그리고 정해는 바닥에 쓰러진 채 꿈쩍도 하지 않았다. 귀신의 흔적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날 저녁, 베스트셀러 소설 작가 정해가 작업실에서 급성 심근경색으로 사망한 채 발견됐다는 소식이 보도되고 있었다.
그로부터 1년 뒤, 대형서점에서 출판 기념회가 열리고 있었다. 무속인에서 소설가로 등단한 한 여성 작가가 독자들과의 대화를 진행 중이었다. 밖에 비가 오는지 레인부츠를 신은 여성들이 많았고, 비닐이 씌워진 우산을 들고 있는 사람들도 보였다. 이들 너머 무대에 착석한 작가는 놀랍게도 영매였다. 소설 제목은 ’카르마 베이비 (KARMA BABY)‘였고, 2024년을 살아가는 한 여성 소설가와 2차 세계대전 당시에 비극적인 삶을 산 여인의 이야기가 액자식 구성으로 전개되는 미스터리 호러 장르물이었다. 전생과 윤회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소설이었다. 독자들 너머 누구의 눈길도 닿지 않는 서가를 거니는 한 여자가 보였다. 죽은 정해였다.
- 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