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호찬의 아파트 거실에 새로운 식구들이 들어와 수사에 합류했다. 얼핏 보기에 MZ 조폭 두 놈에 오타쿠 이대남 하나를 합쳐 논 모양새였다. 호찬은 이 세 녀석 이름의 성씨를 따서, 이. 조. 양이라고 싸잡아 불렀다.
이학사
조석사
양광준
호찬은 이들에게 산더미처럼 쌓인 사건 수사 자료들을 검토시켰다. 광준에게는 사자에게 살해당한 피해자 지인 그리고 사돈에 팔촌까지 금전 관계부터 계좌, 통신 내역, 평소 왕래한 사실 여부까지 샅샅이 뒤져서 살해 동기로 의심되는 부분들을 찾으라 지시했다. 오타쿠들의 공통된 특성인, 한번 꽂히면 끝까지 파는 성격을 광준에게서 감지했기 때문에 맡긴 업무였다. 이학사와 조석사에게는 광준이 탐문 수사 대상을 추려낼 때까지 CCTV 촬영 영상을 보게 했다. 사건 발생 현장을 기점으로, 반경 1.5KM 이내에 설치된 CCTV 전부를 훑게 했다. 호찬이 지시한 수사 업무는 해안가 모래사장에서 분실한 반지를 되찾는 것만큼이나 무모했다. 모두가 같은 자리에서 같은 일을 며칠 동안이나 반복했는지 다크서클이 번진 눈을 하고는 연신 하품을 해댔다. 초췌해진 건 호찬도 마찬가지. 어느새 덥수룩해진 머리와거뭇한 수염 그리고 거칠어진 피부. 하지만 집중할 때 번뜩이는 안광만은 여전했다. 호찬은 담배와 라이터를 들고 발코니로 나가더니 블라인드를 올렸다. 온 집안을 가득 채운 수사 자료들과 쓰레기 더미 위로 아침 햇살이 던져졌다. 담배를 입에 문 호찬은 오십 일이 넘도록 지속되고 있는 사자의 침묵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연쇄 살인범의 범행에 이처럼 공백이 생기는 경우는, 프로파일러들이 말하는 '심리적 냉각기'로 해석될 수 있었다. 원인은 네 가지.
첫째. 오로지 살인이 목적인 쾌락형 살인마의 경우, 살인 엔진이 다시 가동될 때까지 시간이 필요하고
둘째. 과대망상적 목표를 세우고 살인하는 사명형 살인마라면 원하는 바를 이미 이뤘다고 볼 수 있으며
셋째. 밀항했거나 죽었을 경우, 더 이상의 살인은 없을 것이고
넷째. 살인이 사적 제재이고 정의구현이라 믿는 비질란테형 살인마라면 지금 타깃을 물색하고 있을 것이다.
사자에게 죽은 피해자들 모두 범죄를 저지른 이력이 있거나 악행을 일삼아온 자들이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사자의 침묵은 네 번째 원인으로 해석될 수 있었다. 사회 질서를 바로 잡는다는 착각 속에서 이십 여명을 참혹하게 살해했던 유영철이 바로 이 부류에 속했다. 경찰에서는 지금도 수많은 인력을 투입해 사자를 쫓고 있었지만, 현장에는 족적이나 머리칼, 혈흔과 같은 범인을 특정할 만한 단서가 단 한 점도 채증되지 않았다. 게다가 인근 CCTV는 작동이 멈춰있거나 파손돼 있었으니, 참으로 완벽한 사후처리였다. 속히 사자를 잡아들이지 못한다면 향후 얼마나 더 많은 피해자가 양산될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런저런 생각 끝에 호찬의 담배는 어느새 짧아져 손가락에 열기가 닿았다. 앗 뜨거 시발...방정맞게 손을 털다가 입에 넣는데, 등 뒤에서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형님."
뭐... 근엄한 표정으로 호찬이 돌아보니, 이학사와 조석사가 쟁반 받치듯 노트북을 양손에 들고 다소곳이 서 있었다. 호찬은 못마땅한 얼굴로 불룩 튀어나온 조석사의 배를 손등으로 쳤다. "형님 아니고, 캡틴, 캡틴 퍼얼ㅋ (Captain Park)이라고 새끼야." 호찬은 대장을 뜻하는 캡틴에 자신의 성을 붙여 만든 '캡틴 퍼얼ㅋ'으로 불려지기를 원했다. 아이들은 모두 세상이 자신을 중심으로 돈다고 여기는 나르시시스트들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본다면 호찬의 이런 유치한 요구는 이상할 것도 없었다. 애처로운 것은, 약점이 잡혀 이곳까지 끌려와 팔자에도 없는 범죄 수사에 투입된 이. 조. 양이었다. 이. 조는 혀를 굴리며 복명 복창했다. "네 캡틴 퍼얼ㅋ" 호찬은 그제야 이들이 노트북에 뭘 가져왔는지 들여다봐줬다. 조석사가 물었다. 일전에 뉴스에 나와서 캡틴에 대해 막말 인터뷰하던 형사 놈들 기억나느냐고. 호찬은 당연히 기억하고 있었다. 어찌 잊겠는가, 모자이크라는 익명의 방패 뒤에 숨어서 나의 험담을 해대던 그 놈들을... 조석사는 모자이크가 제거된 영상을 구했다며 한 번 보시라고 호들갑을 떨었다. "새끼, 재주 있네." 기대감에 찬 호찬은 힘차게 스페이스바를 찍어 눌렀다. 화면에는, 맨 얼굴을 드러낸 형사들이 기자의 카메라 앞에서 호찬을 신랄하게 까대고 있었다. 호찬은 면면을 확인하며 한 명씩 이름을 읊조렸다. "남부서 추상섭, 인천 북부서 장철완... 오호... 우경섭이...이 새끼…" 얼마 전, 토끼 모텔에서 마찰을 빚었던 우경사도 보였다. 특별수사대가 편성되면서 지금은 경위로 진급한 상태였다. 호찬은 원본을 어디서 구했는지 물었고 조석사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방송국 직원 퇴근할 때 기다렸다가 잡아서 족치니까 원본을 주더란다. 호찬은 굳은 얼굴로 말했다. "우리, 사자 잡을라고 모인 거야. 나쁜 놈 잡는 거라고. 나쁜 짓 하자는 게 아니고. 알었어?!" 이학사와 조석사가 이구동성으로 답했다. ”네 캡틴 퍼얼ㅋ“ 앞으로 불법적인 일 저지를 땐 결제받고 저질러,라며 호찬이 주의를 단단히 주는데 현관문 벨이 울리고 모두의 시선이 그리로 쏠렸다.
잠시 후, 현관문 안으로 들어선 진반장과 이순경이 기가 찬 얼굴로 거실을 바라보고 있었다. 호찬의 집 거실은 쓰레기 더미들로 산을 이뤘고 그 너머에는 조폭 사무실을 연상케 하는 수사본부가 세팅돼 있었기 때문이다. 이. 조. 양을 본 진반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순경도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호찬이 수사 자료 요청을 할 때면 외부에서 만나 USB 메모리를 넘기긴 했지만, 이렇게 수사본부로 들어와 본 건 처음이었다.
호찬은 뭘 그러고들 섰냐 말하며 바닥의 쓰레기들을 발로 밀면서 길을 터줬다. 신발장에서 거실 소파까지 비단길이 열렸다. 진반장은 사무실에서 손수 기르던 거북이 수조를 들고 입장했고, 이순경은 두루마리 화장지 열다섯 개 들이 묶음을 들고 뒤따랐다. 호찬은 집들이 왔느냐 물었고, 이순경은 빈손으로 오기가 좀 그래서요, 라며 금세 너스레를 떨었다. 소파에 풀썩 주저앉은 진반장은 한심하단 얼굴로 말했다. "너 뭐, 조폭이냐?" 진반장은 뻘쭘하게 선 이. 조. 양을 하나씩 뜯어보더니, 조석사와 이석사에게 말했다. "그래, 니들 둘은 낯이 익네. 강남역에서 스쿠터 타고 유흥 전단지 날리다가 경찰차랑 교통사고 낸 놈들 아냐." 허허실실 웃는 이석사와 조석사. 진반장의 시선은 광준에게로 옮겨갔다. 찬찬히 뜯어보다가 누군지 모르겠는지 갸웃하자 광준이 시니컬하게 한 마디 뱉었다. "뭐요." 이순경이 빤히 바라보자 지지 않고 쳐다보는 광준. 호찬이 끼어들었다. "아, 왜 그래. 죄는 좀 졌어도 보니까 새끼들이 근본은 있어." 라며 이. 조. 양을 싸잡아서 감쌌다. 그리고는 "뭐 해? 인사드리잖구?" 그러자 이학사와 조석사는 폴더 인사를 하며 열심히 하겠단다. 띠꺼운 얼굴의 광준만 뻣뻣한 태도를 그대로 유지했다. 호찬은 나가서 사우나하고 밥 사 먹으라며 신용카드를 내밀었다. 조석사는 두 손으로 공손하게 받으며, "감사합니다. 캡틴!" 크게 외치더니 이학사와 현관을 나섰다. 광준은 관심 없는지 묵직한 수사자료를 들고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호찬이 외쳤다. “파이팅 가즈아! “ 기가 찬 진반장과 이순경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바라만 볼 뿐이고..
거실에 호찬과 이순경만 남게 되자 진반장의 잔소리가 시작됐다. 이제 사는 게 재밌어졌냐,부터 잡범들 불러다 놓고 대장 놀이 하니까 좋냐, 를 지나 너 드림팀 감독하게? 너 이거 문제 될 수도 있어, 까지. 듣다 못한 호찬이 나섰다. "자발적으로 모인 거야. 자발적으로. 글고, 아 잔소리하러 왔어?" 호찬이 따지는 사이, 이순경은 화이트보드에 호찬이 적어 둔 집요한 수사 기록들을 보며 감탄했다. 호찬의 놀라운 집중력이 발휘된 흔적들이었다. 바로 이런 점들이 뛰어난 검거율의 원천이기도 했고. "대박… 사자 곧 잡히겠는데 말입니다?" 라며 이순경은 호찬이 쓴 메모들을 소리 내 읽었다. "첫 번째 살인은 오른손잡이, 세 번째 살인은 왼손잡이..." 휙 돌아보더니, "그럼 사자가 양손잡이란 겁니까?" 호찬이 말했다. "사자가 한 놈이 아닐 수도 있단 얘기야. 야, 앉어. 정신 사나워" 하더니 진반장이 가져온 거북이 수조를 가리키며 물었다. "뭔데, 이건?" 진반장은 사표를 냈노라 말했다. 고향 내려가는데 봐 줄 사람 없어서 맡기러 왔다는데... "사표라니...?" 호찬이 놀란 표정으로 물었다. "형이 사표를 왜 내?" 진반장은 너는 되고 나는 안 되냐며 무덤덤하게 말했다. 호찬은 죄책감 가득한 얼굴로 바라보다가, 갑자기 키득대기 시작했다. "그럼 형두, 혹시 그거야? 백기사?" 진반장은 어처구니가 없어 입을 꾹 닫아버리고, 호찬은 재밌어 죽겠는지 배를 잡고 깔깔댔다. "경찰서에 무슨 전염병이 도나. 크하하." 이순경은 조마조마한 표정으로 분위기를 살폈다. 진반장은 안 주머니에서 봉투를 꺼내더니 호찬 앞에 무심하게 툭- 던졌다. 호찬이 웃음기를 지우고 물었다. "뭔데?" 그러자 이순경이 대신 설명했다. 총기 사망자 유족한테 민사 소송까지 걸리고 힘드실 줄 안다고. 얼마 안 되는 돈인데 팀원들끼리 모았다고. 호찬은 정색하며 화를 냈다. ”뭐 하는 짓이야? 나 돈 많아. “ 진반장이 코웃음을 쳤다. "많긴... 우편함에 세금 고지서가 한 무더기던데? 물은 나오냐?" 호찬이 따져 물었다. ”아 왜 남의 집에 와서 수사를 하고 지랄이야! 그리고 나 돈 많다니까? 보여줘? “ 진반장이 더 말 섞기 싫다는 듯 일어섰다. "새끼, 화내는 거 보니까 아직 살만하네. 차 시간 있어서 난 간다." 이순경도 덩달아 일어섰다. 어디로 가느냐고 호찬이 묻자 고속버스 터미널로 간단다. 그러자 호찬은 태워주겠다며 일어섰다. 진반장은 호찬을 도로 앉히지만, 함께 가려는 이유는 형 때문이 아니라 근처에 볼 일이 있어서라며 끝끝내 따라나섰다.
2.
호찬의 차가 도심을 달리고 있었다. 조수석에 앉은 진반장은 말이 없고, 호찬은 콧노래를 흥얼대면서 눈치를 살피다가 물었다. "이야~ 좋겠네. 아들내미가 아빠만 찾았잖아. 이름이 뭐랬드라, 맞다. 태서?" 진반장은, 엄마가 없으니까 아빠만 찾지 인마, 라며 퉁명스럽게 대꾸했고 호찬은 지지 않고 할머니 같이 산다며? 라고 응수한다. 호찬은 하려던 말을 쏟아냈다. “아 누가 사표내래? 버텨야 될 거 아니야. 지금까지 더러운 꼴 다 봐놓고.” 진반장은 더운지 창문을 열었다. 그러자 호찬은 운전석 도어 손잡이 있는 버튼을 눌러 도로 올리고, ”더우면 에어컨 틀고 창문은 닫어. 사람들 보잖아.“ 기가 찬 진반장은 ”뭘 봐, 너 안 봐 인마.“ 호찬이 말한다. ”난 줄 다 알아본다니까? 장사 원 투데이 하나…“ 호찬은 궁시렁대며 선글라스까지 꺼내 쓴다. 차 주변으로 지나는 차량과 행인들은 저마다의 방향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아, 환자새끼 이거." 진반장이 고개를 내젓더니, "내가 쭉 보니까 너는 경찰 관두는 게 맞아. 딴 거 해. 유튜브를 하던 삐끼를 하던"이라며 빈정댔다. 그러자 픕- 웃음을 터트리더니, 아 삐끼가 왜 나와 거기서. 늙은 거 인증해? “ 호찬이 비웃자 진반장은 더 이상 대꾸하지 않았다. 침묵이 흐르자 창 밖에서는 삐끼송에 맞춰 삐끼삐끼춤을 추는 행사 도우미들이 스쳐 지나고 있었다.
호찬이 말했다. ”형, 한 달만 기다려. 사자 새끼 내가 잡으면 바루 휴대폰 때리께. 우리 둘이 그놈 수갑 채워갖고 경찰서 끌고 가자고. 그럼 국민 청원 게시판에 제발 돌아와 달라고 난리 날 수도 있어. 그럼 광고도 찍고…" 진반장은 혀를 차며, "넌 애가 모자란 거냐, 아님 연기를 잘하는 거냐. 너 본 지 횟수로 이제 팔 년 됐는데... 됐다…" 말꼬리 흐리자 호찬이 되물었다. "됐는데... 뭐?" 그러자 진반장이 말을 마무리 짓는다. "내 경찰 인생에 가장 좆같은 사건이 너라고 인마. 이거 잡아쳐 넣을 수도 없고." 호찬은 괜스레 우쭐해진다. "오, 뭔가 인정받은 느낌인데...? 화성 연쇄 그 새끼 이름 뭐야 그래, 이춘재가 이런 느낌였으까? “ 진반장은 담배를 빼물고, 호찬은 한숨처럼 내뱉는 허연 담배 연기를 보더니, “형, 너무 깊게 생각하지 마. 있는 대로 받아들여. 있는 대로. 물은 물이요 돈은 돈이로다아…" 진반장이 말했다. ”서른다섯이나 먹은 놈한테 할 얘긴 아닌 거 같은데, 사람들 너한테 별 관심 없어. 그런 척하는 거야, 다." 호찬은 또 그 소리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진반장은 끝끝내 잔소리 이어간다. "세상이 너를 중심으로 돌지 않는다부터 시작해라. 알었냐?" 씨알도 안 먹히는 호찬. "허이고, 갈릴레오 납셨네." 터미널이 시야에 잡히고 호찬은 입구와 가까운 보도블록 경계석에 차를 바짝 댔다. 호찬은 내리려는 진반장에게 한 마디 더 했다. “사자 새끼 잡으면 진짜 전화 때릴 거니까, 딱 대기해.” 차에서 내린 진반장은 주먹 감자를 먹이고 터미널로 향했다. 호찬은 멀어지는 진반장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차를 출발시켰다.
3.
아파트로 돌아온 호찬은 옥상에 마련된 다 썩어가는 평상에 드러누워 있었다. 시야를 가득 채우는 파란 하늘이 빙빙 돌고 있었다. 마치 호찬을 중심으로 도는 것처럼. 생각에 잠긴 호찬은 터미널로 들어가던 진반장의 뒷모습이 선연했다.
살면서 누군가에게 미안하다는 감정을 느낀 적이 없었다. 아니 그게 무슨 감정인지, 인지불가라는 표현이 더 맞겠다. 그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일은 원하는 대로 굴러갔다. 주변에 소란이 좀 일긴 했지만. 헌데 진반장을 대할 땐 조금 달랐다. 그는 늘 호찬이 가려는 반대 방향을 가리켰다. 진반장은 그가 기르는 수조 속의 거북이처럼 뭘 하건 테가 안 나는 사람이었다. 때문에 진급도 느렸고 실적도 남들에 비해 적었다. 호찬이 가장 특이하게 바라보는 점은 그럼에도 그의 한결같은 태도였다. 그는 쉬는 법이 없었다. 과거, 호찬이 중앙 경찰학교를 수료하고 송파 지구대로 발령이 났을 때 진반장은 경사였다. 당시 호찬이 본 그는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일 말고는 무색 무취 무미였다. 스님이나 수녀들에게서나 느껴지는 무채색 아우라. 호찬과 있을 땐 욕도 하고 장난도 치고 했지만 본래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다시 말하지만, 호찬은 살면서 한 번도 남한테 미안한 적이 없었다. 그게 무슨 감정인지 관심도 없었고. 헌데 자신과 너무도 다른 태도로 최선을 다해 사는 진반장을 볼 때마다 뭔가 찝찝한 기분이 들었는데, 호찬은 이 낯선 감정이 혹시 그게 아닐까 상상하곤 했다. 죄책감… 죄의식…. 이런저런 생각들이 이어지는 가운데, 험한 인상의 대가리가 파란 하늘을 가렸다. "깜짝이야..." 호찬이 일어서자, 이학사와 조석사는 모양이 망가지면 안 되는 예민한 조각 케이크이라도 든 것처럼 휴대폰을 양손에 올리고 내밀었다. 그리고 득의양양한 얼굴로 자신 있게 말했다. "휴대폰 좀 보십쇼. 찜질방에서 사자 검색하다가 찾은 건데 말임다. 진짜 대박이지 말임다." 뭔 소린가 싶어 휴대폰과 둘의 얼굴을 번갈아 올려다보는 호찬. 그러자 이학사와 조석사는 셋. 둘 하더니 힘차게 이구동성 외쳤다. "진심에- 확성기이!!"
이것들이 지금 쇼하나,라는 얼굴로 호찬이 휴대폰을 켜자 유튜브 채널이 하나 떠 있었다. 채널명은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였고 구독자는 열 명도 안 됐다. 일시정지 된 방송 화면에는 운영자 (과거 호찬의 등짝 사진을 찍어 유명세를 타게 만들어준 그)의 얼굴이 가득 차 있었다. 운영자는 그토록 찾아도 안 보이던, 사자의 두 번째 살인 사건 현장에 있었던 유일한 목격자기도 했다. 화면 속 공간은 어두웠고 위치가 가늠되지 않았다. 운영자는 카메라를 바라보며 예의 사람 좋은 미소를 지어 보이고 있었다. 화면 상단에 LIVE라는 신호가 떠 있었지만, 영상은 녹화본이었다.
호찬이 영상을 재생하자 운영자는 마이크 위치를 조정하며 목소리를 가다듬더니 몇 안 되는 접속자들을 향해 전국에 계신 국민 여러분이라며 밝고 희망찬 인사를 전했다. "안녕하십니까, 진심에 확성기 운영자 올시다. 제가 어찌하다 채널을 따로 텄냐면은 며칠 전 하도 끔찍헌 사건을 봐 버리는 바람에 말입니다." 운영자의 멘트가 호찬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이 사건이라는 것이 무엇이냐면은요. 지금 대한민국을 한창 떠들썩하게 만들고 있는 사자의 두 번째 살인 사건이올시다. 각설 허고요. 사자와 관련하여 우리으 박호찬 형사님이 지금 엄청난 곤경에 처해 계시다는 것을 모두가 아실 줄로 믿습니다." 운영자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생수를 한 모금 들이켜고 입맛을 다시며 멘트를 이어갔다. "사실 말입니다. 경찰에서는 지금 사자가 활개 치는 틈을 타서, 우리 형사님을 봐 버린 것입니다. 저한테 빼박 증거가 입수되어 있습니다." 호찬의 동공이 흔들렸다. "이것이 공개되면 제 말 뜻을 아시게 될 것입니다. 문제는 공개 시점이고요. 고 때 오면 요 채널에다가 젤 먼저 알려드릴 것을 약조드리는 바입니다. 끝으로다 우리 박형사님 근황 사진 하나 올리면서 물러갑니다. 모두 평안한 하루 되소서."
운영자가 게시한 사진은, 오늘 아침 아파트 베란다 발코니에서 창밖을 보며 담배를 피우던 호찬의 모습을 줌으로 당겨서 찍은 컷이었다. 이학사와 조석사는, 이 아저씨 뭔가 알고 있다면서 팀으로 영입해야 된다고 호들갑을 떨어댔고, 호찬은 뒤돌아 허겁지겁 옥상을 내려갔다.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이석사와 조석사.
호찬은 흉하게 뜯어진 라면 박스를 들고 다시 나타났다. 그것을 바닥에 깔더니 주머니에서 매직을 꺼내 큼지막한 글씨를 쓰기 시작했다. 이어 글씨가 쓰인 찢어진 박스를 들고 복판으로 걸어가더니,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이학사와 조석사가 멍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찢어진 박스지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었다.
호찬은 라운드 걸이 링 위를 돌 듯 큰 원을 그리며 돌기 시작했고, 먼 건물 옥상에서 이 모습을 찍고 있던 운영자는 카메라를 내렸다. 입가에는 천진하지만 묘한 미소가 번져 나갔다.
한편, 방구석에 처박혀 수사 자료를 들이 파던 광준은 이순경이 오늘 보내준 피해자 의료 기록들을 훑다가 뭔가를 찾아내기에 이른다. 첫 번째 피해자의 의료기록, 두 번째 피해자의 의료기록, 세 번째 피해자의 의료기록에서 공통점이 발견됐다. 시기는 모두 다르지만 셋 다 과거에 죽다 살아난 전적이 있었다. 광준은 빠르게 자료를 훑어 나갔다.
- 8화로 이어짐 -
* 개인 사정으로 부득이하게 격주로 연재하게 되었습니다. 다음 연재일은 26일 (목) 17:00 입니다.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