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0년여 만에 발생한 연쇄 살인 사건으로 대한민국은 발칵 뒤집혔다. 3차 범행 현장의 목격자인 채모 양이 범인의 인상착의에 대해 말하는 모습이 한 시민의 휴대폰 카메라에 포착되면서 살인자의 닉네임은 '사자'로 불리게 됐다. 이후 사자를 응원하는 시민들이 생겨났는데, 이는 지금까지 살해된 세 명의 피해자들이 모두 불법과 악행을 저지르며 살아온 것이 수사과정에서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언론은 범인의 시그니처인 백동전에 대해 각종 추측성 기사를 쏟아냈고, 3차 피해자를 사살하는 데 사용된 권총의 주인이 수많은 난제 사건과 흉악 범죄를 해결하고 각종 예능까지 섭렵해 온 국민 영웅 박호찬 경위라는 사실에도 주목했다. 총기 분실과 관련해 시작된 본청의 내사는 지휘 체계를 무시하고 독단적 수사 방식을 고수해 온 호찬의 수사 태도에 대한 징계를 넘어 실적을 위해 이를 눈 감아온 관할서 간부들에게까지 번졌다. 수사관의 실적이 곧 관할서의 실적이었으므로 호찬의 원맨쇼를 막을 이유가 없었던 것이었다. 호찬의 과거 행적들이 재조명되며 대외적으로 알려진 이미지와 상반된 면면들이 하나 둘 기사화됐다. 불법과 비리를 저지른 적은 없었으나 천상천하 유아독존 식의 오만방자함에 불만을 가져온 동료들이 마치 미투 운동하듯 호찬에 대한 제보를 기자들에게 흘리기 시작했다. 이를 접한 시민들은 호찬을 국민 영웅에서 국민 밉상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한편, 호찬은 본청 조사실에서 감찰반에게 둘러싸여 앵무새처럼 같은 말을 반복하고 있었다. 토끼 모텔에서 살인이 자행될 당시, 유튜브 채널 '진심의 확성기' 운영자가 카메라로 사건 현장을 촬영하고 있었다는 진술. 그러니 운영자를 찾으면 사자에 대한 단서가 나올 것이라는 진술. 하지만 이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호찬이 모텔에서 발견됐을 때 체내에서 동물 마취제 성분이 검출됐고, 이것이 환각 증상을 일으켰을 것이라는 의사의 소견서 때문이었다. 사실 이는 살해된 여자가 호찬을 손쉽게 다루기 위해 투여한 것이었는데 말이다. 더구나 사건 현장 일대가 철거 예정지라 CCTV는 단 한 대도 작동하지 않았기에 호찬의 얘기를 뒷받침할 근거는 전무했다. 감찰반은 호찬에게 태블릿 영상을 보여줬다. 화면 속에는 모자이크 처리된 경찰 관계자들이 탐사 보도 채널에 출연해 호찬을 비꼬는 인터뷰를 하고 있었다.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겨울에 히터 끄고 차에서 잠복할 땐데 혼자 사우나 가서 자고 오더라고요. 참 나..." "혼자만 검거왕하면 뭐 해. 조직이 개판되는데... 총도 그게, 집에 막 갖고 들어가면 안 되는 거거든. 지가 무슨 FBI야, 뭐야." "사실 나는요. 어떤 면에서 사자한테 고맙기도 해요. 만약에 없었어 봐. 진실이 묻힐 뻔 봤다고. 이 부분은 알아서 편집해 주쇼. 기자양반"
호찬은 욕지기가 터져 나오는 것을 꾹 참았다. 나 잘난 맛에 범죄 현장을 들쑤시고 다닌 건 맞지만, 그래도 잡기 힘든 범인들을 수갑 채워 끌고 올 때면 수고했다고 손뼉 치고 온갖 입에 발린 칭찬을 쏟아내던 이들이었다. 근데 이렇게 뒤통수를 친다고? 감히 나한테? 인터뷰 영상 말미에는 엔터황까지 등장했다. 그의 진술은 더욱 가관이었다. 호찬이 퇴직 후, 엔터사와 계약 체결을 고려하는 자리에서 고급 외제차를 갖고 오라고 했다는 전언... 있던 사실에 각종 의혹까지 덧붙여져 호찬은 닳고 닳은 세상 나쁜 놈이 돼 있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경찰이 분실한 총으로 사망한 3차 피해자 유족들은 정부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는데... 보상 청구액은 자그마치 십억!
상황이 이쯤 되니, 호찬은 자신에게 쏟아지는 비난과 질책의 저변에 무엇이 깔려 있는지 보였다. 경찰이 꼬리 자르기에 들어간 것이다. 경찰의 대외적 이미지와 호감도를 상승시키는데 일등 공신이던 호찬이 물의를 일으키자 곧바로 태세를 전환한 것이었다. 어차피 한 달 뒤면 스스로 경찰복을 벗겠다고 선언까지 한 마당에 잘 됐다 싶었겠지... 조사를 모두 마친 감찰반이 사무적인 태도로 말했다. "강등 조치와 함께 직위해제될 겁니다, 그리고 면직되시겠죠." 호찬의 머릿속에는 단 두 글자만 덩그러니 새겨져 있었다. '좆댐...' 참관실에서 지켜보던 서장과 간부들은 침묵했고 진반장만 안타까움을 감추지 못했다.
경찰서를 떠나는 날, 호찬은 개인 물품 박스를 손에 들고 주차장으로 향하고 있었다. 하이에나처럼 대기하던 기자들이 우르르 몰려들어 질문 공세를 퍼부었다. "불명예 퇴직을 하시게 된 데에 시민들께 한 마디 해주시죠." "분실하신 총기로 피살된 피해자 유가족에게 하실 말씀은 없습니까?" "죽은 피해자가 등에 새기다 만 글자가 자뻑이라는 말이 돌던데 맞습니까?" 호찬은 마지막 체면 치례는 해야겠기에 준비한 짤막한 멘트를 읊었다. "사필귀정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모든 것은 결국-" 하는데 어디선가 밀가루와 계란이 투척됐다. 새벽부터 대기하고 있던 3차 피해자의 유족이 던진 것이었다. 주름이 자글자글한 하지만 화장을 진하게 한 노모가 눈을 부라리며 외쳤다. "니가 죽인 거야 우리 아들!!" 곁에 있던 시민도 가세했다. "에라이 사기꾼아! 국민이 우습지? 우스워!" "아이고오! 내 새끼! 불쌍해서 어떡해." 오열하는 3차 피해자의 노모가 바닥에 드러누워 버리는데, 호찬은 얼굴에 흘러내리는 계란을 손으로 닦아내며 차로 향했다. 기자들이 득달같이 따라붙으며 물었다. "향후 계획에 대해서 한 말씀만 해주시죠." "경찰에 하고 싶은 말씀 없습니까?" 호찬은 밀리다 밀리다 소리를 빽 질렀다. "아! 적당히들 좀 하라고오!!" 가까스로 차에 오른 호찬은 파고드는 기자들의 손을 발로 밀어 버리고 세차게 문을 쳐 닫았다. 그리고 관할서가 떠나가라 있는 힘껏 클락션을 누르며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호찬의 물품 박스에서 떨어진 경찰 공무원증이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차 안의 호찬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아이 씨바!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는데에!!"
2.
같은 시각, 경찰 청장은 긴급 회견을 열고 카메라 앞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동원할 수 있는 모든 기관과 경찰의 협조를 받아 특별 수사본부를 구성하고 연쇄 살인범에게는 법의 처벌만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명확히 전달하겠습니다" 본청 출입구에서는 긴급 편성된 특별수사대 팀장과 팀원들이 걸어 나왔다. 눈에 힘을 빡 준 남반장이 중심에 서 있었다. 같은 기세로 선 우경사도 보였다. 특별수사대로 차출된 두 사람은 팀장과 경위로 계급이 바뀐 상황이었다. 승진한 것이다. 기자 하나가 남팀장에게 물었다. 일각에서 사자를 잡기 위해 박호찬 경위를 복직시켜야 한다는 목소리가 들리는데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남팀장은 단호한 표정과 목소리로 일축했다. 법에는 절차와 과정이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고. 박호찬 경위의 가장 큰 문제는 목적이 정당하면 과정이 틀려도 된다는 그릇된 신념에 있다고. 그런 태도는 경찰 조직뿐 아니라 대한민국 법질서에도 해가 될 뿐이라고. 우리 특별수사대가 법 체계 안에서 반드시 사자를 검거하겠다고, 시국 선언이라도 하듯 일장 연설을 쏟아내더니 어벤저스를 이끄는 리더라도 된 것처럼 어깨에 힘을 싣고 형사 기동대 차량으로 걸어갔다. 사방에서 카메라 플래시가 터졌다.
레거시 언론과 뉴미디어는 '사자'가 지금까지 모두 다른 살해 방식을 택한 것에 주목하며 각종 보도를 쏟아냈다. 지금까지 범인이 택한 살해 수법은 동일인이 맞나 싶을 정도로 모두 상이했다. 손으로 때려서 죽이는 격살(擊殺), 목을 졸라서 죽이는 교살(絞殺), 총으로 쏴서 죽이는 사살(射殺). 네티즌들에게는 사자의 다음 타깃이 누가 될지 그리고 어떤 살해 수법이 될지가 초미의 관심사였다. 일각에서는 결과를 예측하고 돈을 거는 일까지 벌어졌다. 하지만 모두의 예상을 깨고 사자는 움직이지 않았다.
3.
그러부터 한 달이 흘렀다. 호찬의 아파트 현관은 온갖 원색적인 비난과 욕설로 래커칠 돼 있었다. 호찬에게 배신감을 느낀 시민들이 찾아와 휘갈긴 글자들이었다. 호찬의 등에 새겨지다 만 문구, ‘나는 ㅈ‘가 악의적으로 완성돼 있었다. "나는 좆댐." "나는 졸라 찐따." "나는 쥐새끼." "나는 존잘러인 줄?" 등등. 백수가 된 호찬은 방구석에 처박혀 생애 가장 치욕적인 날을 보내고 있었다. 불가피하게 외출을 해야 할 때면 모자를 눌러쓰고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채 나다녔다. 사람이 많은 거리를 지날 때면, ‘나는 ㅈ’ 로고가 프린트된 티셔츠를 입은 사람들이 포착되기도 했다. '나는 ㅈ'가 뉴스에서 하도 화제가 되다 보니, 돈이 되겠다 싶은 놈들이 재빨리 선점해 팔아먹고 있었던 것이다. 찾아가 멱살잡이라도 벌이고 싶었지만 그럴 때가 아니었다. 한편에서는 사자를 응원하는 소규모 시민 단체의 모습도 포착됐다. '법 위의 집행자, 사자'라는 문구가 박힌 플랭카드를 들고 애정하는 아이돌 멤버를 응원하듯 닉네임을 연호했다. 호찬은 사자가 어떤 놈인지 단언할 수 없었지만 한 가지는 확신할 수 있었다. 놈도 나와 같은 나르시시스트라는 것을. 사자의 살해 수법이 모두 상이한 것은 놈이 자신의 실력을 과시하고 있는 것이라... 지금 어딘가에 숨어 시민들이 보내는 응원과 환호에 도취돼 있을 것이다. 호찬 자신이 과거에 그러했듯이. 호찬은 사자의 약점도 짐작이 됐다. 수치심... 나르시시스트들은 수치심을 느끼는 상황에 직면하는 것을 가장 공포스러워했다. 이 부분을 건드리면 사자도 빈틈을 보일 것이라 생각했지만 어찌 된 일인지 놈은 한 달째 잠행 중이었다. 상관없었다. 호찬은 일 년이든 십 년이든 기다릴 준비가 돼 있었다. 어떻게든 놈을 잡고 포토 라인에 서는 그날까지 참고 기다리리라. 편의점에서 담배 한 보루와 도시락 그리고 사발면을 계산한 호찬은 다시 자신의 아파트로 향했다.
4.
쓰레기장을 방불케 하는 호찬의 아파트 거실에는 사자를 잡기 위한 일인 수사본부가 설치돼 있었다. 테이블에 돌아 앉은 호찬은 편의점 도시락을 사발면과 함께 먹으며 누군가와 통화 중이었다. 이순경이었다. 호찬은 새파란 후배인 이순경을 닦달해 사자와 관련된, 민간인이 입수하기 힘든 자료와 데이터들을 몰래 받아보고 있었다. 호찬은 사자와 티끌만큼이라도 관련된 자료라면 모조리 수집하고 분석했다. 세포가 증식되듯 수사 관련 자료는 끝없이 늘어갔다. 책상 위를 넘어 바닥 그리고 벽까지 프린트된 수사 자료와 사진들로 넘쳐났다. 호찬의 집요함은 급기야 죽은 피해자 지인들의 사돈에 팔촌 정보까지 요구하기에 이르렀는데, 이순경은 고개를 내저었지만 호찬은 막무가내였다. 사자를 잡으면 공을 나누겠다고 확언하면서 끈질기게 더 많은 자료를 요구했다. 하지만 최근 들어 든 생각은 수사 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었다. 혼자서 이 방대한 자료를 검토하고 탐문 수사까지 하려니 물리적으로 시간이 부족했다. 용역이라도 써 볼까 싶었지만 돈은 없고. 호찬은 이순경에게 대뜸, 와서 수사 좀 같이 하자고 말했다. 이순경은 기겁하며, 살려주십시오 선배님 잠복하느라 며칠 째 양말이 발바닥에 붙었습니다, 라며 우는 소리를 해댔다. 함께 일했던 팀원들의 근황도 여의치 않았다. 감찰 내사가 강력팀 전체로 확대되면서 전원이 대기 발령 상태란다. 진반장은 아예 연락도 닿지 않는다 했고. 최근 들어 욕이 입에 붙은 호찬에게 찰진 상소리가 터져 나왔다. 일단 알겠다며 전화를 끊으려는데, 이순경이 불씨 하나를 던졌다. 호찬과 관련해 해괴한 영상이 인터넷에 떠돌고 있다는데, 이건 또 무슨 개소린가...?
이순경으로부터 해당 영상을 전달받은 호찬은 세차게 머리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영상은 과거, 뉴스룸에 나와 돌연 은퇴 선언을 하던 호찬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하지만 합성되어 있었다. 호찬이 카메라를 보며 은퇴를 공언하는 모습까지는 같았지만 이후 놀라운 상황이 펼쳐졌다. 스튜디오 안에 사자 한 마리가 난입해 날뛰기 시작한 것이다. 진행자를 비롯한 스텝진들은 기겁하며 도망쳤고 내부는 아수라장이 됐다. 사자는 호찬을 등 뒤에서 덮쳤다. 그리고 두터운 앞발로 호찬의 머리를 짓누르더니 사납게 포효했다. 바닥에 엎어져 버둥대는 호찬은 살려 달라 애원했고 바짓단 사이로 물이 번져 나왔다. 세상 비굴한 호찬의 얼굴이 클로즈업되면서 일시정지. 그 위로 대문짝만 한 문구가 들어와 박혔다. 레전드 복서 마이크 타이슨이 남긴 유명한 어록. '누구에게나 그럴싸한 계획이 있다. 쳐 맞기 전까지는!' 악의적으로 합성된 딥페이크 영상이었다. 이 영상이 지금 텔레그램을 통해 확산되고 있다는 말에 호찬은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참을 수 없는 수치심과 모욕감이 밀려왔다.
4.
한 시간 뒤, 호찬은 가산 디지털 단지 빌딩 안에 자리한 작고 영세한 사무실에 들어와 있었다. 여러 대의 모니터와 데스크탑이 세팅된 곳이었는데, 화면에는 각종 성매매 전단물과 성매매 사이트에 업로드될 여성들의 프로필이 디자인되고 있었다. 직원으로 보이는 고도 비만의 안경 낀 녀석이 방금 전까지 먹고 있던 자장면을 입가에 묻힌 채 얼빵한 얼굴로 호찬을 바라봤다. 호찬은 심히 불량한 기운을 뿜어대며 고도 비만을 가만히 내려다보고 있었다.
호찬은 녀석과 구면인지 안경 낀 고도비만을 ‘학사’라고 불렀다. 성을 붙여 이학사. 호찬은 이학사에게 조석사 어디 갔느냐고 물었다. 이학사가 우물쭈물하는데 사무실 문이 열리고, 장신에 저체중 그리고 푹 꺼진 눈을 한 젊은 녀석이 어슬렁 대며 들어왔다. 호찬을 보자마자 뒷걸음질 치는데, 호찬이 손을 뻗어 불러 세웠다. "야- 드루와 드루와. 니들 잡으러 온 거 아니니까 쫄지 말고 드루와 앉어" 조석사가 문 밖에서 긴장한 얼굴로 쳐다보자 호찬이 채근했다. "물어볼 거만 물어보고 조용히 간다니까?"
이학사와 조석사는 과거 연예인 딥페이크 영상을 만들어 텔레그램에 팔아먹다가 호찬에게 검거된 전적이 있었다. 나이는 둘 다 이십 대 중반. 당시 작업실을 급습한 호찬에게 저항하다가 꽤나 험하게 두들겨 맞은 기억이 떠올랐는지 둘 다 바짝 얼어 있었다. 호찬은 이 두 놈에게 자신을 모델로 작업된 딥페이크 영상을 보여주면서, 이거 만든 놈 어떻게 하면 잡을 수 있는지 물었다. 영상을 보던 이학사와 조석사는 눈치 없이 감상평을 늘어놨다. "이야, 이건 뭐 실젠지 합성인지 구분이 안 가네." "내공이 장난 아니네." 기분이 상한 호찬이 다시 물었다. "묻잖아." 조석사가 분위기 감지하고 입을 열었다. 텔레그램에 지인능욕방이라는 이름으로 운영되는 채팅방이 수십 개가 되는데, 거기서 활동하는 놈들 중 하나일 수도 있을 것 같다고. 호찬은 곧바로 사무실 컴퓨터에 지인능욕방 채팅창 전부를 오픈하라고 지시했다.
잠시 후, 모든 모니터 화면에 딥페이크 관련 텔레그램 채팅창 수십 개가 열렸다. 호찬은 팔짱을 끼고 의자에 앉아 이학사에게 지시했다. 각 방마다 호찬의 딥페이크 굴욕 영상을 올리고, 같은 퀄리티로 또 다른 버전을 만들어 줄 사람을 찾는다는 글을 올리라고. 이학사는 시키는 대로 모든 채팅창에 작업 의뢰 글을 올리지만,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호찬은 조석사에게 지시했다. 호찬의 굴욕 영상을 마치 조석사 자신이 만든 것처럼 메시지를 작성해 대화에 참여하라고. 그리고 이학사와 작업료에 대해 흥정하라고. 조석사가 대화방에 참여했고 이학사와 짜고 치는 고스톱을 시전 하기 시작했다. 복사와 붙이기로 수십 개의 텔레그램 창에 같은 대화들이 오갔다. 십만 원을 부르다가 나중에는 백만 원까지 가격이 치솟자 기대했던 대로 누군가 슬며시 대화에 끼어들었다. 놈은 자신이 호찬의 딥페이크 굴욕 영상을 만든 리얼 작업자라고 밝혔다. 호찬이 안광을 번뜩였다. "새끼, 물었네..."
놈은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덧붙였다. "가짜 놈한테 속지 말고 내게 일을 맡겨라. 싸게 해 주겠다" 놈이 진짠지 확인하고 싶었던 호찬은 근거를 대라 메시지를 보냈고, 놈은 영상을 만드는 데 사용된 합성 소스들과 과정을 보여주기 시작했다. 전문가의 스멜이 감지되자, 확신이 든 호찬은 메시지를 전했다. "오케이. 믿고 맡기겠다. 박호찬 형사가 사자를 사냥하는 영상을 만들어 달라." 그러자 놈은 선입금을 원했다. 작업비는 삼백만 원. 호찬은 계좌 이체를 했다간 흔적이 남으니 원하는 곳에 돈을 놔두겠노라 전했다. 작업자는 몇 초간 답이 없더니, 압구정 한강 공원 화장실 세 번째 변기칸에 돈을 두라고 답했다. 지금 바로. 호찬의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 "개새끼, 넌 오늘 디졌다... 어서 감히..." 지켜보고 있던 이학사와 조석사가 손뼉 치며 분위기를 띄웠다. "형님, 역시 대단하십니다. 축하드립니다." 호찬은 심드렁한 표정을 지으며 차키를 던졌다. "아직 안 끝났어 마. 가서 차 꺼내 와."
호찬은 이학사와 조석사를 데리고 약속된 장소 인근에서 잠복했다. 그리고 작업자가 나타났을 때 목덜미를 움켜쥐고 끌고 나왔다. 잡고 보니, 작업자라는 놈의 이름은 양광준. 지방대 컴퓨터 공학과를 나왔고 지금은 취업 준비 중인 백수였다. 깡마른 체구에 안경 그리고 여드름 자국까지. 딱 봐도 키보드 워리어다. "아 이거 놔요!" 광준은 잡힌 손을 뿌리치며 저항했지만 호찬은 뒤통수를 사정없이 후려갈겼다. "야이 개새끼야! 사람 염장 지르니까 좋냐? 기분이 막 풀려?" 호찬은 스타카토 화법으로 말을 끊어가며 포인트에 맞춰 후려쳤다. 잔뜩 쫀 이학사와 조석사는 눈만 끔벅거리며 쳐다볼 뿐이고. 호찬은 광준을 때리다 갑자기 궁금해졌다. 항간에 떠도는 불법 딥페이크 영상은 죄다 포르노에 가까웠다. 하지만 호찬의 것은 그렇지 않았다. 이점에 대해 물으니 광준이 우문현답을 했다. "이 아저씨, 리얼 자극이 뭔지 모르네. 요즘 젤 핫한 게 사자고, 그다음이 아저씨 좆된 거잖아요. 두 사람 붙여 놓으면 그게 꿀잼이지, 뭐가 더 필요해?" 말 끝나기도 전에 호찬은 다시 광준의 머리통을 사정없이 내리쳤다. 한대! 두대! 세대! "아- 그만 때려요 좀!" 광준이 울분을 터트리고, 보다 못한 이학사와 조석사가 뜯어말렸다. 호찬이 화를 삭이며 광준에게 다시 물었다. "너, 대학 나왔으면 글자는 좀 읽겠다? 그치?" 광준이 목까지 벌게져 말했다. "신고할 거야! 시발!" 호찬은 더 큰 소리로 화를 냈다. "해! 해! 해! 이 시발로마! 어차피 나 막장이야. 글고 너, 딥페이크 유포시키고 돈 받아 처먹으면 몇 년 사는지 알어? 오 년이야. 오 년! 이 새끼야!" "그래서 나보고 어쩌라고오!" 독기에 차 뻗대는 광준. 호찬이 집요하게 물었다 "잘 들어. 너, 감옥 갈래. 아님 일주일만 우리 집에서 일할래? 지금 딱 말해." 광준은 호찬의 뜬금포 질문에 기가 차 입을 꾹 다물고 꿈쩍도 하지 않았다.
호찬은 안 되겠다 싶었는지 곧장 이순경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지금 딥페이크 만들어 팔아 처먹는 놈 잡았으니까 연행하라고 말했다. 수화기 너머의 이순경은 얼떨떨한 목소리로, "지금요?"라며 반문했고. 겁이 난 광준은 슬그머니 꼬리를 내렸다. “무슨 일 시킬 건데요.” 호찬은 됐구나 싶었는지 이순경에게 다시 전화하겠다 말한 뒤 통화를 종료했다. 그리고 광준에게 말했다. "가보면 알어. 밥이랑 잠자리는 제공한다." 광준이 되물었다. "집이 어딨는데요?" 호찬이 답했다. "차 타고 다리만 건너면 돼." 광준이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자 이학사와 조석사가 공손히 손 모으고 끼어들었다. ”형님, 그럼 저흰 이만 가 볼게요. 건강 잘 챙기시고요. 그럼 또 뵙겠습니다.“ 슬그머니 빠지려는데 호찬이 불러 세웠다. "어디가?" 만면에 선량한 미소를 지으며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이학사와 조석사가 답했다. ”저기, 사무실을 오래 비워갖고..." 호찬이 눈 부라리며 경고했다. "니들, 성매매 광고물 배포하다 걸리면 최소 징역 1년인 거 알지? 광고물을 제작하거나 업소에 게재한 경우에는 2년이고. 벌금만 최소 이천이야.“ 순간, 똥 씹은 얼굴이 된 이학사와 조석사. 호찬의 경고는 계속됐다. ”니들 보기에 내가 경찰에서 팽 당한 거 같지만, 끈 졸라 남아있다. 전화하면 후배들 바로 텨 온다고. 통화하는 거 봤지?" 수 초의 침묵이 흐르다가 호찬이 다시 침묵을 깼다. "이년 감옥 갈래 일주일 나랑 있으래. 생각 잘해라." 조석사가 체념한 듯 끄덕이며 답했다. "오늘부터 일주일이지 말입니다?" 호찬이 호기롭게 답했다. "더 빨리 끝날 수도 있고." 이석사는 똥 밟았구나 싶어 어금니 꽉 깨물고. 표정 썩은 건 광준도 마찬가지다. 이것들 보아하니, 나이는 나랑 비슷한데 이런 생양아치들과 일주일을 보내야 한다니 한숨 밖에 안 나왔다. 하지만 호찬이 보기엔 그 밥에 그 나물이고. 호찬은 이십 대 루저 세 놈을 데리고 차로 이끌었다. "앞으로 일주일간 나를 부를 때는 캡틴이라고 해. 박호찬이니까, 캡틴 팍 (PARK)." 세 놈들이 죽상이 된 얼굴로 대답하지 않자 호찬이 더 크게 물었다. "알었냐고!!" 마지못해 답하는 셋. "네." 호찬의 구형 소나타에 모두가 올랐다. 호찬은 속도를 높이며 말했다. “니들 이제부터 형이랑 사자 새끼 잡는 거야. 역사적인 순간에 동참하는 거라고. 가슴 펴고. 고개 쳐들고. 응?" 호찬의 밑도 끝도 없는 말들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된 사내놈들. 저무는 태양이 산 너머에서 끈덕지게 불타오르고 있었다.
6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