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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레이지 라마 Nov 21. 2024

5. 사자

1.

호찬의 눈이 게슴츠레 떠졌다. 구급차 안이었다. 발아래로 보이는 후면 도어는 완전히 개방된 상태로, 통이 트는 하늘이 보였다. 끙- 호찬은 베드에서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깨질 것 같은 머리를 양손으로 감싸며 흔들었다. 뒤돌아선 구급대원이 차트를 보면서 사무적으로 말했다. "누워 계세요. 누워 계세요." 구급대원은 이 말만 무심히 던지더니 차 밖에서 자신을 부르는 사수에게로 다가갔다. 혼자가 된 호찬은 팔에 꽂힌 수액 라인을 걷어 버리고 밖으로 나갔다.


밖은 토끼 모텔 앞이었다. 경찰차들이 몰려와 있었고 형사들과 감식반이 분주히 오갔다. 차 밖으로 나온 호찬은 새벽 찬 공기에 어깨를 움츠리며 두리번댔다. 이때 등 뒤에서 웅성대는 소리가 들렸다. "저거, 박호찬 형사 아니야?" "어? 맞네. 근데 왜 다 벗었어." "가만, 등에 저거 뭐라고 써 있는 거야?" "나는... 지읒?" 호찬이 소리가 나는 쪽으로 돌아보면, 기자들이 자신을 보며 수군대고 있다는 사실이 포착됐다. 호찬의 그 유명한 등짝에는 피와 잉크가 눌어붙어 흉한 레터링 타투가 미완성인 채로 완성돼 있었다.



그리고 자신이 팬티만 입은 채 그것도 맨발로 서 있다는 사실도 인지 됐다. 아차 싶었던 호찬은 황급히 구급차로 다시 들어가 흰 천을 집어 망토처럼 몸에 휘둘렀다. 그리고 토끼 모텔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2.

모텔방 657호는 참극의 현장이 고스란히 보존돼 있었다. 난장판이 된 각종 타투 작업 도구들과 목이 졸려 죽은 여자. 벌어진 입 사이로 혀가 나와 있고 그 위에 납작하고 동그란 금속 하나가 반짝였다. 범인이 남기고 간 것이었다. 감식반의 집게가 이것을 집어 비닐팩에 담았다. 채증 된 이 금속은 앞 뒷면에 아무것도 새겨지지 않은 백동전이었다. 나란히 선 남부서 강력팀 형사 두 명이 사체를 내려다보며 얼굴을 찡그리고 있었다. 조폭으로 봐도 무방할 정도의 험한 인상들이었는데, 사체에서 채증 되는 동전을 보며 찌푸리는 표정들이 우스꽝스러웠다. 마흔 중반을 넘긴 남자 형사는 펌헤어에 작지만 다부진 체격을 가진 남반장이고, 그 옆에 선 큰 키에 검게 그을린 피부 그리고 해병대처럼 주변머리를 짧게 쳐 올린 남자는 우경사였다. 우경사는 남반장에게 피해자 신원에 대해 말했다. "본명은 '신주하'고요. 나이는 스물셋. 어릴 때 가출해서 가출팸 결성하고 조건 만남에 명품깡 하면서 살다가, 얼마 전까지 클럽에서 마약을 팔았답니다. 이제 겨우 스물셋인데 특수 폭행 특수 강도에 살인 미수까지 이력서가 아주 화려합니다." 남반장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사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머릿속에서 뭔가 대단한 추리라도 하는 것처럼 보였다. "이런 앨 누가 죽였을까?" 침묵이 흐르는 가운데, 흰 천을 몸에 두른 호찬이 불쑥 끼어들어와 사체 앞에 쪼그려 앉으며 말했다. "이거 천벌 받았네. 쯧쯧." 하더니 두 형사들을 향해 손을 뒤로 뻗으며 넉살 좋게 말했다. "거 담배 있음 하나만 빌립시다." 남반장의 표정에 불쾌함이 번졌다. 우경사가 나섰다. "사건 현장이야 인마. 수사 원칙 몰라?" 호찬과 우경사는 경찰 입직 동기였다. 하지만 검거 실력이 놀라울 정도로 뛰어났던 호찬은 진즉 경위가 된 상태였고 우경사는 아직까지 경사였다. 호찬이 툴툴댔다. "팍팍하네, 팍팍해. 참나." 시선을 돌리자 남반장의 아니꼬운 시선이 포착 됐다. 남반장이 한마디 했다. "인사 안 하냐? 남대문서 있을 때 내가 너 사수였어. 인마." 호찬은 입가에 억지 미소를 만들며 건성으로 말했다. "안냐세요? 형수님 잘 계시죠? 애들 잘 크고?" 우경사가 다시 나섰다. "너 왜 자꾸 설치는데? 하다 하다 이제 우리 관할까지 넘어와서 훼방이냐?" 호찬이 뻔뻔한 얼굴로 말했다. "나 어제 지옥 갔다 왔다. 긁지 마라." 우경사의 비난은 계속됐다. "퇴직한다고 했으면 조용히 있다가 니 갈길 가 인마. 오지랖 그만 떨고." 호찬은 같잖다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내가 너 동기라서 팁 하나 주는데, 이 사건 복잡해. 사연 있다. 백퍼." 우경사의 귀가 솔깃해졌다. 이는 남반장도 마찬가지였다. 얼핏 보기엔 스스로에게 취해 사는 한심한 놈처럼 보여도 호찬의 촉은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비범한 면이 있었다. 이는 대한민국 경찰이라면 모두 고개를 끄덕일 정도로 정평이 나 있었다. 우경사는 호찬이 사건에 대해 생각하는 바가 내심 궁금했다. 하지만 속내를 내비치고 싶지 않아 입을 다물었다. 남반장이 참지 못하고 나섰다. "그게 무슨 소리야? 사연이 있다니." 호찬은 어젯밤 기억을 떠올리며 말했다. "칼로 해도 됐었는데, 굳이 목을 졸라서 죽였다고요, 범인이... 이상하잖아." 남반장이 우경사에게 물었다. "현장에서 칼 나온 거 있어?" "아니요" 우경사가 고개를 내저었다. 호찬이 말했다. "범인이 챙겨 갔나 보네. 암튼 어제 똑똑히 봤다고 내가. 쥐고 있던 칼을 내려놓고 맨손으로 목을 조르는 걸." 호찬은 우경사의 어깨에 손을 턱 올리면서 "욕봐라." 말하고 지나치려는데, 우경사가 돌려세웠다. "너 용의자야. 조사받고 가." 호찬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돌아봤다. "누가? 내가? 똥촉은 여전하네. 너 이러고 사니까 아직도 경사야 인마." 우경사가 발끈해 다가섰다. "수갑 채워서 데려가기 전에 조사받고 가라." 기분이 상한 호찬이 바짝 다가서며 말했다. "야." 우경사는 지지 않고 더 가까이 다가섰다. "뭐." 갑작스런 대치국면에 남반장을 비롯한 모두의 시선이 집중됐다. 한 대 칠 것 같은 기세로 우경사 눈을 뚫어져라 노려보던 호찬이 헛소리를 지껄였다. "나 바지 입고 올 때까지 여기서 딱 기달려." 호찬은 어기적대며 채증 된 증거물들이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남반장과 우경사는 어이상실한 얼굴로 바라봤다.


호찬은 분류되고 있는 유류품들을 살폈다. 찾는 게 보이지 않는지 고개를 갸웃하더니 침대로 다가가 밑을 내려다봤다. 뿌연 먼지만 내려앉아 있을 뿐 아무것도 없었다. 도로 방향을 틀어 정렬된 유류품을 거칠게 헤집기 시작했다. '아 씨, 없을 리가 없는데...' 보다 못한 감식반이 저지했다.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호찬은 멈추지 않았다. "없을 리가 없는데..." 남반장의 신호를 받은 우경사가 다가섰다 "뭐 해, 인마!" 호찬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우경사는 화가 나 어깨를 잡고 돌려세웠다. "지금 뭐 하는 거냐고 새꺄!" 그제야 호찬은 우경사를 쳐다보며 물었다. "내 총 못 봤냐?" 주변 형사들과 감식반들의 시선이 일제히 호찬에게로 주목됐다.  





3.

분주하게 돌아가는 남부서 강력팀 사무실. 호찬은 우경사와 모니터를 사이에 두고 앉아 있었다. 삐딱하게 앉은 호찬은 어디서 빌려 입었는지 축구 유니폼 반팔티에 츄리닝 바지를 입고 맨발에 삼선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초조한 지 발을 떨어대는데 잡혀온 동네 건달처럼 보였다. 책상 맞은편에서 조서를 쓰던 우경사가 호찬에게 말했다. "범인은 우리가 잡을 거야. 잡을 건데. 너 총 어뜩하냐?" 입가에 웃음이 번진 우경사를 호찬이 물끄러미 쳐다보며 말했다. "재밌냐?" 우경사는 웃음기를 지우며 천천히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웃었으면 쏘리." 우경사는 다시 점잖을 떨며 참고인 진술서를 마무리했다. 평소 눈에 가시였던 호찬의 실책이 우경사를 기쁘게 했다. 이때 장경사가 들어와 말했다. "진심에 확성기 운영자 소재 파악해 봤는데요. 잠수를 탄 거 같습니다." 남반장이 물었다. "잠수를 타?" 장경사가 알아낸 정보들을 읊었다. "방금 남양주 작업실 갔다 오는 길인데요. 문도 잠겨 있고, 옆집 사는 사람 얘기 들어보니까 못 본 지 보름이 넘었답니다." 호찬이 물었다. "유튜브 채널 들어가 봤어? 어제 보니까 계속 뭘 찍던데 뭐라도 올렸을 거야." 장경사는 퉁명스럽게 답했다. "그쪽 참고인 아니신가?" 우경사가 거들었다. "쟤 용의자야." 호찬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우경사에게 말했다. "와 열심히네. 인제 경위 달아도 되겠어." 우경사는 같잖다는 표정을 내비치고 남반장은 장경사에게 물었다. "채널 확인해 봤어?" 그러자 비공개로 전환돼 있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남반장이 호찬에게 물었다. "너, 운영잔지 뭔지 어제 본 거 확실해? 동물 마취제 맞아갖고 헤롱헤롱 했다며." 호찬이 따져 물었다. "내가 언제 헤롱헤롱 했다 그랬습니까? 살짝 혼미했다 그랬지." 그러더니 우경사에게 시선을 돌리며 쏘아붙였다. "너 혹시 진술서에다 헤롱헤롱이라고 썼냐?" 우경사는 대꾸하지 않고,  모니터 화면에서 뭔가 재미난 걸 발견했는지 웃으며 말했다. "너, 기사 떴다. 뭐 맨날 떠? 셀럽이냐?" 호찬이 물끄러미 쳐다보자, 우경사는 굳이 모니터 방향을 틀어서 호찬에게 화면을 공개했다. 금일 발생한 모텔 살인 사건에 대한 기사가 올라와 있었고 상탈한 모습으로 건물 앞에서 찍힌 호찬의 사진이 첨부돼 있었다. 등짝에 새겨지다 만, 피와 잉크가 눌어붙은 문신이 클로즈업 돼 있었다.


사진을 본 순간 호찬의 가슴속에서 열불이 솟구쳤다. 무엇보다 참을 수 없었던 건 '추락한 백기사'라는 헤드라인이었다. 우경사는 이때다 싶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호찬의 등 뒤로 다가서더니 상의를 들추고 말했다. "보자, 뭐라고 판 거야? 나는 좆?" 우경사는 주변 형사들에게 와서 이거 한번 보라며 떠들었다. "야- 나는 좆이래." 웃참 실패한 형사들의 히죽이죽 대는 소리가 들려오고, 참다못한 호찬은 벌떡 일어나 우경사의 가슴팍을 밀쳤다. "죽을래? 이 개새끼야!" 우경사가 호찬의 멱살을 맞잡으며 맞섰다. "사건 개판 만들고 어디 와서 행패야!?" 우르르- 형사들이 몰려와 뜯어말리는데 문가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박호찬 너 미쳤어!!" 일동 돌아보면, 진반장이 화난 얼굴로 서 있었다. 호찬의 표정에 낭패감이 스쳤다.


마포서로 복귀하는 차 안이었다. 진반장은 굳은 얼굴로 운전만 했고 호찬은 조수석에 죽상을 하고 앉아 휴대폰을 꼽작댔다. 화면에는 비공개로 전환된 '진심의 확성기' 유튜브 채널이 떠 있었다. 기억들이 파편처럼 스쳤다. 여자의 목을 조르는 침입자. 바닥에 축 늘어지는 여자의 손. 침대 밑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는 권총. 호찬을 업고 복도를 내달리는 운영자. 서장과 통화하는 진반장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찌나 질책하는 목소리가 큰 지 스피커 폰이 아님에도 내용이 또렷이 다 들렸다. 진반장은 난처한 얼굴로 쩔쩔매며 말했다. "네 지금 서로 데리고 들어가는 길입니다. 전례를 봤을 때, 보름 안에 총기 회수가 안 되면 좀 복잡해질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최대한 찾을 수 있도록... 죄송합니다." 전화가 끊겼다. 호찬이 슬그머니 말을 걸었다. "형, 그니까 이게 어떻게 된 거냐면은..." 진반장은 대답 대신 카오디오 볼륨을 최대로 높였다. 제목도 알 수 없는 복잡하고 격렬한 클래식 음악이 차 안을 쩌렁쩌렁 울려댔다. 호찬은 속이 타는 얼굴로 창 밖을 바라보며 담배를 꺼내 물었다.  


4.

관할서로 돌아온 호찬은 실외에 설치된 이동식 변소에 걸터앉아 담배를 뻑뻑 펴대고 있었다. 현재 시각, 토끼 모텔에서는 지원 인력이 투입돼 호찬의 권총을 찾는데 혈안이 돼 있었다. 살인 사건도 살인 사건이지만 총기 분실은 큰 사고였다. 실탄까지 장전이 돼 있는 상태라 더더욱. 호찬이 변기 물 내리고 밖으로 나가는데, 이순경이 서 있었다. 이순경은 호찬을 보자마자 경탄했다. "박경위님, 진짜 대단하십니다!" 이 새끼가 지금 돌았나 싶어 호찬이 되물었다. "뭐?" 이순경은 숨 고르며 한술 더 떴다. "박형사님, 촉이 진짜 장난 아니신 거 같습니다. 어떻게 한 번에! 딱!" 발끈한 호찬이 물었다. "나 지금 멕이는 거냐?" 놀란 이순경이 멈칫하자 호찬이 거듭 따져 물었다. "나 지금 약 올리냐고." 이순경이 더듬대며 말했다. "아, 아니요. 그게 아니라요. 방금 국과수에서 전당포 사건 사체 부검 결과가 나왔는데요." 이순경의 손에는 국과수 로고가 박힌 우편 봉투가 들려 있었다. "경위님께서 예측하신 대로 범인이 피해자 입 속에 뭘 집어넣어 놨답니다." 호찬은 그게 뭐냐 물었고, 이순경의 입에서 나온 단어가 귓가를 파고들었다. "동전이 나왔답니다. 앞 뒷면에 아무것도 새겨지지 않은 백동전이요."



강력계 사무실로 들어온 호찬은 경찰청 수사 시스템 망에 접속했다. 동종 수법 조회 메뉴를 찾아 선택했다. 키워드 검색창에 '동전'이라고 입력하자 1건이 조회됐다. 전당포 살인사건과 관련한 자료들이 나왔다. 피해자 기도와 식도 사이에서 검출된 동전 사진이 첨부돼 있었다. 토끼 모텔에서 살해된 여자의 입속에서 채증 된 동전과 같았다. 이순경에게 물었다. "너 내가 시킨 거 했어?" 영문을 알 리 없는 이순경이 "네?"라고 묻자 호찬이 신경질적으로 물었다. "블랙박스." 그제야 알아들은 이순경이 "네"라고 답했다. 영 자신과 속도를 맞추지 못하는 이순경이 답답한 호찬. 그래서 뭐 나온 거 있냐고 다급하게 묻자, 이순경은 화이트보드에 붙여 논 캡처 사진들을 떼오며 말했다. "용의자로 추정되는 남자가 건물로 들어가는 게 짧게 찍혔더라고요." 호찬이 사진을 빼앗듯 건네받아 보면, 야식 배달원으로 위장해 전당포 계단 초입에 들어서는 모습이 찍혀 있었다. 헬맷을 쓰고 있어서 얼굴을 특정할 수 없었지만 전투화가 눈에 들어왔다. 호찬은 어젯밤 자신의 권총을 발로 차 버리는 침입자의 전투화를 떠올렸다. 순간 호찬의 입에서 욕지기가 터져 나왔다. "시발, 이거 연쇄야..." 곁에서 듣고 있던 이순경이 "네?"라고 묻자, 호찬이 진반장을 찾았다. "준엽이 형 어디 갔어." 이순경이 알아먹지 못하고 되묻자 호찬이 소리쳤다. "진반장님 어디 갔냐고!!" 등 뒤에서 진반장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야." 호찬이 돌아보면, 진반장이 초췌한 몰골로 서 있었다. 호찬은 증거 사진과 국과수 사체 부검 감정서를 들고 다가섰다. "형, 전당포 건하고 오늘 사건 말이야." 하는데 진반장이 뜻밖의 말을 뱉었다. "니 총 찾았다." 호찬에게는 이 말이 들어오지 않고. "어? 아... 아니. 지금 그거보다, 내 말 좀 들어 봐." 그러자 "니 총 찾았다고 이 미친 새끼야!!" 진반장이 호통을 치자, 지금 이 사람이 왜 이러나 싶은 얼굴로 올려다보는 호찬. 어디선가 열차 굉음이 들려오고 있었다.


5.

열차 선로가 지나는 올림픽 대로 아래 세단 한 대가 세워져 있었다. 주변에는 여러 대의 경찰차와 구급차가 보였다. 출입 제한선 밖에 몰려든 기자들이 취재 경쟁 중이었다.  



방송국 카메라 앞에 선 기자가 속보를 전하고 있었다. "저는 지금 총기 살인 사건이 발생한 올림픽 대로에 나와 있습니다. 머리에 총상을 입고 사망한 채 발견된 박 모 씨는 성범죄 전과 9범으로 보호 감찰을 받던 중 전자 발찌를 끊고 제한 구역을 넘어 또다시 범행을 시도하려다 괴한에게 변을 당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호찬은 차량 앞에 서서 넋이 나간 얼굴로 사체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형사 하나가 증거물 보존팩에 담긴 피 묻은 권총을 들고 와 물었다. 이 총이 분실한 권총이 맞는지. 호찬의 시선으로 권총 몸통에 각인된 총번이 보였다. '720 280' 호찬의 것이었다.




속보를 전하는 기자의 목소리가 계속 귓전을 때렸다. "피해자 박 씨는 지적 장애 2급인 채모 양을 납치해 차에 태우고 성폭행을 시도하려 했던 것으로 드러났고, 이 과정에서 누군가 나타나 머리에 총을 쏜 뒤 도주한 것으로 보고 수사가 진행되고 있습니다." 호찬이 본 피해자의 발목에는 전자 발찌가 채워져 있었고 후두부를 관통당한 채로 죽어 있었다. 뇌수가 터지면서 차 안은 온통 피로 낭자한 상태였는데, 무엇보다 충격적인 것은 팔걸이에 걸쳐진, 손바닥 위의 백동전이었다. 범인이 남기고 간 표식이었다. 하지만 아직 누구도 이 동전이 전당포 사건 그리고 토끼 모텔 사건과 연결돼 있음을 인지하지 못했다. 오로지 호찬만이 이것을 감지하고 있었다. 감식반은 의례적으로 증거물 채증 비닐에 동전을 넣고 있었다. 차와 멀리 떨어진 곳에서 누군가와 다급하게 통화하던 진반장이 전화를 끊고 호찬에게 다가왔다. "본청에서 나올 거야. 들어가서 답변 준비해." 호찬은 넋 나간 얼굴로 혼잣말하듯 읊조렸다. "형... 이거 연쇄야..." 진반장이 물었다. "뭐?" 호찬은 확신에 차 말했다. "사망한 전당포 사장이랑 어제 모텔에서 죽은 그 여자 입에서도 똑같은 게 나왔어. 그리고 지금도-" 진반장의 호통이 호찬의 말 허리를 잘랐다. "정신줄 잡으라고 새끼야! 지금 니 총으로 사람이 죽었다고!" 호찬은 더 큰 소리로 맞섰다. "놈한테 지금 세 명이 죽었다고오!! 세 명이!!" 호찬은 진반장을 지나쳐 어딘가로 뛰었다. "어디가! 어디가 인마!" 진반장이 아무리 불러도 막무가내였다. 호찬이 달려간 곳에는 총기 사망자 박 씨에게 성폭행당할 뻔했던 채모 양이 있었다. 호찬은 형사를 밀치고 채모 양에게 다가가 물었다. "총 쏘고 도망친 사람, 어떻게 생겼니? 혹시 전투화 신고 있지 않았어? 전투화 알지? 군인 아저씨들 신발." 몸은 다 컸지만 정신은 어린아이에 머물러 있는 채모 양이 겁에 질려 눈만 끔벅끔벅 댔다. 참다못한 여경이 다가와 호찬을 밀치고 저지했다. "피해자한테 지금 뭐 하시는 겁니까?" 호찬은 밀리지 않고 버텼다. "자, 잠깐만." 하면서 끈덕지게 다시 물었다. "얼굴 봤니? 남자였어? 아님 여자?" 여경이 호찬을 있는 힘껏 밀쳤다. "뭐 하는 거냐고요!!" 진반장이 다가와 합세했다. "야 이 미친 새꺄, 정신 좀 차리라고!" 호찬이 화를 폭발시켰다. "묻잖아 좀!!" 형사들까지 다가와 뜯어말리는데 채모 양의 목소리가 모든 것을 멈췄다. "사자..." 호찬이 채모 양을 돌아봤다. 인상을 찌푸리며 다시 물었다. "뭐라고? 지금 뭐라고 했어?" 채모 양은 자신의 손을 들어 어딘가를 가리켰다. 그리고 말했다. "사자..." 모두의 시선이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으로 향했다. 먼 대로변 대형 빌보드에 <놀이왕, 사자>라는 제목의 어린이 창작 뮤지컬 광고가 보였다. 망연한 표정의 호찬 얼굴 위로 엄청난 굉음이 들려왔다. 머리 위를 지나는 선로 위로 열차가 지나가고 있었다. 잿빛이던 하늘에서 굵은 빗줄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5화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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