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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레이지 라마 Nov 14. 2024

3. 백기사 증후군

White Knight Syndrome

호찬은 자신의 아파트 단지로 들어서고 있었다. 입주자 전용 차단기를 지나 지하 주차장으로 차를 몰았다. 


호찬의 지정 자리에는 웬 슈퍼카 한 대가 세워져 있었다. 그것도 두 개의 자리를 동시에 차지한 채로. 호찬은 차에서 내려 슈퍼카로 다가갔다. 양손을 모아 운전석 창을 들여다보지만, 짙게 선팅 돼 있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호찬이 차창 전면부를 훑으며 전화번호를 찾는데, 와이퍼 사이에 메모가 끼워져 있었다. 휴대폰 번호만 덜렁 적혀 있었다. 호찬이 전화를 걸자 신호가 흘렀다. 하지만 받지 않았다. 슬슬 짜증이 밀려오는데 이때, 슈퍼카가 오픈 탑 에어링 되면서 컨버터블로 변하기 시작했다. 루프가 개방되면서 차 안에서 흐르던 음악이 들려왔다. 호찬이 차 안에서 듣던 것과 격조가 다른 EMD 사운드였다. 운전자는 고스룩 착장에 선글라스를 쓴 이십 대 초반의 여자였는데 호찬을 물끄러미 쳐다볼 뿐 그 어떤 액션도 취하지 않았다. 타이트한 검정 가죽 상의 소매와 목깃 밖으로 드러난 흰 피부에는 미려한 타투 라인이 뻗어 나와 있었다. 보아하니 남자깨나 울리고 다닐 그런 스타일이었다. 호찬은 내심 멈칫했지만 차분하게 마음을 다독이며 물었다. "안녕하세요? 혹시, 아파트 입주자 되십니까?" 침묵이 이어지자, 호찬은 순간 외국인인가 싶어 더듬더듬 영어를 해 본다. "디스 플레이스 이즈... 음..." 여자는 선글라스를 머리 위로 올려 쓰더니 빤히 올려다봤다. 청록색 계열의 컬러 렌즈를 낀 두 눈이 드러나자 블랙 헤어와 창백한 피부 그리고 타투의 조합이 비로소 완성되는 것 같았다. 여자는 외모만큼이나 시크한 목소리로 물었다. "경찰?" 호찬은 여자의 이 말에 기분이 좋아졌다. ‘그래. 당연히 나를 알아봐야지.‘ 생각하며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하지만 안타까운 미소를 띠며, "죄송합니다만 수사관은 원칙적으로다 셀카를못 찍어드리게 돼 있고요. 싸인은 쌉 가능-" 하는데 갑자기 슈퍼카의 엔진음이 맹수처럼 그르렁댔다. 여자가 시동을 건 것이다. 천천히 루프가 닫히고 여자의 얼굴이 천천히 가려졌다. 호찬은 가려지는 차창 너머로 여자의 입가에 번지는 웃음을 포착했다. 그것은 비웃음이었다. 슈퍼카는 차 바닥을 긁으며 코너링했고 빠르게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호찬은 벌게진 얼굴로 읊조렸다. "이런 ㅆ- 개매너를 봤나..." 호찬이 자신의 차로 돌아서면, 차량 보닛에는 미처 떼지 못한 경찰청 시트지가 붙어 있었다. 여자는 이것을 보고 호찬이 경찰이라 짐작했던 것이다. 이 사실을 깨닫자 수치심은 더 커졌다. 주머니 속 휴대폰이 진동했다. 발신자는 정글 엔터(JUNGLE ENT.) 황이사였다. 호찬은 휴대폰에 짜증을 폭발시켰다. “안 한다고요, 몇 번을 말해! “




2.

한 시간 뒤, 호찬은 정글 엔터테인먼트 이사실 소파에 앉아 소파 팔걸이를 매만지며 자신의 전속 계약서를 들여다보고 있었고, 맞은편에 앉은 투 블록 헤어 그리고 수트를 차려 입은 황이사는 대운이 들어올 때 나타나는 징조에 대해 일장 연설을 늘어놓고 있었다. "첫째! 주변 사람들과 환경이 크게 바뀐다. 둘째! 오랜 시간 알고 지내던 관계가 깨진다. 셋째! 안 해본 낯선 시도들을 해보게 된다." 호찬은 시큰둥한 얼굴로 계약서를 테이블 위에 무심히 던져 놓더니 다리를 꼬았다. 황이사의 목소리는 더 커지고 빨라졌다. “박형사님 뉴스 나와서 은퇴 선언하실 때! 느낌이 퐉-!” 황이사는 솥뚜껑 같은 손바닥을 자신의 면전에 빠르게 덮었다 떼며 말했다. “왔대니까 그르네.” 호찬은 심드렁한 표정으로 물었다. “아 뭐가요?” 황이사의 어그로는 계속되고, “뭐긴요? 대운이지. 영어로 빅!" 잠시 생각하다가, "럭키!" 호찬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딴청을 피웠다. 시선이 닿은 사무실 벽면에는 회사 소속 연예인들이 출연한 각종 콘텐츠 홍보 포스터들이 붙어 있었다. 애가 닳은 황이사는 목소리를 높였다. “드라마! 광고! 유튜브까지! 떼돈 벌게 해 드릴 참이라니까요 이 엔터황이가!” 소리가 너무도 컸는지, 외침이 끝나자 정적이 흘렀다. 호찬은 물끄러미 황이사를 보더니 넌지시 한 마디를 작게 물었다. 


”차도 줍니까? “


순간, 황이사와 호찬의 입가에 미소가 번지더니 동시에 웃음이 터졌다. “아하하! 우하하!” 거의 다 넘어왔구나 싶은 황이사가 확신에 차 드립을 시전했다. “아- 드리다마다요! 계약서에다 이름 석자 적으시면 귀갓길에 새 차 모시는 겁니다아 빠샤!” 황이사는 꺼진 불씨 살리 듯, 침묵하는 호찬을 채근했다. “어떻게... 변호사 들어오라고 합니까? 진짜 전화 건다?” 호찬이 손을 뻗어 저지했다. “잠깐, 잠깐만... 말씀 쭉 들어보니까 영 아닌 건 아닌데... 지금 바로 답 드리기에는 내 상태가 말예요...” 속 터져 죽겠는 황이사. “상태요? 재정상태?” “아니, 아니.” 호찬이 고개를 흔들더니 자신의 가슴과 머리를 순서대로 가리키며 말했다. “여기 상태 그리고 요기 상태요.” 당최 뭔 소린지 모르겠는 황이사는 죽을 지경이고, 호찬은 뜻밖의 말을 꺼냈다. “정신과 선생님이 하시는 말씀이, 내가 지금 화이트 나이트 신드롬이랍니다.”  뭔 멍멍이 소린가 갸웃하는 황이사. “나이트요? 클럽 아니고?”



3.

몇 달 전, 호찬은 집에서 TV를 보고 있었다. 우연히 오은영의 심리 상담소가 방송 중이었고, 게스트는 국민 게이 홍석천이었다. 오은영은 게스트의 고민을 상담해주고 있었다. "석천 씨는 제가 보니까, 선행에 대한 강박과 구원 환상을 가지고 계신 분 같아요. 이거를 심리학 용어로, 화이트 나이 신드롬’이라고 합니다." 오은영 박사의 낭랑한 목소리가 스튜디오 안을 가득 채우고 모두가 귀를 기울였다. 오은영의 진단은 계속 됐다. "이것을 한국어로 번역하면, 백기사 증후군이라고도 하죠. 이 사람들이 겪는 대표적인 증상이 뭐냐면, 자신이 사람들을 구원해야 한다는 강박에 빠져 있는 겁니다." 방청석과 진행자들 사이에서 공감의 탄식이 터져 나왔다. "그래서 누군가 석천 씨한테 도움을 요청하면 기다렸다는 듯이 모든 걸 아끼지 않고 태워버리는 겁니다. 원인은? 자신이 죄를 지었다,라는 죄책감에서 비롯되는데요. 조심스럽게 여쭙습니다만 혹시 뭔가 떠오르시는 게 있나요?" 고뇌로 가득 찬 홍석천의 클로즈업 된 얼굴을 호찬은 신기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당시 호찬은 이미 퇴직을 마음 속으로 결심한 상태였다. 하지만 그럴싸한 사유를 찾기 위해 고심 중이었다. 최대한 말이 되는, 게다가 있어 보이는 퇴직 사유를 찾아야 했다... 왜냐고? 언론과 뉴스에 수차례 이름을 올린 바 있고, 예능에도 출연 적 있는 호찬에게는 자신이 그간 쌓아놓은 이미지를 지키는 것이 뭣보다 중요했기 때문이다. 헌데 이날 우연히 비로소 TV를 보다가 답을 찾은것이었다. ‘백기사 증후군‘. 사람들을 구원해야 한다는 강박. 원인은 죄의식. 고독한 영웅의 퇴장에 사람들은 박수와 응원을 보낼 것이다. 그리고 영원히 기억할 것이다. 상상만 해도 흐뭇했다. 하지만 진짜 퇴직 사유는 사실 두 글자면 설명이 끝났다. 그것은…


                                                                    '노잼'


지난 8년 동안 호찬을 움직여 온 동력은 바로, 사건을 해결할 때 쏟아지는 세간의 찬사와 스포트라이트였다. 하지만 지금은 잭 더리퍼쯤 되는 놈이 맞다이 붙자고 들어오지 않는 이상, 기립 박수를 받아도 노잼. 표창을 받아도 노잼. 특진을 해도 노잼이었다. 호찬은 몇 달 전부터 강력반 사무실 책상에 앉아 사직서 양식을 화면에 띄워놓고 퇴직 사유란을 채우기 위해 고심하던 터였다. 그러던 와중에 마음에 드는 퇴직 사유를 찾아낸 것이다. 이름하여, 백기사 증후군. 호찬은시선을 돌려 거실 벽에 붙은 사진들을 봤다. 영웅들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이순신 장군을 지나 세종대왕을 거쳐 안중근 의사를 스치고 마라토너 손기정 너머에 자신의 사진이 대문짝만하게 걸려 있었다. 그 유명한, 발레리나 강수진과 박지성 선수의 발 사진에 비견된다고 평가받은 그 등짝 사진이. 호찬은 제 잘난 맛에 사는 나르시시스트였다.



4.

엔터황의 제안을 거절하고 집으로 돌아온 호찬은 김찌찌개를 끓여놓고 혼자 맥주를 마시며 밥을 먹고 있었다. TV 화면에서는 오늘 낮 관할지에서 발생했던 전당포 살인 사건 현장 소식이 보도되고 있었다. 범인은 아직 추적 중이었으나, 호찬이 발견한 비밀 공간이 화제였다. 사망자 김모 씨는 점포 안에 대마초 밀경 재배 공간을 만들고 합성 대마를 제조해 몰래 팔아온 온 사실이 드러났다고 전해졌다. 뉴스를 보던 호찬은 안타깝다는 듯 혀를 차며 읊조렸다. "아, 아까워서 어떡해 재능 이거. 당근에다 내다 팔 수도 없고." 스스로에게 취해 밥숟갈을 뜨는데 휴대폰 알림이 울렸다. 유튜브 채널 '진심의 확성기'에서 라이브 방송을 시작했다는 알림이었다. 방송 타이틀은 <나 혼자 먹는다.>였다. 단 한 번도 운영자와 대면한 적은 없었으나, 호찬은 이 사람이 자신에게 보내는 열광적인 관심을 내심 즐기고 있었다. "아 뭐야. 호찬이 또 찍힌 거야? 하튼 이 아저씨도 쉬지를 않어요." 혼잣말 하며 채널에 접속했다. 그러자 낯익은 장면이 포착되고 있었다. 실시간으로 도촬당하고 있는 호찬 자신이었다. 카메라 위치는 창 밖 맞은편 건물의 옥상쯤 되어 보였다. 거실 밥상머리에 앉아 창가로 고개를 돌린 호찬의 얼굴이 작은 유튜브 화면에 적나라하게 포착되고 있었다. 댓글창은 접속자들의 리액션으로 뜨거웠다. 귀엽다부터 시작해서 섹시하다까지 난리였다. 불쾌해진 호찬은 숟가락을 턱- 내려놓고 일어서더니 큰 종이에 뭔가를 휘갈겨 적고 거실 창에 턱! 붙였다. 그리고 암막 블라인드를 발 끝까지 내려오게 닫았다. 거실에 어둠에 내려왔고 창 밖을 향한 메모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었다.



건너편 옥상에서 대포 카메라로 호찬을 도촬 중이던 운영자가 뜨끔하며 카메라를 내렸다. 호찬은 라이브 방송이 종료됐음을 휴대폰으로 확인했다. 그리고 바닥에 대大자로 드러누웠다. 어두워진 거실 천정에는 파티용 축광펜 (야광)으로 쓴 번호들이 별처럼 빼곡히 빛나고 있었다. 호찬이 지금까지 해결한 사건 번호들이었다. 호찬은 멀뚱히 천정의 숫자들을 바라보다가 한숨을 쉬며 돌아누웠다. "에혀, 부질 업다, 다." 하는데 지잉- 하며 휴대폰이 진동했다. 폰을 가져와 확인하는 호찬의 두 눈이 무심한 듯하다가 천천히 커졌다. 벌떡 일어나 앉더니 벗어놓은 재킷 주머니에서 구겨진 종이를 꺼내 펼쳤다. 오늘 낮 슈퍼카 차주가 와이퍼에 끼워둔 휴대폰 번호 메모였다. 지금 걸려온 발신자와 숫자가 일치했다. 무슨 일일까, 짧은 시간 동안 여러 생각들이 스쳤다. 돌이켜보면, 여자가 자신의 번호를 알고 있는 건 차를 빼달라고 전화를 걸었을 때 기록됐기 때문일 것이다. 헌데 왜? 별의별 생각들이 스치다가 호찬은 일단 통화를 연결했다. 낮게 그리고 최대한 침착하게 목소리를 실었다. "네 박호찬입니다." 여자의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왔다. "여기 이서역 사거리에 있는 토끼 모텔 육백 오십 칠혼대요. 자장면 두 그릇 갖다 주세요." 호찬은 뜻밖의 요구에 당황했지만, 메시지의 함의를 금세 알아차릴 수 있었다. ‘이건 구조 신호다. 백퍼...‘ 호찬은 경찰관 모드로 최대한 차분히 대응했다. "지금부터 네, 아니오로 대답해 주십쇼." 여자가 대답했다. "네." 호찬은 확신했다. 이 여자 지금 범죄에 노출된 게 분명하다고. 다시 물었다. "혹시 남자하고 같이 계십니까?" "네." "지금 갇혀 계신가요?" "네." 호찬의 손은 이미 메모지에 조금 전 들은 주소지를 빠르게 적고 있었다. "이서역 사거리에 있는 토끼 모텔, 몇 호라고 하셨죠?" "육백 오십 칠호요." 호흡이 척척 맞았다. 호찬은 경찰이 다급해하면 구조자는 몇 배로 혼란스러워진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다. 천천히 마지막 당부를 전했다. "지금 가겠습니다. 벨 누르고 자장면 배달이라고 말하면 열어 주세요." 전화가 끊겼다. 호찬은 일어나려다 잠시 망설였다. 여자가 있는 곳은 관할지에서 한참 벗어난 곳이다. 퇴직이 한 달도 남지 않은 상황에서 괜스레 나서는 건 아닌가 싶기도 했지만, 오늘 지하 주차장에서부터 있었던 일련의 일들을 떠올려보면 자신의 손으로 여자를 구출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결심한 듯 권총 홀스터를 두르고 현관을 나섰다.



3화 끝.





백기사 증후군이란 '영웅 증후군'이라고도 불리는 백기사 증후군은 자신이 위험에 처할 수 있는데도 강박적으로 타인을 구하려는 행위를 일컫는다. '백기사 증후군에 빠진 사람(이하 백기사)'는 육체적이든 정신적이든 어려움에 처한 사람에게 강하게 끌리는 성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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