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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재천 May 04. 2024

존 무어, 평양에서 교육 선교로 국가 표창받은 선교사

평양 광성학교 등 30여 학교의 건물 증축 및 인재 배출

존 무어 선교사(문요한, 1874~1963)는 평양 등 관서지방 복음화를 위해 헌신하였다. 교육 선교사로서 평양 광성 학교, 정의 여학교를 발전시켰고 평양 여자 성경 학교 및 평양 요한 학교를 설립하여 사역자를 양성하였다. 


그는 1874년 펜실베이니아 주 피츠버그에서 목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오하이오 주 사이오 대학을 졸업하고 1903년 감리회 신학교인 드류 신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리고 그해  감리회 한국 선교사로 임명되었다.


그는 1903년 내한하여 정동 제일 교회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평양으로 파송받았다. 당시 감리회에서는 신학교 졸업한 선교사들이 한국에 와서 안수받는 사례가 많았다.


그는 평양에 가서 2년 전부터 복음 사역을 하고 있는 모리스 선교사를 도우며 관서 지역에 복음 전하는 일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1905년 미국에 가서 로니 양과 결혼하면서 미국에 거주하게 되어 그곳에서 해외 선교를 도우는 활동을 9년간 하였다.


그 후 1914년 부인이 소천하면서 다시 한국에 와서 평양을 중심으로 선교 활동을 전개하였다. 당시 평양에서 사역하던 모리스 선교사는 영변 선교부로 이동하여 평북 지역을 담당하여 그가 평양 등 관서 지방과 황해도 지방을 담당하게 된 것이다.


그는 관서 지방의 시골 구석구석까지 말을 타고 밤낮없이 순회하며 복음을 전하였으며 교세가 약한 지역에는 교역자를 보내고, 보조금을 지원하여 교회 건물을 세웠다. 당시 관서 지역은 의료 선교는 활발하였으나 상대적으로 교육 선교가 미흡하여 그는 해주, 연백, 대동 등 많은 지역에 초등학교를 세우고, 학교 운영비를 보조했다.


그는 광성 학교(1893년 홀 선교사에 의해 설립) 2대 교장으로 취임하여 학교를 넓은 곳으로 이전하고 학교 건물을 건축했다. 1918년 광성 학교가 고등보통학교로 인가받은 데 기여했다. 광성 학교에서는 홍현설 박사 등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다. 또한 정의 여학교(1899년 개교) 이사장으로 취임하여 여자 고등학교로 인가받고 명문 학교가 되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1915년 9월에는 로빈스 선교사로 하여금 남산현 교회 주일학교 학생 20명을 가르치게 하였는데, 이것이 <평양 여자고등 성경학교>가 되었다. 무어 자신이 설립자가 되어 학교 건물과 기숙사를 건축했다. 이 학교는 해방 전까지 수 백 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여 유 초등학교 교사 및 교회 여전도사로 활동하도록 하였다.


1935년 한국 교회에 사역자가 많아 필요됨에 따라 신학교육 기관인 <평양 요한 학교>를 설립하였다. 이 학교는 1944년 일제에 의해 폐교당할 때까지 백여 명의 목회자를 배출하였다. 학교 이름을 요한 신학교로 정했으나, 감리회에서 이미 다른 신학교가 존재한다는 이유로 반대하여 평양 요한 학교로 명명된 것이다.


이 학교를 통해 찬송가 및 동요 작곡자가 많이 배출되었다. 윤춘병(어버이 은혜를 작사), 이태선(동요 작곡가), 이유선 (323장 부름 받아 나선 이 몸 작곡가) 장수철(110장 고요하고 거룩한 밤, 570장 주는 나를 기르시는 목자여), 구두회(271장 나와 같은 죄인 위해, 559장 사철에 봄바람, 579장 어머니의 넓은 사랑), 박재훈 등이 있다. 박재훈은 300곡의 동요 및 500곡 이상의 찬송가를 작곡하였다. 그중 9곡이 새 찬송가에 수록되어 있다. : 527장(어서 돌아오오), 301장(지금까지 지내온 것), 392장(주여 어린 사슴이), 515장(눈을 들어 하늘 보라), 592장(산마다 물이 탄다) 등이 있다.


그의 선교 활동을 인정받아 1915년 마운트유니온 신학교에서 명예 신학박사를 받았고, 1925년 일제 강점기 상황에서 일본 정부로부터 표창을 받았다. 그가 귀국 후 1954년 한국 정부에서도 교육 사업의 공로를 인정하여 표창장을 수여했다.


그는 1941년 일제에 의해 강제 귀국 당하여 미국으로 돌아갔다. 로스앤젤레스에서 거주하다 1963년 8월 소천하였다. 그가 소천 후 광성 학교 및 평양 요한 학교 동문들이 서울 광림교회에 모여서 추모 예배를 드리며 그의 한국 선교활동을 기렸다.


그의 가족으로는 1916년 재혼한 베네딕트(결혼 전 이름은 변해덕, 결혼 후 문로덕, 1884~1968) 여사가 있다. 그녀는 존 무어 선교사와 결혼 후 평양 여자 성경 학교에서 학생을 가르치고 지방 선교에도 열심히 활동하였다. 1941년 귀국하여 할리우드에서 거주하다 84세에 소천하였다. 아쉽게도 그녀의 세부 선교활동에 대해서는 기록이 남아있지 않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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