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록스, 북한 선천의 최초 의료 선교사로 헌신
건물 건축, 학교 교육, 독립운동 지원 등 선교의 모범
알프레드 샤록스 선교사(사악수,?~1919)는 선천의 초기 선교사로서 의료 사역을 비롯하여, 신성학교 발전에 기여하고 민족 운동을 적극적으로 협력한 선교사이다.
그는 미조리 주 파크 대학을 졸업하고, 샌프란시스코 쿠퍼 의과대학을 졸업 후 의사가 되었다. 그리고 1899년 9월 부인 모리 에임스와 함께 북 장로교 선교사로 한국에 왔다.
서울에서 한국어를 공부하면서 제중원(세브란스 의전)에서 에비슨, 웰즈와 함께 해부학, 생리학, 약물학 등의 책을 저술하였다. 다음 해 평양에 가서 1년 활동하였다.
1901년 선천 선교부가 신규 개설되면서 그가 의료 선교사로 파송되었다. 선천에 가서 먼저 도착한 휘트모어 목사와 함께 사역하였다. 그는 선천에서 독립 운동가 이갑성 등에게 복음을 전하였다.
그는 선천에서 의료 사역을 시작할 때 한옥을 빌려서 환자를 돌보았다. 수술을 할 때는 조수가 없어 부인이 조수 역할을 하였다. 그는 환자를 돌보는 일을 하나님의 명령으로 생각하고 최선을 다해 환자를 돌보며 복음을 전하였다. 그의 의료 사역은 1905년 선천 미동 병원을 건축하여 더욱 발전하였다.
그는 건축 활동에도 적극적이어서 한국 최초 선교사 주택인 허니문 하우스를 설계하고 건축에도 직접 참여하였다. 이 건물은 선천 최초 서양식 건물이 되었고, 자신의 가족 및 6명의 선교사가 거주하였다. 그 후 미동병원 건물, 신성학교 건물 및 기숙사 건축에 기여하였다.
1904년부터 강계 선교부에서 사역하였고, 1909년 다시 선천으로 돌아와서 신성 학교 교감으로 취임하여 학생들을 육성했다. 신성 학교에 3H 교육 체계인 Head(지), Heart(덕), Hand(공)를 도입하여 실용적인 교육을 실시하였다. 3H 교육 체계는 그가 졸업한 파크 대학의 교육 체계로서 자신도 3H교육으로 선교사 자질을 익힌 것이다.
민족운동에도 적극 협력하였다. 1912년 105인 사건의 연루자로서 고생했고, 1919년 3.1 운동 시 선교사 대표로 일본에 항의하기도 했다. 이때 항의한 대표단으로는 게일, 에비슨, 하디, 노블 선교사 등이 있다.
1919년 말 건강이 나빠져서 미국으로 귀국하여, 미네소타 주 로체스터에서 소천하였다. 그의 부인은 1938년까지 한국에 계속 남아 헌신하였고, 그의 딸 엘라 샤록스 (사은라)는 부친의 뒤를 이어 1926년 내한하여 1952년까지 안동 및 대구에서 간호원으로 사역하였고, 서울 세브란스병원 간호과장을 역임하였다.
그의 부인 모리 에임스가 1984년 저술한 책이 남아있다. 1904년 당시 샤록스 부부의 일기와 선교 편지를 중심으로 편찬되었고, 제목은 《In Shenchun Korea during the Russo Japanese war of 1904》이다. 본 책은 영문으로 작성되었고, 기족용으로 소량 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