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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재천 Jun 12. 2024

포사이드, 한센병 환자 돌봄의 효시가 된 선교사

자신의 목과 귀를 자른 강도를 용서한 선교사

윌리 포사이드 선교사(보위렴, 1873~1918)는 한센병 환자를 위해 병원과 수용시설을 만드는 데 효시가 된 선교사이다. 또한 전주에서 강도에게 머리와 목과 귀를 잘린 큰 부상 후에도 끝까지 이 땅의 복음화를 위해 헌신한 선교사이다.


그는 1873년 12월 미국 켄터키 주 해로스버그에서 태어나, 1894년 프린스턴 대학교를 졸업하고 1898년 루이빌 의과대학을 졸업하였다. 그 후 쿠바에서 발생한 미국과 스페인의 전쟁에 군의관으로 참전한 후 한국 선교사로 지원하였다.


그는 1904년 10월 남 장로교 선교사로 내한하여 전주 선교부에서 사역을 시작하였다. 그때 전주예수병원 원장이던 잉골드가 안식년으로 병원을 비우고 있어 그가 문을 열고 환자를 돌보았다. 그리고 길거리 움막에 아이들이 거주하는 것을 보고 그들을 한 곳에 모으고 교육하기 의해 고아원을 시작했다. 자신의 선교비를 성경을 구입하는 데 사용하고 그 성경을 사람들에게 나눠주었다.


그는 전주에 대학을 세우기 위해 미국에 호소하여 후원자 그레이엄으로부터 만 불을 후원받았다. 그러나 함께 사역하던 전킨 선교사가 소천하여 전주에 학교 설립이 지연되었고, 이때 후원금은 해방 후 대전 한남대 설립에 사용되었다.


그는 지방을 순회 진료하며 환자를 치료하였는데, 1905년 전주 인근 망골 마을에서 강도에게 부상당한 사람을 치료한 후 밤이 늦어 그 집에서 하룻밤을 자게 되었는데, 그날 밤 또 강도들이 습격하여 그의 목이 찔리고 두개골이 깨지고 귀가 잘리는 부상을 입었다. 큰 부상이었기에 미국으로 가서 2년간 치료를 받았다. 그때 전주 관찰사에서 강도를 잡은 후 포사이드 선교사에게 의향을 물었는데 《강도를 용서해 주라》며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했다.


그는 미국에서 병을 치료한 후 1907년 다시 한국으로 돌아와서 목포에서 의료 사역을 계속하였다. 1909년 4월 광주에서 사역하던 오웬 선교사가 지방 순회 중 쓰러지는 일이 발생하였다. 폐렴 증상이 있어 내과 의사인 포사이드 선교사의 치료가 요청되었다.


그래서 그는 말을 타고 급히 광주로 향했다. 그때 광주에서 20km 떨어진 곳에서 길에 쓰러져 있는 한센병 여인을 만났다. 그는 그냥 지나칠 수 없어 그녀를 감싸 안아 자신의 말에 태우고 함께 광주로 데리고 갔다. 성경에 기록된 길가의 부상자를 치료한 사마리아인의 행동이 일어난 것이다.


한센병 환자를 말에 태우고 그는 걸어서 광주로 왔기에 시간이 다소 지체되었는데 오웬 선교사는 이미 소천한 상태였다. 그는 동료 선교사를 잃은 슬픔을 이겨내고 한센병 환자가 거처할 곳을 찾다가 광주 동남쪽 옹기 가마터에 거처를 잡았는데 그 후 많은 한센병 환자가 이곳에 몰려와서 한센병 환자촌이 되었다.


그는 한센병 환자에 대한 소명을 발견하고 광주 의료 선교사 윌슨과 협력하여 한센병 병원을 추진하였다. 그러나 광주 시내에는 안된다는 시민의 반대에 부딪혀 광주군 효현리에 한센병 병원과 수용시설인 애양원이 설립되고, 1912년 초대 원장으로 윌슨 선교사가 맡았다. 포사이드 선교사의 헌신이 한센병 환자 돌봄의 시작이 된 것이다.


그 후 애양원은 여수로 이동하여 한센병 환자를 지속적으로 돌보았다. 그 후 한센병 환자를 위해 병원과 수용 시설이 계속되었는데, 1912년 부산 상애원이 세워져 매켄지 선교사가 헌신했고, 1913년 대구 애락원이 세워지고 플레처 선교사(2대 대구 동산병원장)가 헌신하였다.


포사이드의 헌신을 바라본 많은 한국인들은 감동하여 예수님을 영접하였고, 특히 깡패였던 최홍종은 회개하고 선교사를 돕는 일을 자청하였고 훗날 호남 최초의 목사가 되어 한국 복음사 및 독립운동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는 1911년 풍토병인 스프루가 걸려 치료를 위해 미국으로 돌아갔다. 켄터키 주 루이빌에서 7년 동안 투병하면서 한국 교회를 위해 후원금을 모집하는 강의를 하며 한국으로 돌아갈 날을 기다렸다. 그러나 병을 이겨내지 못하고 1918년 5월 45세의 젊은 나이로 본향인 하늘나라로 떠났다. 그의 전 재산을 한국 한센병 퇴치를 위해 써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의 기념비가 여수 애양원에 세워져 있다. 그의 이야기는 《살아있는 성자, 포사이드》 책으로 나와있다(양국주 저, 2018년)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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