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너벨 니스벳, 목포 정명학교 교장으로 활동
내한 13년 만에 순직하였고 책 《한국에서 일상》저술
애너벨 니스벳 선교사(유애나, 1869~1920)는 목포 정명여고 교장으로 봉직하면서 학교 발전에 크게 기여한 선교사이다. 3.1 운동에 참여하려는 학생들을 격려한 후 기숙사 앞에서 미끄러지면서 크게 다쳐 한국 온 지 13년 만에 순직하였다.
그녀는 1869년 1월 테네시 주에서 태어나서 클락스빌 전문학교를 졸업하고 교사가 되었다. 교사 생활을 하다가 1899년 존 니스벳 목사와 결혼하였으며, 1907년 3월 남편의 선교사 파송으로 함께 내한하였다.
그녀는 1907년 전주로 부임하여 기전 여학교에서 교육 사역을 시작하였다. 전주에서 함께 사역했던 랭킨 선교사는 그녀를 아주 총명하고 언어 능력이 뛰어나 한국어를 빨리 습득하였고, 또한 독서 능력이 아주 우수하다고 평하였다.
그녀는 5년의 전주 사역을 마무리하고, 1911년 목포로 이동하여 목포 정명학교 교장으로 8년간 사역하였다. 그녀는 정규 교사 자격을 가진 전문 교육 선교사로서 정명 여학교의 교육 과정을 체계화하고, 새 교사를 건축하여 학교 발전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1911년에는 <Days in and days out in Korea (한국에서의 일상)> 책을 저술하였다. 이 책에는 남 장로회 7인 선발대 선교사의 이야기 등 호남지방 초기의 선교 역사를 기술하고 있어 역사 가치가 높은 책으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호남 지방에서 순직한 피츠 선교사(간호원)와 랭킨 선교사(교육)의 이야기도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 현재 이 책은 <호남선교 초기 역사>라는 제목으로 번역되어 있다.
1919년 3.1 운동에 참여하려는 학생들을 만난 후 기숙사 계단에서 미끄러져 크게 다쳤다. 그 후 병이 악화되어 회복하지 못하고 1920년 2월 순직하였다. 목포에는 그녀를 기념하여 <유애나 기념관>이 세워져 있고, 그녀의 묘비에는 정명여학교 동창들이 세운 묘비가 남아있다. 그녀는 한국 온 지 13년 만에 하나님 나라로 떠났으며, 시신은 광주 양림동 선교사 묘지(호남 신학대 교내)에 안장되어 있다.
그녀와 함께 온 남편 존 니스벳은 전주 신흥학교 교장으로 헌신하며 인재를 양성하였고, 전남 남부 지역을 순회하며 복음을 전하고 다수의 교회를 설립하였다. 1920년 부인과 사별 후 이듬해 라헬 선교사와 재혼하여 선교 사역을 계속하다가, 1929년 미국으로 돌아갔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