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버트 윌슨, 광주기독병원 2대 원장으로 40년 헌신
한센병 환자를 위해 평생을 헌신한 선교사
윌슨 선교사(우월순, 1880~1963)는 광주 기독병원 2대 원장으로 사역하였고, 한센병 환자를 위해 평생을 바친 선교사이다. 그는 이 땅에서 40년간 머물면서 1만 명이 넘는 환자를 돌보았다.
그는 아칸사스 주 콜럼버스 시에서 태어나서 워싱턴 대학 의대를 졸업했다. 그리고 1908년 2월 남 장로교 의료 선교사로 이 땅에 왔다.
1909년 광주 제중원(현 광주기독병원) 2대 원장으로 첫 사역을 시작했다. 이때 현대식 의료 방법으로 환자들을 치료했으며, 1911년에는 미국인 그래함 씨가 헌금한 자금으로 지하 1층 지상 2층의 현대식 건물을 신축하여 병원의 규모를 키웠다. 이 건물은 그래함 기념병원으로 명명되었다.
* 광주기독병원은 1905년 놀란 선교사가 설립하여 초대 원장으로 봉직하였고, 그 후 윌슨 선교사에 의해 크게 발전하였다. 1926년에 윌슨 선교사가 떠난 뒤 1930년 부란도 선교사가 부임하여 결핵 치료 병원으로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는 1909년 포사이드 선교사가 데리고 온 한센병 환자 돌보기 위해 제중원 뒤편의 가마터에서 진료를 시작했다. 그리고 선교사의 헌금을 모금하고 영국 에든버러의 나환자 협회에 연락하여 후원을 받았다.
특히 당시 윌슨의 어학 선생이던 최흥종 장로가 봉선리에 있는 자신의 토지 천 평을 기증하여, 봉선리에 나병 진료소를 1912년 개설에 협력하였다. 그 후 봉선리에는 봉선리 교회를 설치하여 한센병 환자들의 영혼을 돌보았고, 1913년 한센병 환자 집단 거주지가 만들어졌다. 1919년에는 한센병 환자를 위한 초등학교가 설립되었다. 봉선리 한센병 환자촌은 1926년까지 운영되었다. 그 후 주민들의 반대로 여수로 이전하여 여수 애양원이 되었다.
그는 한국에서 한센병 환자를 위해 헌신한 쉐핑 선교사 (서서평)를 이 땅에 초청한 장본인이다. 그가 한센병 환자를 돌보면서 일손이 부족하여 1912년 간호사를 요청하였는데 이때 쉐핑 간호사가 한국에 파송되어 함께 사역한 것이다.
윌슨의 한센병 환자 돌봄 사역에는 에피소드가 있다. 1909년 3월 순회 전도하던 오웬 선교사가 폐렴에 걸려 광주 진료소로 후송되자, 당시 목포에서 사역하던 내과 전문의인 포사이드에게 왕진을 요청했다. 그래서 포사이드가 말을 타고 광주로 오는 도중 나주 금천에서 죽어가는 한센병 환자 여인을 만났다. 포사이드는 그냥 지나칠 수가 없어서 그녀를 말에 태우고 자기는 걸어서 광주 진료소에 와서 간병하게 된다. 늦게 도착하여 오웬 선교사는 이미 소천하였지만 선한 사마리아 사람과 같은 행동을 보여준 것이다. 포사이드 선교사의 이웃사랑 정신에 감동을 받은 윌슨 선교사는 한센병 환자 구제 사업에 협력하게 되었다. 또한 당시 광주 제중원 서기 겸 윌슨의 어학선생을 하던 최흥종 장로는 나병 여환자가 떨어뜨린 더러운 지팡이를 주워서 들고 가라는 포사이드 의사의 말에 두렵고 놀랐지만, 결국 이를 따름으로써 사랑의 소명감을 깨닫게 되고 평생을 한센병 치료 사업에 전념하게 되었다.
1926년 한센병 병원이 여수 지역으로 이전하면서 윌슨 선교사도 광주 기독병원 원장을 사임하였다. 그 후 그는 한국에 계속 머물면서 의술을 베풀고 어려운 사람을 도우면서 복음을 전하였다. 그는 성격이 낙천적 이어서 여가 시간이 생기면 사냥을 즐겼고, 까마귀를 잡아 약재로도 사용하였다. <한국에서 사냥의 즐거움>이라는 글이 남아있다.
그는 1945년 광복 이후 미 군정청에 의해 한센인 시설을 총괄하는 군정 자문관에 임명되어 활동하기도 했다. 그 후 1948년 68세의 나이에 미국으로 돌아갔다. 이 땅에서 40년을 한국인 한센병 환자를 위해 헌신한 것이다. 귀국 후 신학 공부하여 목사 안수를 받기도 했던 그는 1963년 버지니아 주 리치먼드에서 83세를 일기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의 아들 존 윌슨도 아버지에 이어 군산에서 의료 선교사로 평생을 헌신하였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