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신으로 26년간 마산, 진주 등 경남 지역에서 활동
아이다 맥피 선교사(미희, 1881~1937)는 평생 독신으로 26년간 이 땅에서 활동하며, 마산 의신 여학교 교장 등 여성 교육에 헌신하였다.
그녀는 1881년 호주 빅토리아 주 탈봇(Talbot) 근처에서 태어나서 독실한 기독교 가정에서 자랐다. 그녀는 부모의 직업을 이어받아 교사로 일하다가, 1910년 선교의 사명을 받아 디컨네스 훈련원에서 단기선교 과정을 수료하고 호주 장로교 선교사가 되었다.
1911년 10월 30세의 나이로 한국에 도착했다. 처음에는 부산 범일동에서 선배 선교사들과 함께 거주하며 한국말과 한국 문화를 익혔고, 1912년에는 6개월간 평양에서 새로 설립된 한국어 학교에서 교육받았다.
그 후 1913년 마산으로 이동하여, 당시 창신학교(1909년 설립)에서 여학생만 별도로 분리하여 설립된 의신 여학교의 초대 교장이 되었다. 의신 여학교는 마산 최초 여학교로서 26명의 여학생으로 시작되었다. 그녀는 설립 때부터 초대 교장으로 순직할 때까지 평생을 교장으로 봉직하면서 마산 지방 여성 교육에 헌신하였다.
* 마산 의신여학교는 1939년 7월 신사참배 거부로 일제에 의해 폐교되었다.
1933년에는 2개의 유치원(의신, 월영)을 마산에 설립하는데 기여하였다. 당시 엘리스 클라라(이명선, 1925년 내한) 선교사가 1927년부터 유치원을 설립하고 운영하였는데, 그녀의 귀국으로 인해 맥피 선교사가 유치원도 운영하였다.
1936년에는 진주에서도 활동했는데, 진주 시원 여학교와 유치원 운영을 지원하였다. 당시 진주에서 선교하던 클라크 프란시스 선교사(가불란서, 1910년 내한)가 시원 여학교를 운영하다가 병으로 귀국하게 되어 행정 업무를 지원하였다.
그녀는 마산 지역 기독교 면려회 운동에 적극 참여하였으며, 교회 성가대와 주일학교에도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평일에는 여성 성경 공부반을 운영했고, 1932년에는 1년간 부산 일신 여학교 교장을 겸직하기도 했다.
그녀는 자신의 건강을 돌보지 않고 한국 여성 교육에 힘쓰다가 심장 천식에 걸려 1937년 4월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26년간 경남 지역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다가 56세의 일기로 진주에서 순직한 것이다. 그녀의 시신은 진주 호주 선교사 묘원에 안장되었다가, 1966년 마산 무학산으로 이장되었다. 그 후 다시 창원 선교사 묘지에 안장되어 있다. 2005년에는 그녀를 기념하는 순직 기념비가 마산 창신대학에 건립되었다.
그녀의 창원으로 묘비 이장에 대한 기록에서 하나님의 역사를 느끼게 한다. 2009년 창신대 총장이 산책길에서 우연하게 맥피 선교사의 묘지가 무연고 묘지로 이장 공고가 된 사실을 발견했다. 그는 이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경남 성시화 운동 본부에 요청하였는데, 이것이 창원에서 호주 선교사 묘원, 경남 선교 120주년 기념관 및 기념 교회당 건립으로 발전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이루신 또 하나의 역사인 것이다.
맥피의 동료 선교사인 스코트(서오성)는 글 <우리의 따뜻한 친구>에서 그녀는 학생들을 자식처럼 사랑하고 도움을 주었으며, 학생들은 어머니로 부르며 감사했다고 했다. 인정을 베풀고 다른 사람의 무거운 짐을 나누어지는 <섬김>의 삶을 살았던 것이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