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시원 여학교 교장으로 활동
프란시스 클라크 (가불란서, 1879-1956)는 진주 배돈병원에서 26년간 간호사로서 헌신하였고, 또한 진주 시원 여학교 교장으로 활동한 선교사이다.
그녀는 호주에서 태어나서 간호학교를 졸업하고 디커니스 훈련소에서 선교 훈련을 받았다. 그리고 한국 선교사로 지원하여 1910년 3월 호주 장로교 선교사로 내한하였다.
그녀는 한국에 도착하여 한국어를 배우고, 서울 세브란스 병원에서 6개월간 근무하며 한국 생활에 적응하였다. 이때 한국인의 열악한 의료 상황을 이해하고 장티푸스로 위험에 처한 엘리스 라이얼 부인을 간호하였다. 어려움에 처한 사람을 도우는 그녀의 섬김이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그녀는 진주에 배정되었고, 당시 진주에는 병원이 없는 상태여서 순회하며 환자를 돌보는 활동을 하였고, 성경 공부 모임에 참여하였다. 그 후 1913년 배돈 병원이 설립되면서 초대 간호사가 되어, 병원의 간호 프로그램 및 간호사 훈련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1920년까지 배돈 병원에서 헌신하였다. 진주 교회에 출석하여 주일 학교와 학습반에서 봉사했고, 전도와 새 신자를 돌보는 일에 헌신적이었다.
1920년 그녀는 사역지를 경남 거창으로 이동하여 3년간 지역 순회 전도활동을 전개하였다. 거창에서 그녀의 사역은 순회 간호, 공부반 사역, 전도부인들 감독, 여성 사역, 확장 주일학교 등이다. 그녀는 영어와 음악을 가르쳤고, 간단한 질환을 치료하기 위한 작은 시약소도 운영하였다.
* 확장 주일학교(Extension Sunday schools)는 비기독교인의 자녀들을 전도하는 데 목적을 두고 성경뿐 아니라 한글의 읽기, 쓰기, 그리고 때로는 초급 한문도 가르쳤고, 기술과 음악도 가르쳤다. 이러한 교육내용은 부모들의 호감을 얻었고 전도에 상당한 효과를 얻었다.
1924년 다시 진주 베돈 병원의 간호 부장으로 돌아와서, 공부반 사역, 어린이 주일학교에 종사했다. 그녀는 순회 사역에 많이 참여할 수 없었지만 시골 사역에 흥미가 있고 이 사역에는 용기를 필요하다고 보고했다. 비록 교회가 약한 마을이더라도 비기독교 가정의 많은 아이들이 예배에 참여하고 있으며 새로운 성장의 희망이 있다고 언급했다.
1926부터 1932년까지 그녀는 시원 여학교의 교장으로 헌신하였다. 어려운 여학생의 경제적 자립을 돕기 위해 바느질을 배우게 했고, 여학교에 체육과 스포츠 과목을 도입하였다. 시원 여학교는 진주 광림 학교로부터 여학생만 분리되어 새롭게 시작된 학교이다.
1932년에 심장병이 생겨서 결국 1934년 말 호주로 돌아갔다. 그녀는 1936년 2월 호주에서 수술을 받고, 그해 8월에 선교사를 사임하였다. 그 후 호주 멜버른에 거주하다가 1956년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갔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