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 베돈 병원 2대 원장, 세브란스 병원에서 헌신
찰스 맥라렌 선교사(1882~1957)는 진주 베돈 병원 2대 원장으로 사역하고 또한 세브란스 병원에서 신경정신과를 만든 한국 최초의 정신과 전문의 선교사이다.
그는 1882년 일본 동경에서 태어났다. 스코틀랜드 출신의 부모님이 일본 선교사로 사역하는 중에 셋째 자녀로 출생하였다. 그리고 4살 때 아버지의 건강 악화로 호주로 이주하였고, 멜버른에서 성장하였다.
그는 멜버른 의과 대학을 졸업하고 신경정신 분야 박사를 취득한 후 의료 선교사로 자원하였다. 1910년 호주 학생 기독 운동에 참가하여 부인이 될 베시를 만났다. 그리고 1911년 결혼과 동시에 목사 안수받았다. 당시 의료 선교사인 경우 목사 안수하여 교회를 돌보도록 하는 제도가 있었다.
그는 1911년 10월 부산항에 도착하였고, 진주 베돈 병원에서 사역을 시작했다. 베돈 병원은 환자가 많아서 휴 커를 선교사 혼자서 감당하기가 어려웠다. 그는 병원에서 신경정신과와 소아과를 담당했다.
베돈 병원은 건물을 새로 건축하여 1913년 11월 공식 개원하였고, 경상도 지방에서 널리 알려져서 많은 환자들이 몰렸다. 그 후 병원 근처에는 교회, 선교사 사택이 세워지고 진주 선교부는 큰 규모의 선교부가 되었다.
맥라렌 부부는 선교비를 고아 양육에 사용하였고, 세 명의 한국인 아이를 입양하여 양육하였다. 1915년 휴 커를 부부가 건강상의 문제로 귀국하여 그가 2대 베돈 병원 원장이 되어 3년간 헌신하였다.
베돈 병원 사역 당시 맥라렌의 형이 프랑스 전쟁에 참전하여 사망하는 일이 일어났다. 형을 애도하며 그는 프랑스 전쟁에 참전하기로 하고 1918년 4월 진주를 떠나 프랑스로 갔다. 베돈 병원은 클라크 간호원과 한국인 의사가 운영하였고, 진 데이비스 여 선교사가 새로 합류하여 환자를 돌보았다.
그는 전쟁 참가한 후 1920년 3월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진주 베돈 병원에 복귀하여 원장으로 다시 사역하였다. 그는 진주에서 사역하면서 서울 세브란스 대학에서 강의를 10년간 하였는데, 세브란스 병원의 신경정신과 설립을 위해 세브란스 병원으로 발령받았다.
베돈 병원은 통영에서 사역하던 테일러 선교사가 원장으로 부임하였다. 그는 1923년 서울로 이주하였고 세브란스 병원에 최초로 신경정신과를 개설하고, 한국인 정신과 의사를 양성하였다.
그는 일본어를 할 수 있었기에 초기에는 일본 사람들과 친하게 지냈으나, 한국인을 속박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마음이 바뀌었다. 일본의 신사참배 요구에 앞장서서 반대 활동을 전개하여 결국 1939년 호주 선교부 전체가 반대 표명을 하게 되었다.
그는 1938년 10월 세브란스 병원 의사를 사임하고 1939년 다시 진주 배돈 병원으로 복귀하였다. 당시 원장이던 테일러 선교사가 소천하여 빈자리에 다시 돌아와서 여 의사인 진 데이비스와 함께 베돈 병원의 환자를 돌보았다.
1941년 전운이 감도는 한국 땅이었기에, 호주 선교부는 선교사를 한국에서 철수하는 방침을 통보되었다. 그는 귀국을 거절하고 진주에 머물다가 일본 경찰에 의해 감옥에 갇혀서 11주를 감금당하였다. 1942년 2월에 석방되었으나 석방 후 3개월의 가택 연금 기간을 지냈다. 그리고 결국 일본에 의해 1942년 6월 호주로 추방되고 말았다.
그가 한국을 떠나는 날, 부산항에는 많은 여성들이 환송하였다. 여인들이 밤새도록 바느질한 비단옷을 선물로 주었는데, 맥라렌은 평생 잘 간직하였다.
1942년 11월 호주로 도착한 후 호주의 교회를 다니면서 한국의 상황을 알리고 저술활동을 하였다. 제자인 한국인 정신과 의사를 호주에 초청하여 유학시켰고, 인도 의과대학을 후원하는 일에도 앞장섰다.
1957년 10월 향년 75세로 이 땅의 사역을 마감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그의 시신은 박스 힐 공동 묘시에 안장되었다. 2017년 11월에는 그의 업적을 기리는 학술대회가 연세대 의대에서 개최되었다.
그는 하나님의 사역에 쓰임 받은 위대한 삶을 살았고, 하나님 안에서 진실되게 살았다고 동료 선교사들은 추모했다. 그는 <참된 평화는 인간의 마음과 영혼에 있다>, <하나님 없는 사람은 어디에도 갈 수 없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어디에나 갈 수 있다>는 말을 남겼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