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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미 스키너, 한국인의 진정한 친구 선교사

통영에서 여성 교육에 헌신

by 신재천

에이미 스키너 선교사(신애미, 1889~1954)는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통영에서 26년간 사역하며 여성 교육을 위해 헌신한 선교사이다. 6.25 전쟁 후 한국인이 가장 많이 재파견을 요청한 선교사로 기억되고 있다

그녀는 호주 빅토리아 주 비치워쓰에서 의사 가정에서 태어나, 고향에서 중고등학교를 마치고 멜버른 대학교에서 인문학을 전공하였다. 대학교 동아리 활동에서 해외 선교를 알게 되어 선교사의 꿈을 가지게 되었다. 그녀는 졸업 후 교육학을 공부한 후 선교사로 지원하였다.


그녀는 1914년 9월 25세의 나이로 부산에 도착하였다. 잠시 부산에 머문 후 첫 사역지인 거창으로 이동하여 한국어를 배우고 이 땅의 문화에 익숙해져 갔다. 그러면서 어린이와 여성에게 노래를 가르쳤고, 인근 시골을 순회 방문하며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거창에서 2년 사역을 마치고 1916년 마산 의신 여학교 교장으로 발령받아 이동하였다. 당시 교장이던 맥피 선교사의 공백을 대신한 것이다. 그녀는 교육 선교사로서 장년 여성 성경 공부반을 지도하여, 많은 여성들이 복음을 받아들였다.


1920년 첫 번째 안식년을 마친 후 다시 한국에 돌아와서 통영 지역으로 배속되었다. 통영에서는 거제도 등 섬을 방문하며 전도활동을 활발히 하였다. 학교 운영에 관심이 많아서 1920년 진명 여학교 내 산업반은 별도 분리하여 운영하였다. 산업반은 직업 교육을 중심으로 교육했는데, 수 공예품을 만들어 호주에 보내져 후원금을 모으기도 했다.(산업반은 후에 커 선교사에 의해 동래 실수학교로 발전) 1923년 진명 유치원을 설립하였고, 1924년 진명 야학교를 설립하여 정규 학교로 진학하지 못하는 청소년을 가르쳤다.


그녀는 재능 있는 한국인을 호주로 유학 보내거나 평양 신학교로 보내어 인재로 양성했다. 대표적인 사람으로 양한나(부산 YMCA 초대회장), 최덕지(최초 여성 목사), 공덕치(윤보선 대통령 영부인) 등이 그녀가 공부를 하도록 배려한 여성 인재들이다.


그녀는 특히 유치원에 힘을 기울였다. 유치원 원장과 교사들을 모아 훈련 프로그램을 소개하는 교육을 정기적으로 실시했다. 교사들을 유람선에 태워 섬을 돌아보도록 배려하기도 하였다. 또한 1934년에는 동래 실수학교 설립에 기여하였고, 1937년 통영의 진명 학교 건물 건축에도 공헌하였다. 1938년 마산 여학교에서 1년간 교장으로 잠시 헌신한 후 다시 통영 진명 학교로 돌아왔다. 그러나 일제의 신사참배 반대 이유로 인해 학교는 폐교의 길을 걷게 되었다.


1939년 충무 교회에는 그녀의 선교 25주년을 기념하여 기념비가 세워졌다. 그녀의 통영 지역 복음 활동 헌신에 대한 감사의 표시였다. 그 후 1940년 7월 안식년 휴가로 호주로 돌아갔으나, 다시 한국으로 오지 못했다. 한국 내 전운이 감돌아서 호주 선교사의 철수 결정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호주 내에서 지속적으로 사역하였다. 지방에 유치원을 설립하였고, 1944년 뉴 헤브리디스에서 6년간 선교사로 사역하기도 했다. 그 후 1954년 7월 65세로 나이로 멜버른 병원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1970년 4월 충무교회에서 스키너 선교사의 기념비가 다시 건립되었다. 기존 기념비가 일제에 의해 파손된 것을 다시 복원한 것이다. 충무 교회 백 년사에는 《우리는 영원히 스키너의 이름을 기억하리라 》라고 적혀있다. 그녀는 한국인과 우정을 나눈 대표적 선교사로 손꼽힌다. 한국인과 진정한 친구가 되어 복음을 전한 선교사로 기억되고 있는 것이다. 그녀의 선교 활동은 책 《에이미 스키너와 통영》으로 편찬되어 전해지고 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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