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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무화과 Sep 12. 2023

해수

해수를 죽이기로 했다. 소복이 눈이 쌓인 그날 밤에, 매섭게 바람이 부는 그 겨울밤에, 

소영은 해수를 죽이기로 결심했다.

그날 하얗게 쌓인 눈 위로 붉은 피가 물감처럼 퍼져나갔다. 스치기만 해도 베여 상처를 내던 날카로운 칼 날이 무뎌질 때까지 소영은 해수를 수십 번, 수백 번, 내리꽂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해수의 피로 빨갛게 물들었던 눈 위로 다시 눈이 쌓여 연한 분홍빛처럼 보였다. 

소영은 해수를 찌르며 그 간의 기억들을 곱씹었다, 소영을 바라보던 해수의 눈 빛, 표정, 목소리의 높낮이까지 수십 번, 수백 번 내리꽂으며 수십 번 수백 번 곱씹었다. 해수의 숨이 멎었을 때 소영은 이제 모두 끝났다며 작게 중얼거리다 이내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이제는 차가워져 축 처진 해수의 몸 위에 얼굴을 파묻었다.


" 전부 네 잘못이야 " 

이제는 들을 수 없는 해수에게 소영은 말했다. 모두 네 잘못이라고, 네가 문제였다고. 

" 이젠 정말 끝이네, 진짜 죽고싶다. " 

늘 죽고 싶어 하던 사람은 소영이었다, 다만 눈 앞에 죽어있는 사람은 소영이 아닌 해수였다. 죽고 싶어 하는 소영의 옆에 있던 사람도 언제나 해수였다. 소영은 해수의 손을 잡고 있을 때에도 늘 죽고 싶다고 생각했다. 

" 그래, 해수야 다 네가 이렇게 만든 거야 "

소영은 더 이상 어떤 미동조차 않는 해수의 심장에 귀를 기울이다 이내 얼굴을 더 파묻었다. 차가워진 해수의 손을 자신의 손과 마주 잡아 깍지 끼었다가 깍지 낀 손을 꽈악 쥐었다가 이내 다시 손을 풀었다가 다시 꽈악 쥐었다. 소영은 불안하고 초조해 보였다. 소영은 이내 벌떡 고개를 들어 차가워진 해수를 바라보다 분홍빛으로 변해버린 눈 밭에 얼굴을 ‘퍽’ 소리가 나게 처박았다.



몇 번을 더 소리가 나게 얼굴을 꽂아내리다 이내 눈 밭에 얼굴을 한동안 가만히 처박고 있었다.


눈을 감고 있어도 해수의 얼굴이 그려졌다. 
해수는, 소영의 손을 잡고 걸을 때면 소영에게 사소한 이야기들을 해주었다. 그 사소한 이야기들은 사실 궁금하지 않았다. 그냥 신난 해수의 목소리를 기억할 뿐이었다. 

처박았던 얼굴의 감각이 이내 따갑고 아파질 즈음에 소영은 얼굴을 들었다. 소영은 죽어버린 해수를 한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내 일어나 커다란 삽을 들고 왔다. 멈추지 않고 매섭게 내리는 눈 덕분에 죽어버린 해수의 위로 눈이 꽤나 쌓여있었다. 소영은 삽으로 눈을 퍼 해수의 위에 쌓아 해수를 묻기 시작했다. 고요한 적막 속에 삽으로 눈을 퍼담는 소리만 울려 퍼졌다.


눈을 퍼담는 서걱거리는 소리 속에도 해수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바보같고 사랑스러운 그 애의 목소리. 소영은 해수의 이야기를 듣는 것을, 아니 해수의 이야기가 아닌 해수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를 곱씹는 것이 즐거웠다. 아우트라인 쌍꺼풀, 그리고 의외로 긴 속눈썹. 웃을 때 손톱 달처럼 휘어버리는 눈. 밝은 갈색 눈동자, 작은 콧구멍 입술의 점까지 해수를 하나하나 뜯어보며 곱씹는 것이 즐거웠다. 해수처럼 생긴 사람은 세상에 또 없을 것 같았다. 그 얼굴은 어느 구석을 뜯어보아도 어여쁘지 않은 구석이 없는 얼굴이었다. 

소영은 해수가 바보 같다고 생각했다.  그냥 바보 같은 말만 하는 바보 같은 해수, 목소리도 그리고 웃는

것도 바보 같았다. 바보 같은 해수. 그런 바보 같은 해수를 곱씹는 자신, 사실 진짜 바보는 자신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떨쳐낼 수 없었다.


해수와 술을 먹는 순간들은 재밌었다. 흥미없는 얘기들만 하는 해수, 하지만 해수의 얼굴은 흥이 돋을 수밖에 없는 얼굴이었다. 소영은 해수의 얼굴이 곧 술안주라고 생각했다. 

소영이 빈 잔에 술을 채우려 병을 잡았을 때 해수의 손이 소영의 손에 닿았다, 소영은 깜짝 놀라 술잔을 엎었다. 소영이 당황해하고 있는 와중에도 바보 같은 해수는 냅킨을 잔뜩 꺼내 소영에 옷에 묻은 술을 닦아주고 있었다. 술을 닦아주면서도 뭐가 좋은 걸까 싱글벙글 웃고 있었다.

" 해수야 "


대답없이 웃으며 바라보는 해수가 기분 나빴다.  

저 어여쁜 갈색눈동자의 시선의 끝이 자신이라는 사실이 소영의 가슴을 뒤틀리게 만들었다.

" 왜 실실 웃고 난리야? "


해수는 대답도 없이 바보같이 웃어보이다 소영의 옷을 닦은 후 다시 자리로 가 의자를 끌어 앉았다. 싱글벙글 웃고 있는 해수를 보며 소영은 생각했다. 쟤는 왜 저럴까? 쟤는 왜 맨날 저렇게 기분이 좋지? 왜 저렇게 웃지? 소영은 걱정 없어 보이는 저 웃음이 기분을 잡치게 만들었다. 

눈이 내리는 날씨임에도 불구하고 해수는 소영을 집 앞까지 데려다주곤 했다. 정반대 방향임에도 불구하고 집에 들어갈 때에 해수는 늘 집 앞까지 소영을 데려다줬다. 

" 해수야 넌 왜 맨날 우리 집까지 왔다가 가? " 

" 그냥, 집 갈 때까지 더 얘기할 수 있잖아 " 

모든 사람에게 이토록 다정한 건지, 자신이 특별한 건지 묻고 싶은 맘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소영은 그 물음을 꾹꾹 눌러 담았다, 소영은 답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해수가 모든 이에게 이런 다정함을 보이는 사람이고, 다 알고 있지만 해수의 입을 통해 물음의 답을 듣는다면 그 또한 견딜 수 없을 것 같다고 느꼈다.


소영은 자신을 데려다주고 돌아가는 해수의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바보 같은 해수의 돌아가는 뒷모습을 처음으로 보고 싶어졌다, 소영은 계단 창가에 서 돌아가는 해수를 바라봤다. 

해수는 걸어가다 이내 돌아봐 창가 쪽에 있는 소영을 바라보곤 손을 크게 흔들었다. 소영은 그런 해수를 바라보다 같이 손을 흔들었다, 들어가라고 손짓하는 해수. 소영을 바라보며 손을 흔들어대며 위험하게 뒤로 걷는 해수를 보고 있자니 당장 전화를 걸어 언제나 오늘처럼 나를 데려다주고 이따금씩 뒤돌아봤는지 묻고 싶은 충동이 들었지만, 자신에게만 주는 특별한 다정함이 아닌 오늘만 어쩌다 생긴 우연이라는 것을 알고 있어 묻지 못했다. 

잠시 눈을 감고 해수를 곱씹었다
해수의 입술, 기다란 손가락 끝, 해수의 음성, 기억을 되세길 수 있는 것은 모조리 끌어모아 기억에 담았다.


속이 울렁거리고 토가 나올 것 같았다. 소영은 울렁거리는 마음을 애써 누르며 창 밖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해수가 소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창가를 보니 눈이 소복이 쌓여있었다. 계단에서도 찬 바람에 입김이 나왔다. 울렁거리고 답답한 마음에 소영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바보같이 웃고 있는 해수, 해수가 여전히 소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해수를 바라보고 있자니 숨을 제대로 쉬기도 힘들었다. 소영은 더 이상 참을 수도, 더 이상 견딜 수도 없었다. 소영은 바보같이 서 있는 해수에게 전속력으로 달려갔다.


해수의 앞에 선 소영은, 해수를 바라보는 순간 결심했다. 

소복이 눈이 쌓인 그날 밤에, 매섭게 바람이 부는 그 겨울밤에, 해수를 죽이기로.

자꾸만 나타나는 해수를, 자꾸만 속이 울렁거리게 만드는 해수를, 그 다정함이 죄인 줄도 모르고 바보같이 웃으며 속이 뒤틀리게 만드는 해수를 죽여야겠다고 결심했다.


소영은 더 이상 의미 없는 다정함을 견딜 수가 없었다. 소영은 해수의 의미 없는 다정함이 언젠가 소영을 덮쳐 갉아먹을 것을 알고 있었다. 지독한 다정함의 감겨 질식하여 숨도 쉬지 못하고 죽을 바엔 이번에는 꼭 그를 죽여버리리라 결심했다. 

칼 날이 무뎌질 때까지 해수를 몇 번이고 찔렀다. 미동도 없는 해수, 바보 같은 해수, 전부 다 해수의 잘못이라고 생각했다. 의미 없는 다정함의 끝은 이런 거라고, 너의 다정함은 죄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이미 해수가 죽어버려 알려줄 수 없었다. 죽어버린 해수에게 사랑한다고 말하고 싶었다.


소영을 바라보던 그 갈색 눈동자는 이제 잿빛이 되고, 소영의 음성을 정성스레 담아주던 그 귓가에 어떤 말을 속삭이던 간에 이젠 담을 수가 없었다.


무엇도 담지 못하는 귓가에 사랑한다는 말을 속삭여보아야 무슨 소용이 있을까 라고 생각했다. 

소영은 눈 속에 파묻혀 덩그러니 매섭게 내리는 눈을 맞고 서있었다. 한참을 그렇게 서 멍하니 내리는 눈을 바라봤다. 주머니 속에서 진동이 울렸다.


" 여보세요? "


해수의 전화였다, 다정한 음성으로 해수는 소영에게 언제나처럼 물었다.


“ 잘 들어갔어? ” 

소영은 흐르는 눈물을 손등으로 우악스럽게 닦아냈다. 울고 있는 것을 들키면 해수는 그런 소영을 달래러 달려올 사람이기에, 소영은 그 다정함을 버틸 수 없기 때문에 모든 감정들을 꾹꾹 눌러 담고 해수에게 차분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 잘거니까 끊어 ” 

바보같은 해수


눈 속에 처박혀 피를 흘리고 있던 해수는 온 대 간 대 없이 사라지고 바보 같고 다정한 해수가 전화를 걸어 말을 걸고 있었다.


" 해수야 "


" 응, 소영아 "


" 지금 어디야? "


" 나 집 도착했어 "


“ 해수는 집에 갔구나, 그래서 해수가 내 앞에 없구나. ”


소영은 몇 번이나 해수를 죽였지만, 해수는 집에 간다. 해수는 늘 이렇게 다시 되살아난다. 이번엔 꼭 죽이겠다 결심했지만 그 결심이 무색하게 다시 살아났다. 해수의 다정함은 소영에게서 몇 번이나 해수를 죽이게 만들었지만 다시 살아나게 만들었다. 

이 지독한 죽음의 끝은 언제일까, 소영의 마음은 소영의 것이 아니었다. 너무나도 유약한 마음이라 해수를 죽일 수가 없었다. 해수를 좋아하지 않겠노라며 다짐하며 해수를 몇 번이고 죽여도, 해수는 몇 번이고 다시 살아난다. 소영의

마음속에서 해수는 죽지않는다.


소영은 너무 잘 알고 있었다. 너무나도 유약한 자신을, 유약하기 짝이 없는 자신의 마음. 언제나 해수의 다정함에 휩쓸려 허우적거리는 자신, 그 다정함 때문에 자신의 마음은 제 것이 아닌 해수의 것이다. 지독한 다정함의 네가 살아난다면 나는 그 의미 없는 다정함에 너를 몇 번이고 죽이겠다고. 사랑이 아닌 동정과 연민으로 가득한 마음은 결국 소영, 자신을 죽일 테니 소영은 다시 살아난 해수를 몇 번이고 죽이겠다고 다짐했다.


나는 죽어버린 해수일지라도, 사랑한다는 말을 할 수 없기에 이 지독하고 지긋지긋한 마음 속의 죽음이 끝을 볼 때까지 해수를 죽일 수 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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