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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혜진 Jean Seo Nov 02. 2023

마더링.. 결론요?

브런치 스토리에 글을 쓴 지 두 달이 안되어서, 출판사로부터 ‘출간제의’를 받았다. 내가 쓴 마더링에 대한 글들에 대한 관심에 나는 우선 고마웠다. 실무진을 만나고, 2차로 출간 결정을 위해 임원면접을 했다. 내가 받은 질문들 중 기억에 나는 것은, ‘그래서 마더링을 어떻게 하라는 거냐?’였다. 결론적인 해결책을 묻는 말이었다. ‘이게 한국적 사고구나’라는 생각이 바로 머리를 스쳤다. ‘저도 사실은 영국에서 박사 과정 때 제일 먼저 깨어야 하는 선입견 중 하나가, 마더링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는 것이었어요.’라고 말을 시작했다. 처음엔 나도 무언가 해결책을 ‘짠’하고 제시하고, ‘나를 따르시오’라고 할 것이라는 생각에서 출발했다. 당연히 넘치는 교육학과 사회과학 분야의 여러 논문들을 통해 내가 그동안 ‘옳다’고 믿고 있었던 솔루션을 증명(?) 할 것들을 탐색했다. (나와 같은 생각을 증명한 논문들도 넘치게 많이 있어서 고무된 적도 많았긴 했었다)

 





논문 계획서를 제출한 후, Viva-Voce (비바-보체: 특히 영국 대학에서의 구두시험) 때, 나에게 교수는 ‘너는 한국 엄마들의 마더링을 “judge”(판단[비평, 평가]하다)하려는 것이냐?’라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냈었다. 마치, ‘네가 뭔데 남의 집 마더링을 판단하는가?’라는 듯 한 태도에 나는 나의 논거를 대는 데에 진땀을 뺐었던 기억이 있다. 결국, 철저히 다른 그들의 사고에 나는 논문의 방향을 180도 바꿔야만 했었다. (UCL은 ‘교육학’으로 10여 년 이상을 전 세계 1위를 차지한 영국의 명문 대학인데, 내가 논문제안서 구술심사를 받았던 이 교수들은 '마더링'과 '교육' 분야에서 그 중심에 있다고 할만한 저명한 석학들이었다) 결국 연구의 목적은 어느 한 사회를, 그리고 그 사회와 문화 속에 있는 특정 집단을, 그리고 그 안에서 관찰되는 개인의 삶과 'context' (맥락, 배경, 상황)를 ‘묘사’하는 것이고, 그것을 학문적 논지를 가지고 ‘narrative' (사실, 경험에 입각한 이야기, 담화)하는 것이었다. (그러고 보면, 결론 자체가 없는 게 정상 아닌가? 사회에 ‘이렇게도 생각해 보자’를 던지는 것이 교육학과 사회과학 연구라는 생각이다.)

 





지금 생각하면, 많이 오그라들지만 사실 그랬다. 맨 처음 교육학 박사과정에 합격한 후, 나는 적잖이 고무되어 있었다. ‘그렇지 드디어 기회가 왔군. 이제 엄마들한테 좀 쓴소리 좀 해야겠는 걸’이라는 되지도 않을 야심(?)으로 시작한 것이 나의 첫 논문의 시발점이었다. 사실, 사교육 현장에서 만난 많은 엄마들에게 많은 사교육 선생님들이 느끼는 것처럼, 나도 적잖이 분노(?)하고 애들이 불쌍하다고 느끼게 만드는, 소위 ‘진상’ 엄마들도 많이 만나보았다. (‘진상 엄마’의 기준은 물론 개인별로 규정하는 것이 다양하겠지만, 내가 규정하는 ‘진상’ 엄마는 사교육이니까, ‘돈을 지불했으니까’라는 걸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내는 부류를 말한다) 정말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는 엄마들도 많다. 그리고 나 또한 누군가에게는 ‘진상’ 엄마로 비쳤을 것이라는 오글거리는 경험이 없지 않다. 사교육 선생님에게 ‘우리 애한테 ㅇㅇㅇ를 해줘라’, ‘ㅇㅇㅇ를 해놔라’, ‘ㅇㅇㅇ는 왜 안 해주냐’…등등 본인 집안의 ‘집사’인 양 대하는 엄마들이 생각보다 많다.




사실, 요즘에는 공교육 선생님에게도 이렇게 해대는(?) 엄마들이 많아지는 듯한 것을 보면, 뭔가의 공통된 한국 엄마들 만의 ‘괴로움’이 있긴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아이러니한 것은 정작 자신의 자녀에게는 아무 말도 못 하고 절절맨다는 점이었다. 도대체 아이에게 ‘권위’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엄마들도 상당히 많다. 선생님 앞에서 엄마에게 마치 ‘집사’를 대하듯이 짜증을 보란 듯이 내는 아이들도 상당하다. 그 옆에는 선생들한테 그렇게 위엄이 당당하던 엄마의 모습은 온데간데없는 엄마가 어쩔 줄 몰라하며 서있곤 한다. 흔하게 볼 수 있는 우리네 엄마들의 모습이다.

 





반면, 그다지 풍요로워 보이지도 않고, 요란한 마더링을 하지도 않는데 (이런 엄마들은 사교육도 정말 꼭 필요한 한, 두 개만 하는 경우가 많다) 말씨와 행동에 ‘생기(?) 있는 기품’이 있는 엄마들도 생각보다 많다. ‘이 엄마는 무슨 일을 하지? 전업주부인가? 아니면, 자기 일이 있나?’라는 궁금증을 일으키는 장본인들의 자녀들은 하나같이 ‘괜찮은’ 아이들이어서 '역시나'하며, 마더링의 영향력을 실감하곤 한다. 그런 엄마들이 모두 ‘전업주부’이거나, ‘워킹맘’이거나 하는 식의 '이분법'으로 나누기에는 너무 예외적인 경우가 많아서 별반 공식(?)을 만들기도 어렵다. 그리고 이런 엄마들의 모든 자녀들이 다 공부를 잘하는 아이들이지도 않다. 소위, ‘괜찮은’ 아이들의 공통점은 아이들이 소위, “고아한” 품격이 있다. 너무 환하다. ‘빛의 자녀’ 같은 끌림이 있다. 정갈하고, 공부를 잘하든 못하든 아이들이 당당하고 스스럼이 없다. 이에 걸맞게, 힘들 수험생 시절에도 그냥 나름 잘해나간다. 엄마와 관계가 좋은 것은 ‘디폴트’ 값이다. 왠지 ‘기운이 좋은’ 이런 아이들은 아무리 사교육 선생님이라고 하더라도 잘되게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뽀글뽀글’ 샘솟는다. 그리고 많은 경우에 이런 아이들은 스스로의 삶에서 앞으로 나아가는 힘이 있다.

 





‘교육’을 통해 본 이 시대의 엄마들(특별히, 전업주부들)의 ‘마더링’은 기혼 여성에 대한 전통적인 역할에 대한 기대가 자녀의 대학입시라는 교육적 성과를 위해 분투하는 ‘인텐시브마더링’의 형태로 나타났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교육(특별히 사교육)과 관련한 사회문제에는 엄마와 자녀 모두의 정신적 건강 문제 및 그 결과적 세대 간 갈등관계와 한국 사회에서 여성의 다양한 ‘역할론’을 반영했다. 그리고 이러한 '역할론'은 전업주부이거나, 워킹맘이거나 모두에게 무거운 존재감을 드러낸다. 한국은 엄마들이 추구하고 싶은 ‘정체성’이 자녀의 ‘교육적 성과-대학입시’를 위한 마더링에 그대로 투영되기가 너무 쉬운 교육환경이다. 대학 입시로 모든 것이 결정되어 버리는 '단선적' 인생관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이러한 영향력은 대대로 전수된다. 그럼에도 마더링에 대한 하나의 공식을 말하라고 한다면, 마더링과 엄마의 삶에 대한 ‘이분법을 제거하라’라고 말하고 싶다. 마더링을 ‘자녀를 양육하는 것’, ‘자녀를 위해 엄마가 희생하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오류의 출발점이었다는 생각이 나의 결론이다.

 




자녀를 마더링하는 것은 평생토록 해야 할 과업이다. 이러한 생각의 근거는 인생은 성숙을 향해 하루하루 단단해져 가는 과정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나 자신의 인생처럼 함께 기뻐하고, 함께 슬퍼하는 것이 '엄마'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건강하고 넓은 마음의 엄마'를 가진 자녀는 그 무엇으로도 바꿀 수 없는 ‘보물’을 가진 자녀일 것이다. 70을 바라보는 노년의 자녀에게도 ‘엄마’는 있다. 그들이 기대고, 마음을 쏟아놓을 수 있는 존재로 그렇게 엄마는 옆에 있고 싶다. 어느새 한국도, 함께 나이가 들어가는 90세 이상의 엄마와 70세를 바라보는 노년의 자녀세대를 흔하게 볼 수 있는 고령화시대이다. 나이가 들어도 나만의 속내를 털어놓는 존재로서, 이러한 깊은 대화가 가능한 엄마와 자녀가 있다면, 그것만으로 그 노년은 행복하다.






마치 18세의 대학입시가 끝나면 모든 마더링이 끝나는 것 같은 '단선적', 그리고 '이분법적' 마더링에 대한 편견을 버리는 것부터 시작해 보는 게 어떨까? 이를 위해서는, '공부'와 '비교'로 찌들어 있는 중, 고등학교 시절의 자녀와 쌓아 가는 깊은 '관계성'이 무엇보다 소중하다. 그 '관계성'이 잘 보존되어야 자녀가 '안정감'을 가지고 공부에 매진할 수 있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진리'라는 걸 어느 엄마가 부인할 수 있을까? 물론, 한국 사회에서는 우리 엄마들이 좀 더 여유를 가지고 자녀를 바라볼 수 있는 '쉬운 교육'과 '쉬운 마더링'이 언제나 아쉽다. 이런저런 생각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여전히 우리 엄마들은 자녀의 오늘을 마더링하고 내일을 꿈꿔야 한다. 그래서 더욱 무언가의 '공식'과 솔루션에 목마르다. 현명한 마더링은 그래서 세상을 탓하며 포기하지도 말아야 하지 않을까?   





Howard Zinn (하워드 진)의 말을 빌리면,


"중요한 것은 이름 없는 사람들이 행한 무수히 많은 작은 행동이며, 바로 이런 사람들이 역사에 기입되는 중요한 사건들의 토대를 놓았다. 이 사람들이야말로 과거에 많은 일을 했으며, 미래에도 많은 일을 해야 한다.”

("What matters is the myriad of small actions performed by nameless men, and it is these very people who have laid the foundation for the important events that are incorporated into history. These people have done a lot in the past, and they have to do a lot of things in the future.")






나를 포함한, 우리 엄마들도 그냥 한 ‘이름 없는 사람들’ (nameless men) 중 하나다. 그리고, 엄청난 사회저명인사가 되어도 유구한 역사에서 본다면, 그저 작은 변화를 위한 씨앗을 뿌리는 일을 했기 때문에 기록에 (그리고, 기억에) 남는 경우일 것이다. 그래서 더욱, 우리 평범한 엄마들이 엄마의 일생을 ‘이름 없는 위대한 사람들’의 반열로 생각하며, 엄마 자신의 삶에 충실한 일생으로 살아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마더링이 바로 그 엄마의 일생의 궤적 위에 있는 - 엄마의 인생과 마더링을 나누는 이분법이 아닌 - 한 시기로 여기는 생각의 전환이 ‘찐 마더링 (Authentic mothering)’이 되는 첫걸음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리고, 청소년 자녀와 (심지어 '공부'에 대해서도) 속내를 드러내는 교제를 나눌 수 있는 '찐'(Authentic: 진정에서 우러난) 마더링 외에 이 과업을 이룰 수 있는 길은 없다는 것은 분명한 듯하다.



사진: Unsplash의 Despina Gala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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