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절이 너무해!
90년대 일이에요.
아! 기다리고 기다리던 휴일.
한 해 가고 두 해가 가도 아직 안 가본 곳 천지.
'오늘은 어디를 가 볼까?' 뜻 모아 마음 모아, 도장 깨기에 나선, 대학 동기에서 직장 동기가 된 3인방,
낯선 도시 탐방을 끝내고 자취방으로 가는 버스를 탔답니다.
여름은 아니었는데 그날 좀 무더웠던 것 같아요.
너도나도 긴소매를 걷어 올리거나 연신 손부채를 부쳤거던요.
버스 안은 적당히 붐비는 정도였어요.
갈 길이 먼 우리는 뒤쪽으로 깊숙이 파고 들어갔죠.
청춘 남녀 한쌍이 자리에 나란히 앉아 정답게 얘길 나누고 있었어요.
들리는 말로 보아 대학 동아리 선후배인 듯했어요.
남학생은 창쪽, 여학생은 안쪽.
쉬지 않고 오고 가는 대화가 꽤나 달달했어요.
'썸을 타나? 좋을 때다!' 했지요.
그들과 우리가 눈이 마주쳤을까요?
갑자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그녀가 말이죠.
나를 콕 집어 "여기 앉으세요" 하는 거예요.
"엥?" 흠칫 놀랐죠.
'내가 너무 지쳐 보였나' 그렇다고 자리까지 양보받을 정도는 아닌데 싶어
"왜요?" 했어요.
보통은 '괜찮아요' 하면서 한두 번 실랑이하다 서너 번째쯤 '고마워요!' 하면서 어물적 자리에 앉겠죠.
근데 제가 '당신이 나에게 자리를 양보하는 이유가 궁금해?'라고 했으니,
돌아온 답이 예상 밖이었을까요?
그녀가 살짝 당황하는 것 같아 보였어요.
근데 말이죠.
오답을 들은 그녀가 말이죠.
대뜸 "임신하셨잖아요?" 하는 거예요.
"엥?"
동공에 지진이 일어나더라고요.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어요.
옆에 섰던 친구,
"뭔 소리예요? 아직 결혼도 안 한 처녀구만" 했어요.
"으흐흐흐흐 으흐흐흐흐" 웃어도 웃는 게 아니었어요.
친절이 너무 앞서 간 그녀,
연신 고개를 숙이며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 죄송합니다!"를 남발했어요.
이쯤 되면 서로 낯부끄러워 말도 섞지 않겠지만 제가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가 없더라고요.
어딜 봐서 임산부처럼 보였을까 싶어, 힘이 잔뜩 들어간 배를 쑥 들이대며 어금니 꽉 깨물고
"제가 배가 나왔나요?"라고 물었죠.
그녀가 "아뇨 아뇨, 그게 그게 아니고요" 하면서 손사래를 사정없이 치더군요.
그러면서 하는 말이 "옷이~ 옷이, 임부~ 임부..." 말을 맺지 못했어요.
하~ 참!
기가 차고 코가 차서.
이래 봬도 제가 패셔니스타라고 불렸거든요.
하 하 하~ 참!
옆 트임에 종아리까지 내려왔던 베이지색 긴 상의룩.
'이 옷이 어딜 봐서 임부복이란 말인가?'
'당장 벨트 하나 사서 허리를 졸라매든지 해야지'
'흑흑 흑흑'
여유만만했던 패션, 망신살만 오지게 덮여 썼네요.
오늘 보니 참 어쭙잖네요.
옷잘알은 무슨.
그녀가 충분히 오해할 만했어요.
더 웃긴 건 말이죠.
제가 막상 우리 아이들을 가졌을 때는 자리를 양보받아 본 적이 없다는 거예요.
그날 이후 친절한 그녀가 종적을 감춘 건지........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가 종종 왕왕 있어요.
버스를 타도 전철을 타도 폰 삼매경에 빠져있는 그와 그녀들,
제가 뭘 입고 있던 거들떠도 안 봐요.
안물안궁 사이인 거죠.
옷깃만 스쳐도 인연이라는데,
마주 보고 있어도 오가는 눈빛 없는 지하철에서,
저 혼자만 멀뚱멀뚱, 군중 속에 고독, 뭐 그런 것 있잖아요.
분홍 자리에 앉아있는 그는 좀 그래요.
노랑 자린 '아직은 아니지'라며 쓱 비켜가요.
'넘어지면 큰일'이라 내릴 때까지 손잡이를 꽉 잡고 있어요.
이리 흔들 저리 흔들 버스 안,
가끔씩
"여기 앉으세요" 하던
그녀가 그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