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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엔 산 타

산이 부른다

by 이미경



머나먼 동굴을 찾아서


11월 15일 토요일.


"길이 없다 카이. 마 말어라."

이고집을 누가 꺾으랴.

아버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길을 나섰다.

사람의 발길이 끊긴 지가 몇몇 해더냐?

엄마랑 언니랑 수연산에 올라 산나물 뜯던 해가 까마득하다.

그산에 산골짜기 계곡물이 졸졸졸 흘러 흘러 토끼가 세수하러 나오던 옹달샘이 있었다.

정침터에서 밭일하다 양은 주전자를 들고 쫄랑쫄랑 올라가 샘물을 길어왔었다.

정월 대보름날에는 바위 밑에 촛불 켜고 용왕먹이기를 했었다.

거기서 더 위로 물감나무 지나서 올라가면 장정 두서너 명이 들어갈 수 있는 동굴이 있단 소릴 듣고

가만히 있을 수가 있어야지.

엉덩이가 들썩들썩.

당장 가보고 싶었지만 여름에는 풀이 짙어 안 된다고 하여 잎이 잦아들기 시작하는 11월이 되도록 기다렸다.

나의 흥미진진한 계획을 듣고 아들이 유쾌히 따라나섰다.

셋째 언니까지 합류하여 동굴 탐험 원정대가 급하게 꾸려졌다.



"우리 진지소로 해서 갈까?"

"그러자. 오랜만에 돌다리도 건너 보고"

징검다리 건너 산비탈 오솔길을 올랐다.

시작부터 숨이 가파르다.

들숨 날숨 쌕쌕.

지난봄까지만 해도 길이 뽀얗게 잘 보였었는데...

도둑가시가 사정없이 할퀴어 들었다.

길을 잘못 선택하였다.

숨이 헐떡 벌떡.

당기고, 밀치고, 가로막고.

그 참! 환영인사 한 번 격하다.

옷에 달라붙은 초목인사들을 간신히 떼어내고 농로로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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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게 오셨는감요?"

"옛 생각에 추억 따라왔어요."

호젓한 산속에 어울리지 않는 주식 관련 라디오 방송을 귀청 사납게 틀어놓고 세월을 낚고 있는 산사 초인,

탐험대의 발길을 멈춰 세우고 불심검문을 한다.


이 산중에 사람 소리라니.

나도 놀라고 그도 놀랐으리라.

"그 짝 위로는 길이 없는디~?"

"있는 데까지 가보려고요."

미심쩍어하는 표정이 등짝에 길게 따라붙었다.

한 굽이 치자마자 시멘트로 포장된 길이 뚝 끊기고 무성히 자란 잡목이 버티고 섰다.

옛길이 있으려나?

덩굴을 헤쳐보던 언니, 길이 보인다 하였다.

길이라 하니 길인 거지, 어디가 어딘지 도통 모르겠었다.

아스팔트 사나이, 도대체 길이 어디 있다고, 길 맞냐고 자꾸 되물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무작정 올랐다.

아들아, 내 가는 길이 곧 길이다. 잠자코 따라오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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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감나무를 발견했다.

그냥 지나칠 뻔했다.

얼마나 높이 자랐는지 둥치만 보곤 알 수 없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한숨 돌리며 섰는데,

하늘에 드리운 오밀조밀 그물망 사이로 곱디고운 주홍빛깔이 눈에 확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제대로 찾아왔긴 왔는가 보다.

언니가 카메라로 당겨 보더니 물감이 맞다 하였다.

그렇다면 여기서 멀지 않다는 것인데...

조금만 더 가 보자.

감나무 아래, 언니와 아들을 보초 세워두고 혼자 산을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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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굴아, 제발 나와라.

저긴가?

아니네.

저긴가?

헛물켜기를 여러 번.

멀리서 보면 '옳거니 저기겠구나' 싶었는데,

가까이 가 보면 내 한 몸 들어갈 자리도 안 되었다.

바싹바싹 바짝바짝 속 타 들어가는 소리, 발길에 차였다.

그 와중에 갈비가 지천이라 눈독을 들이니,

상수리나무, 꿀밤을 툭 먹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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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여?

안~ 보여.

외마디 소리가 고요한 산을 쩌렁쩌렁 울렸다.

3시가 넘자 해거름이 끼기 시작했다.

엄마~

미경아~

보초병들, 범 보다 더 무서운 어둑살이 내려온다고 이제 그만 돌아가자고 재촉하였다.

부스락 소릴 듣고 멧돼지가 나타나면 큰일이긴 하다.

아쉽게 발길을 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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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려올 때는 계곡을 따라 걸었다.

여름에 콸콸콸 흐르던 물줄기 땅속으로 숨어들었는지 길이 메말라 있었다.

"동아줄이다"

해와 달이 된 오누이가 이걸 타고 올라간 게야?

하늘로 향해 자란, 끝이 보이지 않는 나뭇가지를 잡고 흔들흔들.

소원을 쏘아 올렸다.

이곳에서 나고 자랐음에도 사방천지 신기한 거 투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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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운 고목 아래를 지나다 아들이 주르륵 미끄럼을 탔다.

순간 죽는 줄 알았다는 아들,

툭툭 털고 일어나더니 완전 익스트림 스포츠다 하였다.

휴우~!

땅에 떨어진 간을 주워 제자리에 맞춰 끼우고 다시 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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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비된 수로가 나타났다.

탄탄대로다.


휘모리 바람에 떼를 지어 구르는 낙엽.

발아래 가을이 사부작사부작.

발아래 가을이 사그락사그락.


가을엔 산 타!

멀리 갈 것도 없이,

내 고향에서 즐긴 만추, 이 맛에 산을 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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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에 올라


11월 16일 일요일.


9시 10분 전.

아침 설거지 막바지에 이를 즈음,

아버지, 부엌에 들어와 소쿠리와 칼을 두어 자루 챙기신다.

아버지, 뭘 하시려고요?

산에 염소 밥 주고 밭에 가서 나물 뜯어 오게.

저희랑 같이 가야지예.

커피 한 잔 하고 가입시더.


내 커피잔 커피 아직 반도 더 남았는데,

아버지, 벌써 경운기 시동을 걸어놓으셨다.

꾸물되었다간 차 떠난다.

남은 커피 한 모금에 털어 넣고 황급히 일어섰다.


강 건너 경운기 소리, 밥때를 알렸으리라.

염소가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매에~ 매에~ 매에~

한 달 새 쑴풍 자랐다.

2마리는 새끼를 배어다 하였다.

고종감, 누렁덩이 호박 잘게 썰고 사료 한 됫박 덜어 아침 식사를 차렸다.

야물야물, 우물우물 잘도 먹는다.


시간이 금.

바위 타기 - 나물 뜯기 - 점심 먹고 나오기.

오늘 계획된 일을 다 수행하려면 1초라도 미적거릴 여가 없었다.

밥상머리에서 시간을 쪼갰다.

"아버지, 저희는 약물바위랑 해서 한 바퀴 치고 올게요."

"그래라. 막사 옆으로 해서 길 닦아놨다. 가면 보일 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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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탄 바위는 아랫머리 그냥 바위.

다른 길로 간 언니가 먼저 올라 불렸다.

언니야, 어떻게 올라갔어?

이쪽으로 돌아서 오면 쉽게 오를 수 있어.

와~ 염소가 여기도 올라왔었나 봐.

염소똥이 가득하다야.

해우소인 거야.

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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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이것 똥이야?"

염소똥을 본 적 없는 도시 촌놈,

똥밭에 앉았다가,

오고 가는 똥 얘기에 그제야 눈치를 긁고 손을 털어 되었다.

동글동글 반짝반짝한 것이 마치 흑진주알 같다.

앞으로 이것이 돌산 밤밭을 기름지게 할 터.

자연의 선순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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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 그게 어떻게 가능해?"

네 발로 기어오르던 아들, 비스듬히 경사진 바위를 두 발로 저벅저벅 걸어 다니는 나를 신기해하였다.

다리에 힘 팍 주고 천천히 일어서 봐.

그러면 발이 바위에 착 달라붙을 거야.

무섭다던 아들, 선다 선다 섰다.

그 봐, 되잖아.

"두려움만 이겨내면 뭐든지 할 수 있지."

아들, 출세했다.

어디서 이런 체험을 다 해 보겠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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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너럭바위를 탔다.

이 바위 오르기는 완전 껌이다.

동네가 한눈에 훤히 들어오는 명당 바위.

"우와! 나무 자란 것 좀 봐"

"이야! 어마무시하게 자랐네"

이모와 조카, 언니와 아들이 나란히 섰다.

그림이 나온다.

"나, 여기서 수문이랑 하늘 보며 마을 구경하며 놀았었는데..."

추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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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세기를 지나 오늘에야 찾았다.

그리움이 때 묻던 그 자리에 앉았다.

발아래 산해 만리,

칡넝쿨이 탁 트였던 시야를 가려 못내 아쉬움이 있었어도

수수 만 년 말없이 지켜 온 바위의 아름다움은 그지없었다.

"아~ 좋다!"

가을이 내게로 풍덩 안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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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약물바우.

"약물바위는 그냥 가자."

"그래야겠지, 위험해서 안 되겠지?"

언니, 뒤도 안 돌아보고 고사리밭으로 넘어갔다.

우리 둘째 언니는 한 번도 올라본 적 없다는 바위.

약물샘과 소나무를 품은 영험한 바위다.

시간에 쫓기어 다음을 기약했다.


산 타는 여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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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7일


아들, 우리 지난 주말에 정말 잘 다녀온 것 같아.

하루 사이에 날 추워진 것 봐 봐.

다음에도 바위 타?


응, 산 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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