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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미경 Oct 04. 2023

특명! 대추를 털어라

대추 보고 안 먹으면 늙는다

내 고향 가을은 대추가 빨갛게 익어가는 계절이었다.


내가 결혼하고 처음 맞은 추석 차례상에 시퍼런 생대추가 오르길래 의아했었다.

대추 하면 당연 빨강인데 눈길도 주지 않던 퍼런 대추를 조상님께 선 보이다니.......

'그 참 이상하네, 내가 다른 문화권에 있구나'라고 느꼈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살던 고향은 대추 주산지다.

알만한 사람은 다 안다고 

특히나 고향 대추는 껍질이 얇고 속이 꽉 찬 것이 당도도 월등하여 으뜸 중에 으뜸이었다. 

반들반들한 윤이 잘잘 흐르며 빨갛게 약이 오른 생대추를 나무에서 바로 따서 한 입 깨물면 맛이 기가 막혔다. 사과와 배는 명함도 못 내밀 정도로 맛이 가히 일품인지라 

진정한 대추를 먹어 보지 못한 사람과는 그 맛을 논하기가 어렵다.



대추는 추석 전후로 수확한다.

나무에서 빨갛게 약이 오를 대로 오른 대추는 자칫 수확 시기를 놓쳐 버리면 홍시가 되기 십상이다.

그렇다 보니 추석 차례는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이 지내고 오랜만에 모인 친척들 모두 대추 털러 나간다.

밥숟가락 놓기 바쁘게 대추밭으로 향하니 추석은 뒷전이고,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가뜩이나 귀한 일손 본 김에 대추를 터는 셈이다.

추석에는 산과 들에서 대추 터는 장대 소리가 하늘 높이 치솟았다.


아버지가 장대로 타닥타닥 타다다닥 대추를 털면 우둑우둑 우두두둑 우박처럼 대추가 쏟아져 내렸다.

떨어지는 대추에 한 방 맞을까 봐 멀찌감치 서 있다 장대가 한바탕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서 대추를 줍는다. 

퍼 담는다는 말이 더 적절하듯 싶다. 

평지에는 대추잎만 대충 골라내고 두 손으로 쓸 쓸 끌어모아 자루에 퍼 담는다. 

사방팔방으로 날아간 대추는 앞치마를 매고서 구석구석 찾아다니며 줍는다.  

소풍날 보물찾기 하듯 풀잎 사이 돌틈 사이를 샅샅이 뒤져가며 마지막 한 알까지 쫓아가 알뜰하게 줍는다.  

평소에 쓰지 않는 근육을 쓰니 다음날 아침에는 추운 겨울날 얼어붙은 빨래처럼 몸이 뻣뻣해져 

"아이고 다리야, 으흐흐흐 허리야, 아야야야 팔이야"가 입에 줄줄이 달렸다.


밤농사 감농사를 지어도 좋은 물건은 팔아 돈 만든다고 내 입에는 상품이 되지 않는 것만 걸쳤지만, 

대추만큼은 예외였다.

우리 동네에서는 주로 대추를 말려서 팔았기 때문에, 

탱글 탱글한 대추 얼굴이 쭈글이가 되면 그 잘났던 인물이 표가 없어진다. 

하여 가장 예쁘고 탐스런 생대추를 고르고 골라 따 먹는다. 

우리 동네 사람들은 어떤 대추가 맛있는지 딱 보면 안다.

대추 보고 안 먹으면 늙는다는 말이 있기도 하지만, 

빨갛게 약이 제대로 오른 대추를 그냥 지나칠 수도 없거니와 달짝지근한 향내에 안 먹고는 못 배긴다. 

나는 요맘때만 잠깐 맛볼 수 있는 약이 빠짝 오른 생글생글한 생대추만 고집한다.


조상님께 올릴 대추 한두 홉을 골라 따로 모셔 두고,  

아작아작 대추를 씹어 돌리며 오늘 하루 노동으로는 턱도 없는 대추 줍기를 서두른다.

어르신들 말씀에 띠(아기띠)만 떼면 다 대추를 줍는다 할 정도로 대추 수확기에는 온 동네가 난리였다.

고사리 같은 손을  다 끌어 모으고, 지나가다 눈에 띈 사람 다 달라붙어서 일손을 거들어도, 

대추 수확은 보름이상 한 달여 넘게 걸렸다.


아버지는 대추자루를 지게에 져 날랐다. 

리어카가 대어져 있는 강변까지 

겨우 한 사람 지나다닐 수 있는 비탈길을 수백 번 아니 수천번을 오르락내리락하셨다.

우리야 대추 한 앞치마를 이고 안고 종종걸음 한 번이었지만, 

그 시절에 아버지는 여섯이나 되는 우리를 공부시키느라 억척스럽게 지게를 지셨다.


대추를 털고 나면 말리는 작업을 해야 한다.

내 고향 가을 논에는 금빛이 넘실 거렸고 강변에는 붉은빛이 출렁거렸다.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평야만큼 너른 강변에 자갈돌을 평평하게 고른 다음 갑바를 펴고서 그날 턴 대추를 널어 말린다.

낮에는 따갑게 내리쬐는 햇볕에 밤에는 따스한 달빛에 몸을 붉게 달구며, 

대추는 한 떨기 남아 있던 푸른 청춘의 빛을 털어낸다. 

오며 가며 까쿠리로 쓱 쓱 긁어 주면, 

앞으로, 뒤로, 옆으로 재주를 넘고 넘으며 대추는 마른 주름을 하나씩 하나씩 새겨나간다.

집마당에도 마루에도 지붕에도 온통 대추가 널려 마을은 대추천지가 되었다. 

자연과 호흡하며 느릿느릿 여물어가는 대추의 달큼한 향내가 온 동네에 진동하였다. 



빠르게 변하는 세상에 적응이 더딘 나는 윙 윙 성가신 소리에 지칠 때면, 

비록 녹초가 되었지만 달큼한 대추향에 꿀잠 자던 그때로 돌아간다.


아버지와 오빠는 장대로 대추 털고

엄마와 큰언니는 언제나 상그라운 곳에서 숨은 대추를 찾고

두 언니들은 한대야 가득 대추가 모이면 자루에 갖다 붓고

나와 동생은 바가지에 한 알 두 알 세어가며 대추 줍던 어느 가을날,

달달구리한 대추와 함께 우리 가족 모두가 붉게 물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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