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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미경 Sep 14. 2023

큰언니의 특별한 택배 상자

마법을 부리는 큰언니의 택배 릴레이는 계속된다.

 "톡* 톡*"

 '미경아, 택배 보냈다.'


 뜨거운 여름 막바지에 폭포수처럼 시원한 알람이 울렸다.

손수 농사지은 채소를 두 번 손질할 것도 없이 다듬어 택배를 부치고서 보낸 큰언니의 문자 메시지다.

"와우!" 환호성을 내지르며, 내 마음은 벌써 현관 앞에 마중 나가 서 있었다.


 다음 날 바깥 볼 일을 보고 돌아오니, 

현관 앞에 '귤로장생'이라는 이름표를 단 박스가 떡하니 버티고서 나를 반겼다.  

낑낑대며 겨우 집 안으로 들여 택배상자를 풀었다.  

대파, 오이, 가지, 호박, 청/홍고추, 호박잎, 양파가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나는 오이 하나를 집어 들어 껍질을 벗기곤 통째로 크게 한입 베어 물었다.  

탱글탱글한 육즙이 입에 촥 감기며 입 안 가득 넘치듯 채워지니, 

벌겋게 달궈진 몸속 열기가 싹 빠져나가는 듯했다.


 곧장 큰언니에게 전화했다.

"언니야, 채소 왔어. 오이가 하나도 안 쓰고 맛있네!" "푸짐하게 많이도 보냈다.  얼마나 반가운지!"

어기적어기적 요리조리 오이를 씹어 돌리며 엉성한 발음으로 택배가 도착했음을 알렸다.

"별 거 아니다.  먹고 남아서 주는 거다"

고맙다는 나의 인사말에 큰언니는 언제나처럼 무덤덤하게 답한다.


 연일 폭염주의보가 쏟아진 가운데 들인 큰언니의 노고를 생각하니 울컥해서 목이 메었다. 

오이를 뽀작뽀작  씹어 넘기며 온몸 구석구석 전해지는 언니의 사랑을 온전히 느껴 본다.


싱그런 오이향이 채 가시기도 전에 내 손은 이내 바빠진다.  

찌고, 썰고, 다지고, 나누며 인사천리로 분주히 움직인다.

먼저, 호박잎은 씻어 찜기에 가지런히 펴 담아 가스불에 올려놓고

가지는 길게 편 썰기 하여 프라이팬에 노릇노릇하게 구워, 양념장 발라 한번 더 구워내고

애호박은 채 썰어, 청홍고추 다져 넣고 계란 하나 툭 깨어 넣어 전 부치고 

풋고추 쫑쫑 다져, 쌀뜨물에 큰언니표 된장 풀어 표고버섯, 양파 두부랑 넣어 보글보글 끓여서

식탁 위에 큰언니의 채소로 탄생한 호박잎찜, 가지얌념구이, 호박전, 된장찌개를 올려 저녁상을 차렸다.

오래간만에 맛보는 건강한 추억의 밥상이다.



 10여 년 전부터 큰언니의 채소 택배 릴레이가 시작되었다.


맨 처음에 언니가 호박, 고추와 함께 배춧잎만 크기의 상추를 한 상자 보냈었다.

그때에도 택배상자를 열자마자, 바로 상추를 씻어 단출한 밥상을 차렸다.  

넙데데한 상추잎을 반으로 툭 분질러 손바닥에 펼쳐 놓고, 그 위에  밥 한 숟가락, 쌈장 한 젓가락 찍어 올려 옹골차게 쌈 싸 먹었다.  밥 한 공기가 순식간에 상추와 함께 사라졌다. 

 상추가 얼마나 부드럽고 아삭하던지 지금 생각해도 달짝지근하면서도 쌉싸름한 맛에 침이 꼴깍 넘어간다. 

 

 보냈다는 말도 없이 배송된 그날의 택배는 축 처지고 허기진 배를 든든하게 채워주었다. 

 큰언니의 상추는 서럽고 막막한 일들로 곤두박질치던 나의 몸과 마음에 온기를 불어넣어 주었다.


 이후 철마다 나오는 농작물을 보내주기에 떨어질락 말락 하면 나는 큰언니의 채소를 오매불망한다.  

시장을 지나다 제철채소를 보고서 '올 때가 되었는데' 하면서 내심 손꼽아 기다린다. 

당장 필요한 것 아니면, 

'조금만 참으면 큰언니의 보약채소 꾸러미가 올 텐데' 하면서 구입을 미루며 발걸음을 돌린다.


 올 3월에는 달래, 쪽파, 대파, 상추에 쑥이 왔었다.  

 갓 땅을 비집고 돋아난 손가락 한마디 길이의 여리고 여린 보드라운 쑥.  

나는 어릴 적부터 좋아했던 쑥국이 그리워 들깻가루 듬뿍 넣고 기억을 더듬어 차근히 재현해 봤다.  

해쑥의 촉촉하고 향긋한 맛에 어깨를 들썩이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4월에는 취나물, 머위, 부추, 시금치 그리고 완두콩이 왔었다.

 완두콩 삶아서 껍질에 배인 단물 쪽쪽 빨아먹으니, 

처음 완두콩 농사를 지어 함께 수확하던 그때가 새록새록 떠올랐다.  

언니와 그 이야기를 하면서 가슴에 사무친 엄마 생각에 눈시울을 붉혔다.


 5월에는 두릅, 엄나무순, 대파, 깻잎.......

 6월에는 감자, 마늘, 양파, 오이고추, 꽈리고추, 호박....... 등


내 몸에 안성맞춤인 갖가지 채소가 엎치락뒤치락 앞을 다투며 쉼 없이 배달되었다.  

그러면 나는 어릴 적 길들여진 맛깔났던 반찬들을 얼렁뚱땅 만들어 오감의 세포들을 깨운다.  

한입 두 입 꼭꼭 씹어 넘기며 그간 축적된 독기를 빼내고 양기를 채워 넣는다.


두릅은 데쳐 초고추장에 콕 찍어 먹고

큰 깻잎은 쪄서 쌈 싸 먹고

감자는 숭덩숭덩 썰어 조림하여 먹고

호박 볶아 국수에 고명 올려 후루룩 찹찹.

눈 코 입 귀가 춤추니 덩달아 몸과 마음도 가벼이 날아올랐다.



 큰언니의 택배상자는 그 예전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새색시처럼 참하다.  

안에 든 내용물(채소)과는 상관없는 박스를 재활용하지만, 단아하게 포장되어 수줍은 미소가 묻어난다.  

무게와 부피를 고려하여 서로 슬기고 이겨지지 않게, 옹기종기 차곡차곡 담긴 차림새는 마치 예단상 같다.  

고운 때깔과 싱그러움을 품고서 한껏 물 오른 채소들의 자태는 황홀하기 그지없다. 


 마트에서 돈만 주면 얼마든지 살 수 있는 채소를 무슨 호들갑을 떨며 얘기하나 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채소 상자에 송골송골 박힌 큰언니의 정성을 생각하면, 

내게는 세상의 그 무엇보다도 값지고 귀하며 특별한 선물 상자다.

  

시골에는 지천에 널린 게 먹거리라지만, 

어마무시한 땡볕에 나아가 허리를 구부려 손톱밑에 흙을 까맣게 끼워야만 비로소 얻을 수 있는 것들이다.  

거무튀튀하게 닳은 손에 한없이 배인 큰언니의 수고를 알기에, 

내게 온 채소는 큰언니의 노동 결정체로 감히 값을 매길 수도 없다. 

 

 또한 도시에 사는 나에게 큰언니의 채소 택배가 주는 기쁨의 크기는 무한하여 자로 잴 수도 없다. 

일단 받으면 눈이 반갑고 입이 즐거워진다.  덩달아 몸이 춤추며 마음의 온도가 사뿐 올라간다.  

끝없이 이어지며 펼쳐놓는 마법 상자처럼 언니의 채소상자는 기상천외한 요술을 부린다.


 커다란 상자에 빼곡하게 채워 보내주니 내가 소비할 만큼만 남기고 가까운 지인들과 나눔 하기도 한다.  

받아보니 너무 좋아서 한 번은 언니에게 부탁해서 멀리 사는 친구들에게도 보냈었다.  

초등 친구는 천둥벌거숭이 시절의 푸근한 고향 같다 하고, 

대학 친구는 친정엄마가 보내준 선물 꾸러미 같다 하였다. 



 기억 너머의 추억을 꽃피우며 그리움으로 물들게 하는 큰언니의 채소꾸러미.

지인들과 나누며 함께 살아가는 정을 퍼 나르는 큰언니표 채소택배.

피가 되고 살이 되는 보약 같은 건강한 먹거리 상자.


 큰언니의 그 특별한 택배 릴레이는 오늘도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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