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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미경 Sep 23. 2023

나는 네가 한 일을 알고 있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


나는 이 속담 덕을 톡톡히 본 적이 있다


'세월아 네월아' 하며 마를 생각도 없이 축 늘어진 빨래를 보면 전에 살던 곳이 간절히 그립다.

그곳은 빨래가 잘 마르기 위한 온도, 습도, 바람 이 세 가지 조건을 조화롭게 갖춘 최적의 장소였다.

나에게는 펜트하우스 같았던 그곳, 우리 집 바로 위는 옥상이었다.

나는 매일같이 빨래를 하여 옥상에 널고서 은혜로운 햇빛을 누렸다.



그날은 제법 깜깜해질 때까지 빨래 걷는 걸 까맣게 잊고 있다가 뒤늦게 떠오른

'흑! 빨래 걷어야 하는데'라는 생각에 화들짝 놀라 옥상으로 뛰쳐 올라갔다.


세상에나! 이게 뭔 일이야?  빨래에 사달이 나 있는 게 아닌가.

2줄로 쭉 늘어서 있던 빨래 중에 남편 흰색 와이셔츠와 하늘색 티셔츠에 

누군가가 떡볶이 국물이 뿌려 시뻘건 단풍잎을 그려 놓은 것이다.


보는 순간 누가 그랬는지 괘씸한 마음이 불같이 일었다.

'잡히기만 해 봐라 내 가만 두지 않을 테다' 어쩌지도 못할 거면서 무딘 날을 바짝 세웠다.

나는 옥상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떡볶이 컵, 꼬챙이, 음료 컵을 수거해서 집에 가져다 놓고

씩씩거리며 어떻게 하면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 될까를 곰곰이 생각했다.

분명 주변 학생일 것이라고, 옥상을 쉽게 드나들 수 있는 사람일 거야.......

누구지? 누굴까? 누구야??????? 머리를 쥐어뜯어며 범인 잡기에 혈안이 되었다.

전의를 불태우는 내 마음을 A4용지에 실어 대문짝 만하게 엘리베이터에 붙었다.



                     알림


0월 0일 

옥상 빨래에 떡볶이 국물 테러한 분   ㄴ ㅅ

1002호로 사과 바람                      ㅂ ㅈ

경찰에 지문 조회 의뢰할 것임


                                0월 0일   1002호


떼면 또 갖다 붙이고 일주일간 나의 헐벗은 마음을 염치를 무릅쓰고 걸어두었다.


옥상에 수상한 사람이 오가지는 않았는지 이웃에 탐문을 해봐도 모른다 하지,

명탐정 코난이 되어 시간을 돌이켜 시간대별로 그날의 행적을 재구성하여 단서들을 추적해 봐도 알 길 없고,

뜬구름 같은 제보들만 이어져 떡볶이 국물 테러 사건은 점점 미궁 속으로 빠져갔다.

시간이 지나니 세월이 약이라고 불같던 마음이 차츰 사그라들면서 그 사건도 잊혔다.


한 달이 지났을까?

저녁에 초인종이 울렸다.

'이 저녁에 올 사람이 없는데 누구지' 하며 현관문을 열었는데 시커먼 남학생 3명이 서 있었다.

7층에 사는 큰 아이랑 초등학교 동기인 00 이가 친구들과 함께 쭈뼛거리며 있는 것이다.

뜻밖의 방문에 "00 이가 웬일이야" 하니 대뜸 사과하러 왔단다.

우선 들어오라고 하여 앉혀 놓고 얘기를 들어 보았다.


엘리베이터에 붙인 나의 서슬 퍼런 으름장을 본 00 이가

"ㅅㅈ" 글자에 긴가민가하다가 집에서도 혹시 네 친구 아니냐며 수군대니 학교 가서 친구에게 알렸단다.

떡볶이 국물 테러범이 친구ㅅㅈ이었던 것이다.

도둑이 제 발 저려, 그때 함께 있었던 친구들을 끌고서 사과하러 온 것이었다.


학교와 우리 집 사이의 거리는 20M 안팎이었다.

친구 따라 강남 왔다가, 옥상에서 놀다 엉겁결에 저지른 일이었다.

왜 그랬냐 물어니, ㅅㅈ이 아무 생각 없이 했단다.

00 이는 말리지 않고 뭐 했냐 하니, ㅅㅈ이 갑자기 일어나 걸어가더니 저지른 일이라 말릴 새도 없었단다.


이름을 어떻게 알았나, 진짜 경찰에 지문조회 했나 묻길래 나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고, 

태연히 옥상에서 너희들이 한 일을 처음부터 다 알고 있었다는 말과 함께 

덧붙여 아이들 이름을 되물어 보았다.

00 이는 이미 알고 있고, 한 명은 아무개라 하고 나머지 한 명 이름이 ㅅㅈ이었다.

나는 속으로 얼마나 놀랐는지 ㅅㅈ이 바로 ㅅㅈ이구나!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가 맞아 죽는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라고 노파심에서 하는 말이니

너희들이 별생각 없이 하는 행동에 피해를 보는 사람이 있으니 앞으로는 언행을 각별히 조심하라고 일렀다.


학교에는 절대 알리지는 말아 달라며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에 순진함이 남아 있었다.

매도 먼저 맞는 게 낫다고 진즉에 왔으면 좋았을 걸 아쉬움이 있었지만,

그래도 사과를 받았으니 되었다며 갈 때는 손에 초코파이를 쥐어 주었다.


그때까지 증거물품이라고 보관해 둔 빨아도 빨아도 지워지지 않던 얼룩탱이 옷가지를 버리고서야,

나는 오랜만에 두 다리를 쭉 뻗고 잠을 이루었다.

아마 ㅅㅈ이랑 그 친구들도 나와 같지 않았을까?


ㅅㅈ은 어떻게 'ㅅㅈ'이라는 이름이 되었을까?

나는 빨래에 떡볶이 국물을 뿌린 발칙한 범인을 어떻게든 잡고 싶었다.

나는 '내가 옥상에서 네가 저지른 일을 알고 있음'을 강렬하게 표현할 방법이 없을까 고심하다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라는 말을 번뜩 떠올렸다.

세상에 비밀이 어디에 있는가?

낮, 새, 밤, 쥐  단어의 초성자만 따서 배열했는데 우연찮게 걸려들었던 것이었다.



옛말 틀린 것 하나도 없다 하지 않는가.

삶의 지혜를 담은 선조들의 빛나는 어록들.


때로는 마른하늘에 날벼락인 날도 있지만,

도랑치고 가재 잡는 날도 있지 않은가.


나는 하루하루를 

누울 자리 봐 가며 발도 뻗고,

돌다리도 두드려 보고 건너고,

말이 씨가 되어 천리를 가니, 가는 말도 곱게 하며 살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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