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주에 걸쳐 한남을 방문했다. 4번의 방문 동안 첫날을 제외하고 매일 비가 내렸다. 비가 내리는 한남을 걷다 보면 가슴속에 무언가 몽글함이 피어오른다. 아마도 구불구불한 한남의 언덕을 천천히 걷다 보면 아스팔트 위에 떨어지는 빗방울이 눈에 아른거리는 듯 느껴지기 때문인 것 같다. 비 오는 한남에서 머리를 비우고 몽글해지는 마음을 붙잡으며 빗물이 튀는 발걸음 하나에 집중하는 소중한 시간을 보냈다.
4일 연속 한남에 자리하고 있는 30여 개의 브랜드를 방문했다. 이태원 대로변에 위치한 에그슬럿과 현대 뮤직 라이브러리, 언덕 위 리움미술관, 번화가에서 조금 떨어져 자신만의 색을 유지하고 있는 사운즈한남까지. 한남을 각양각색으로 꽉 채우고 있는 브랜드가 너무나 많고 다양해 어떻게 소개해야 할까 고민이 많았다.
한남은 유독 'The 한남'이라는 용어가 잘 어울리는 곳이다. 실제로 상호에도 자주 쓰이는 표현이지만, 왠지 어디서도 느껴보지 못한 한남스러움을 이야기하기에 딱 좋은 표현이다. 유독 언덕이 많아 운전하기도, 걸어 다니기도 쉽지 않은 동네임에도 고급스러운 저택이 즐비하고, 그 사이에는 공간을 채우는 각 색의 매장들이 존재하고 있다. 이런 매장들은 주변의 고급스럽고 여유로운 분위기를 그대로 받아들이면서도 자기만의 색을 잘 드러내고 있다. 그래서 유일무이한 한남스럽다는 표현의 ‘The 한남’.
이 편에 소개할 브랜드들이 ‘The 한남’이라는 말에 딱 맞는 곳들이다. 언뜻 보면 특별한 점을 찾기가 어려울 만큼 자연스럽고 편안한 공간이지만, 머무르고 있다 보면 각 브랜드의 색과 메시지가 나에게 말을 거는 것만 같은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브랜드가 들려준 메시지, 그 내용을 간략히 소개한다.
저택을 개조한 <오아시스>에서 브런치를 즐기고 있다 보면 느껴지는 것들이 있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나무와 한남의 거리가 주는 편안한 분위기, 그리고 본질에 충실한 프렌치토스트에서 느껴지는 한 끗 다른 상큼함이 신선한 즐거움을 준다. 분위기에 취해 한참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신기한 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바로 층마다 많은 사람들로 차 있지만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와 우리의 이야기가 섞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저택 구조상 아담한 규모에 공간마다 테이블이 많지 않았고, 적당한 음악소리는 사람들의 생기와 소리로 가득 차 있는 공간에서도 멤버들과의 이야기에만 집중할 수 있도록 했다. 이만큼 편안하고 여유 있는 브런치를 즐길 수 있는 곳이 있을까 싶은 생각에, 지금 흐르고 있는 우리의 메시지가 무엇인지에 집중하게 된다.
오아시스에서 대로변으로 내려오는 길에 위치한 <MTL 한남> 또한 비슷한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다만 다른 점은 우리보다는 ‘나’ 자신에게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을 보내게 된다는 것. 큰 회전문을 통과해 안으로 들어가 보면 온몸을 울리는 사운드와 커피 향, 그리고 다양한 굿즈들이 보인다. 점심시간을 맞아 가볍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 팀들 사이에는 작업에 몰입해 있는 개인들도 꽤 많다. 깔끔한 MTL의 커피와 함께 머무르다 보면 한남만의 정적이지만 신선한 에너지를 느끼게 된다. 큰 창 너머에서 들려오는 길가의 소리들은 매장의 테크노 음악과 어우러지고, 공기에 가득한 사운드 속에서 나 자신에 몰입하게 된다. ‘삶’을 주제로 비치된 다양한 굿즈들(책과 인센트, 리유저블 제품들)은 나에게 어떤 삶을 살아갈 것이냐는 질문을 던지는 듯, 나 자신에 대해 생각하게 한다.
허명욱 작가를 컨셉으로 구성된 <한남작업실>은 한남의 대저택 사이로 여유로운 풍경 속에 자리 잡고 있다. ‘커피와 디저트를 즐기는 시간’을 ‘예술 작품으로 채워진 공간’ 안에 담았다. 공간에는 작가의 작품뿐만 아니라 작가가 실제로 사용했을 것으로 보이는 붓과 의자가 전시되고 있다. 모든 음료와 디저트도 허명욱 작가의 작품(컵과 트레이)에 담겨 나온다. 문득, 일상에 흐르는 예술에 대하여 질문하게 된다. 커피를 즐기는 나는 동일한데 ‘허명욱’이라는 작가가 존재함으로써 예술작품 속에 들어온 지금, 나는 어쩌면 매일 나라는 예술을 살아내고 있는 게 아닐까.
한남작업실 가까이에 위치한 <ASTIER DE VILLATTE> 플래그십 스토어에서는 일상과 가까운 예술품들을 만날 수 있다. 그릇, 주전자, 카펫 등 일상에 가까운 상품들에 담긴 작가들의 스토리를 매니저를 통해 들을 수 있다. 정형화되지 않아 조금씩 모양이 다른, 내구성보다는 빈티지의 미를 살린 작가들의 정신을 듣고 있자면, 이곳의 제품들이 상품인지 작품인지 경계가 모호하다는 생각이 든다. 조금은 먼 곳에 있다고 생각했던 예술이 어쩌면 바로 우리의 일상에 흐르고 있음을, 그리고 우리의 생각보다 편하게 경험할 수 있음을 느끼게 되는 두 곳의 컨셉이 상당히 매력적이다.
<치즈플로>에서 제공하는 점심 세트(2인)를 주문하면 카라멜라이징 된 치즈 스프레드와 함께 식전 빵이 제공된다. 연이어 얼린 배와 염소 치즈, 치즈 가득한 수프와 치즈 가루가 뿌려진 메인 파스타까지, 시작과 끝을 가득 채운 치즈 구성을 만날 수 있다. 꽤 난이도가 있는 마니아틱한 메뉴들이지만, 메뉴를 천천히 음미하다 보면 금세 익숙하게 먹고 있는 나를 발견하게 된다.
그러다 문득, 이 치즈와 메뉴에 대한 특징이나 스토리가 더해진다면 이곳에서의 경험이 더욱 친근하고 흥미로웠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치즈플로 바로 옆에 위치한 <JL 디저트바>에서의 경험 때문이다.
JL 디저트바에서는 마치 오마카세처럼 메뉴를 주문하면 바로 눈앞에서 만들어지는 퍼포먼스를 볼 수 있다. 메뉴가 나올 때마다 하나의 디저트를 이루는 각 요소들의 원재료와 특징에 대한 설명도 함께 들을 수 있다. 아직 먹기 전인데도 이미 메뉴에 대한 감탄과 경외감으로 맛에 대한 기대가 높아진다. 마침내 맛을 보는 순간에는 그 어떤 기대도 실망시키지 않겠다는 신선하고 맛과 향이 가득한 디저트가 강렬한 인상을 남기고 사라진다. 그리고 다음 수저를 이끌며 돌아온다. 디저트를 이렇게나 풍성하게 즐길 수 있다니. 스토리를 더한 디저트, 이곳의 경험은 정말 인상적이다.
저녁 늦게 방문한 <사운즈 한남>과 <앤트러사이트>, 다소 거리가 있는 두 곳임에도 여름밤을 즐기는 공통된 바이브가 있다. 바로 한남의 주인(거주자)들을 가장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다는 점이다. 사운즈 한남의 주변에는 상업매장들이 비교적 적어 한가로운 한남, 이국적이면서도 고급스러운 한남이 무척 느껴진다. 사운즈 한남은 밖에서 보면 한 건물인 것 같지만, 들어서면 작은 마을처럼 길과 작은 매장들로 다시 나누어진다. 이 반쯤 닫히고 반쯤 열린 공간은 한남의 지역을 사운즈 한남에 그대로 연결하고 있다. 공간 안은 호텔과 오피스, F&B 등 다양한 매장이 함께 어우러져 있다. 이 또한 한남에 있는 다양한 존재를 받아들인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이것이 바로 늦은 저녁 인적 드문 사운즈 한남의 고요한 경치가 따뜻한 이유이다.
앤트러사이트의 공간감은 매우 열려있다. 1층 매장의 전면이 통유리인 탓도 있지만, 매장 앞에 넓은 마당때문에 외부와 내부 공간의 경계선을 찾기가 어렵다. 덕분에 밤길을 거닐던 가족들과, 산책 중이던 반려동물과 머무르기에 부담이 없다. 건물이 화려하기로 유명한 앤트러사이트가 유독 한남에서는 힘을 모두 뺀 채로 들어서 있다. 덕분에 한남의 사람을 그대로 품는 공간이 되었다.
한남에서 가장 많은 다양성을 담고 있는 곳이라고 하면 바로 이 두 곳이 아닐까. 다양한 작가의 전시를 진행하고 있는 <리움미술관>과 엄청난 양의 다양한 바이닐을 보유하고 있는 <현대카드 뮤직 라이브러리>.
각 개성 있는 세 건축물로 이루어진 리움미술관은 고미술과 현대 미술이 전시되어 있는 상설 전시관과 특별 전시관으로 나누어져 있다. 방문했을 당시에는 김범의 ‘바위가 되는 법’이 특별 전시관에서 진행 중이었다. 내가 당연하게 여기던 세계에 관한 질문으로 가득했던 김범의 전시. 새로운 작가를 만난다는 것은 나의 세계와는 완전히 다른 세계관을 만나는 경험이다. 어쩌면 이 고요한 리움미술관은 수많은 세계관의 충돌 에너지가 발산되고 있는 공간일지도 모른다. 그 충돌의 여파로 나는 잠시 보이는 것과 믿는 것, 의미를 부여하고 있는 그 모든 것의 실체에 대한 고민에 빠져들었다.
나와 세상에 대한 혼란을 품은 채 <현대카드 뮤직 라이브러리>에 들어서니, 나를 이루고 있었던 조각들을 다시 모으는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이곳에는 1950년대부터 2000년대까지 다양한 LP가 진열되어 있다. 듣고 싶은 LP를 고르면 16개의 레코드판 중 하나의 자리에 앉아 감상할 수 있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 내가 즐겨 듣는 음악을 하나씩 골라 레코드판에 올려놓으면 과거에 내가 느꼈던 감정들, 그리고 지금의 감정에 집중하게 된다. 그 주위엔 각자의 취향과 세계를 즐기고 있는 다른 15개의 레코드판이 있다. 각기 다른 세계가 하나의 공간 안에서 펼쳐진다. 그 각각은 이곳에서 자신만의 감각을 더욱 단단히 한다. 각자의 세계를 흔들고 다시 만들어가는 이 모든 것들이 한남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그 어느 곳보다 다양한 인종이 자연스럽게 어울리고 있는 한남이다. 조깅을 하고, 애완견과 산책을 즐기고, 직장동료와 친구와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곳, 그곳이 한남이다. 모든 사람들이 어떤 분주함도 없이 한남의 공기를 깊이 들이마시고 있는 이곳의 분위기는 정말 고급스럽다.
오늘 소개한 브랜드들도 이 같은 느낌을 간직하고 있다. 자신의 색을 품고, 분주함 없이 그 자체로 자연스럽게 존재하고 있는 브랜드들. The 한남, 그 자체로 편안하지만 단단하게 묵직한 그런 기분 좋은 브랜드들. 이 브랜드와 함께 한남이라는 지역이 오랫동안 다양한 사람들과 공존하기를 바라본다.
더 자세한 글을 읽고 싶다면?
- 교본문고 : https://product.kyobobook.co.kr/detail/S000212907625
글을 읽고 와닿는 브랜드가 있다면 직접 방문해 보세요.
발품의 수고로움으로 발견할 수 있는 당신만의 미학이 있을테니까요 :)
- '발품의 미학' 전체 브랜드 리스트 : https://kko.to/73lffol4NU