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 햇살이 거실 블라인드 틈 사이로 뻗어있다. 거실 바닥엔 아이들 장난감이 어질러져 있고 가족들은 각자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여느 때와 다름없는 주말 아침이다. 아내가 아침 겸 점심을 준비하는 동안 나는 빨래를 개고 오랜만에 거실 장을 닦았다. 거실장 위에는 지구본이 하나 놓여 있는데 평소에 만질 일이 없어 지구본 위에 먼지가 얇게 쌓여있다. TV에서 아프리카의 가난하고 아픈 아이들을 위한 후원 광고가 지나가고 있었는데 마침 여섯 살 딸아이가 옆으로 다가와 앉았다.
“아빠, 나 커서 아프리카 아이들을 도와주고 싶어.” 딸아이가 말했다.
“아인, 착하네. 그런데 아프리카가 어디 있는지 아니?” 나는 방금 먼지를 닦은 지구본을 돌려 아이에게 아프리카를 보여주었다. “우리나라랑 비교해 보자. 엄청 크지?”
“응! 엄~청 커!” 아이가 말했다.
“아인이 크면 아빠랑 같이 아프리카 가서 불쌍한 어린이들 도와줄까?”
“좋아!” 딸아이가 대답하고 다시 자기 방으로 들어간다.
뱅글. 지구본을 돌려보았다. 다시 아프리카. 그 옆에 한반도만큼이나 커다란 섬이 있었다.
‘마다가스카르’
아프리카 대륙 옆에 이렇게 큰 섬이 있다는 것도, ‘마다가스카르’라는 이름도 모르고 있었다. 아마도 태초에 아프리카와 붙어 있었던 것처럼 마다가스카르의 모양은 아프리카 동쪽 해안선과 아귀가 잘 맞아떨어진다. 나는 하던 청소를 마저 이어간다.
언제나 그렇듯이 일요일 하루는 빠르게 지나간다. 햇살은 이미 노란색 빛깔을 내며 낮은 각도로 거실 깊은 곳까지 뻗어있다. 주말만 되면 내가 세상과 분리되어 내 주변의 중력이 높아지는 걸까, 그래서 시간이 눈 깜빡할 사이에 빠르게 흘러가 버리는 걸지도 모른다. 이런 엉뚱한 생각을 해보며 나는 거실 소파에 앉아서 리모컨으로 TV를 켰다. 마침 여행 다큐멘터리가 시작하려는 참이었다. 세계 여행을 다녀본 적이 없는 나는 TV로 여행프로그램을 보는 것을 좋아한다.
제목에 <마다가스카르 4부작>이라고 쓰여있다. 저것은 아침에 아이와 함께 본 그 마다가스카르다. 그곳에는 생떽쥐베리의 「어린 왕자」에 나오는 바오밥 나무가 넓은 초원 곳곳에 마치 기둥처럼 박혀있다. 드넓은 초원뿐만 아니라 전라도에서 볼 법한 광활한 곡창지대도 있다. 연 삼모작(三毛作)을 할 수 있다는 축복받은 땅이다. 얼마나 많은 식량이 생산될 수 있겠는가. 그곳에는 물고기를 잡는 어부들도 살고 있었고 그들이 잡은 물고기는 열대어이라서 무지개 빛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관상용으로 볼 물고기들이 그곳에선 생선이 된다. 아내가 TV를 그만 보라고 타박하여 나는 잠시 놓았던 넋을 찾았다.
“여보, 저기 마다가스카르야.”
아내는 물음표를 던지고, 어쩌라는 듯이, 다시 자기 일을 이어간다.
분명히 우리는 살면서 이와 같은 기이한 경험을 여러 차례 경험한다. 그러나 대부분 우연의 일치라는 말로 넘길 뿐이다. 스위스의 분석심리학자였던 칼 구스타프 융(1875년 – 1961년)은 이처럼 우연이라고 치부하기에 연관성이 매우 높은 현상을 ‘동시성 (synchronicity)’이라고 명명했다. 현상을 보고 가설을 세워 수식이나 실험을 통해 증명하는 과정을 우리는 과학이라고 부른다. 즉, 근거를 명확히 밝힐 수 있어야 하나의 보편적 진리에 편입될 수 있는 것이다. 아쉽게도 내가 경험했고 칼 융도 경험했던, 우연으로 치부하기에 확률이 너무도 낮은, 기이한 현상인 ‘동시성’은 아직 과학적으로 입증되지 않았다. 단지 미신이나 초자연적 현상의 범주에 들어갈 뿐이다. 그러나 동시성이 과학적으로 입증되지 않았다고 해서 그런 현상은 없다고 단정할 수 있을까? 어쩌면 단지 인류에게 ‘동시성’을 증명할 수 있는 지식과 도구가 아직 없기 때문이 아닐까?
세계의 모습이 서서히 재구성되고 있다. 나는 현재 나의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식사하고 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세상에서 나와 마다가스카르가 연결되어 있다. 영화 <인터스텔라>를 보면 시공간의 제약을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것으로 '중력'이 언급되는데 그 중력은 아빠와 딸의 사랑을 매개체로 차원을 가로질러 연결되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중력과 사랑은 그 속성에 끌어당김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는데 동시성 역시 끌어당김의 속성을 가지고 시공간의 제약을 벗어난 현상인 것이다. 양자물리학에서 입증된 양자 입자의 '비국소적 현상' (먼 거리에 있는 입자가 서로의 상태를 동시에 인식하는 현상; 분명 정보를 먼 거리로 전달하기 위해서 최소한의 시간이 걸리는 것이 당연함에도 불구하고 양자세계의 입자는 먼 거리에서 서로의 상태에 한순간에 반응한다)과도 연결되어 있지 않을까. 중력과 아인슈타인의 시공간복합체, 양자역학 그리고 아직 밝혀지지 않은 동시성의 세계가 있다. 이 놀라운 세상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지적 호기심으로 인해 가슴이 뛴다.
언젠가 필연적으로 증명되어야 할 그 ‘동시성’ 현상은 나를 비롯한 호모사피엔스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일까? 이것은 손으로 만질 수는 없지만 창문 너머로 엿볼 수 있는 다른 차원의 단편 같은 것인가? 보는 것을 넘어서 동시성은 현재에 실질적으로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것일까? 만약 나의 정신이 다른 차원과 연결되어 그것을 볼 수 있다면 그것은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나에게 어떤 의미가 있을까? 그것은 지금 내가 겪고 있는 어려운 삶에 어떤 탈출구를 제시해 줄 수 있을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