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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파꽈리 Jun 10. 2024

목소리가 필요해

Ep. 1


잠을 자다가 여러 번 깨는 일이 일상화되어 가고 있다. 지난 3월 무렵 처음으로 느끼기 시작했으니, 아마도 이 증상은 내가 감지했던 시기보다 훨씬 이전부터 천천히 진행되어 오지 않았을까 싶다. 그나마 요즘엔 깨는 횟수가 조금 줄어 두 번 정도로 굳어져 가고 있는데, 근간에 눈을 떴을 때 확인해 본 시각은 대략 23시 50분과 2시 20분 부근이었다. 


애초에 잠자리에 드는 시각을 지금보다 더 늦춰볼까, 자기 전 몸을 피곤하게 만들 만한 뭔가를 시도해 볼까, 아니면 수면에 좋다는 캐모마일 차 같은 걸 마셔볼까 등등 여러 생각들을 하다가, 최근엔 수면에 이로운 향기가 나는 일회용 안대 세트를 사서 사용을 해보기도 했는데 결과는 그다지 신통치가 않았다. 밤에 잠든 후 아침에 깰 때까지 한방에 쭉 가는 수면 패턴을 잃기 시작하면 그게 바로 건강 적신호 초기라고 하던데, 아무튼 뭔가 근본적인 주요 원인을 놓치고 있는 듯한 기분이다.


늦은 밤 잠이 오지 않을 때, 예전엔 라디오를 듣곤 했었다. 그러다 그게 하나의 패턴으로 굳어져 특정 라디오 방송에 주파수를 맞추고는 귀에 이어폰을 꽂고서 잠을 청하기도 했었다. 그렇게 여러 가수들과 DJ의 목소리를 듣다가 자연스레 잠에 빠지면 어느 순간 아침이 되고 나는 또 피곤한 줄도 모른 채 새로운 하루를 시작하곤 했었다. 세월이 흘러 세상이 많이 변했고 덩달아 나도 변했지만, 예전처럼 누군가의 목소리를 들으며 잠을 청하면 어떨까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그러면 마치 기적처럼, 내 헝클어진 수면 패턴이 정상으로 돌아오지 않을까 하는 마음이 들기도 하는 것이다.



Ep. 2


언젠가부터 가끔씩, 일과가 끝난 후 사무실을 나서서 차를 세워 둔 곳까지 걸어가는 동안 이런 생각에 빠져들곤 한다. 참으로 외롭구나. 어디서 발원한 것인지 모를 그 외로움의 부피가 가슴에 담아놓을 수 없을 만큼 커지고 또 커지는 바람에, 두 발로 땅을 내딛으며 주차장을 향해 걷는 10여 분이 마치 영겁의 시간이라도 되는 것처럼 아득하게 느껴지는 때가 있는 것이다. 이런 원시적인 감정을 두고 나는 왼쪽 바지 주머니에 찔러 넣어둔 휴대폰을 꺼내 연락처를 뒤적이기 시작한다. "고속도로무상견인"부터 시작해 "LH수리"까지 이어지는 118개의 단출한 연락처. 나는 어디에 전화를 걸어 누구의 목소리를 통해 이 외로움을 달랠 수 있을까. 고민하는 척하다 끝내 다시 휴대폰을 원래 있던 자리에 되돌려 놓는다. 굳이 연락처를 검색할 필요 없는 목소리를 두고, 우스꽝스럽게도 계속 반복하는 일. 하릴없는 뒤적임을 되풀이하며 그럭저럭 감당해 나가는 10여 분.



Ep. 3



한 여자가 브라운관에 모습을 나타낸다. 고장 난 비디오카메라로 녹화를 한 탓인지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 무언가를 말하는 듯한 그녀의 눈빛과 몸짓, 그리고 가끔씩 벌어지는 매력적인 입술에 한 남자가 마음을 빼앗긴다. 첫눈에 반한다는 것이 바로 이런 경우일까. 이제 그의 바람은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며 사랑을 시작하는 것이다. 


프랑스 영화 <라빠르망>을 원작으로 한 미국판 리메이크 영화 <당신이 사랑하는 동안에>. 뱅상 카셀과 모니카 벨루치가 주연했던 <라빠르망>과는 기본적으로 풍기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고, 결말은 더더욱 다르게 전개되는 영화였는데, 나는 개인적으로 미국판 영화가 조금 더 마음에 들었었다. 게다가 영화의 OST로 나왔던 Coldplay의 <The Scientist>는, 당시 싸이월드를 이용하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미니홈피 대문 음악으로 걸어놓기 위해 아낌없이 도토리를 구입하게 만들었을 정도로 인기를 누렸을 만큼 꽤나 인상적이었다.


아무튼 위의 스틸컷은 영화 <당신이 사랑하는 동안에>의 초반부에 흐르던 영상의 내용인데, 모딜리아니의 이 그림을 보고 있으면 문득문득 그 장면이 떠오르곤 한다. 


영화 속에서 목소리가 실종된 채 브라운관에 모습을 나타내는 리사(다이앤 크루거)가 그림 속 눈이 없는 이 여인과 실로 묘하게 결합되고 있는 것이다. 


모습은 볼 수 있으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 영화 속 여인과, 눈이 없으니 더욱 그 목소리가 궁금해지는 그림 속 여인. 그러니 결국 이 둘을 잇고 있는 건 다름 아닌 목소리였던 것. 듣고 싶어도 들을 수 없는 목소리 때문에 매튜(조시 하트넷)는 리사를 사랑하기 시작하고, 바로 그 듣고 싶어도 들을 수 없는 목소리 때문에 나는 그림 속 여자에게서 쉽사리 시선을 거둘 수 없는 것.


Portrait of a Woman in a Black Tie (1917) / Oil on canvas / 65 cm X 50 cm


하얀 블라우스에 느슨하게 걸친 검은 타이, 부드러운 색조의 볼터치와 가슴 설레게 하는 붉은빛의 입술, 그리고 한쪽으로 약간 고개를 기울인 그림 속 여인이 마음을 움직인다. 다만, 그녀의 눈빛을 볼 수 없으며 영화와는 달리 끝내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다는 것이 못내 아쉬울 뿐. 세상엔 아무리 애를 쓰고 막아보려 해도 들리는 목소리가 있는 반면, 이처럼 바라고 바라는데도 결코 들리지 않는 안타까운 목소리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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