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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파꽈리 Feb 14. 2024

맞춤법 소고

"나는 네가 좋아서 수만 냥이 되었지."


아주 오랜 옛날, 그러니까 어렸을 적은 맞는데 그게 어느 무렵인지 도무지 가늠이 되지 않는 그때, 나는 처음으로 이 같은 노래가사를 읊어대기 시작했다. 주로 라디오를 통해 그리고 가끔씩은 어머니의 목소리를 통해 듣곤 했던 이 노래에 대해 기억하는 건, 위에 언급한 첫 소절의 가사와 더불어 후렴이 시작되는 부분의 노랫말 "내 곁에 있어주." 네가 좋아 수만 냥이 된 이후부터 후렴에 이르기 전까지의 가사는 허밍으로 때우고, 내 곁에 있어 달라는 대목의 후렴이 끝난 후엔 또다시 허밍을 일삼는, 참으로 우스꽝스러운 방식으로 부르곤 했던 노래. 아무튼 처음으로 이 노래가사를 흥얼거리기 시작한 이후 대학교에 다니던 그 어느 날까지, 혼자 있을 때, 게다가 그 혼자임이 심심하거나 어색하거나 쓸쓸할 때면 나는 별다른 생각 없이 줄곧 이 같은 패턴으로 해당 노래를 소환하곤 했다. 기억이 가물가물한 언제부턴가 네가 좋아서 수만 냥이 되었다고, 그러니 내 곁에 있어 달라고.


이 노래에 대해 제대로 확인을 해 본 건 20대 청년이 되고 나서였다. 1974년에 발표된 곡으로 가수 이수미 씨가 불렀던 <내 곁에 있어주>. 그리고 가끔씩 찜찜함을 낳게 했던 해당 가사는 "수만 냥"이 아니고 "순한 양"임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말 잘 듣는 아이처럼 고분고분하고 순한 양. 아~ 순한 양! 십수 년 숙성된 의구심이 단박에 사라졌던 순간이었다. 초딩, 중딩, 고딩을 거쳐 대딩 시절의 그 어느 날에 이르기까지 왜 나는 "수만 냥"이라는 단어에 대해 별 의심을 품지 않았을까. 아니, 돌이켜보면 전혀 의구심을 품지 않았던 건 아닌데, 정작 거기에서 오는 찜찜한 기분을 해소하고 싶은 만큼의 관심까지는 갖고 있지 않았던 모양이다. 라디오 속 가수나 어머니의 입을 통해 나왔던 "순한 양"이 무엇 때문에 "수만 냥"으로 바뀌어버렸는지 이제 와 알아낼 수도 없는 노릇이다. 다만, 처음으로 이 노래를 들었던 그 시절의 내가 한 치의 오차 없이 정확히 가사를 받아들이기엔 너무나 어린 나이였다는 변변치 않은 이유를 댈 수 있을 뿐. 게다가 웃긴 사실 하나는, 이렇게 노래를 찾아보면 간단히 해결될 것을, 심지어 언젠가의 나는 돌고 또 돌아 "수만 냥"에 대한 의심을 진심으로 탈바꿈시켜 놓고 그런 식으로 노래를 불러왔던 나 스스로를 정당화하려 한 적도 있었다는 것이다.


'나는 네가 좋아서 수만 냥이 되었어. 자그마치 수만 냥! 네게 어울릴 만한 존재가 되기 위해 나는 참 많은 노력을 기울여 스스로를 키워온 거야.'


수만 냥. 조선시대 화폐 상평통보 한 냥(兩)의 가치는 얼마일까. 이런저런 자료를 찾아보니 조선시대엔 국가가 정한 공식 가격이란 게 있어서 쌀 1섬은 5냥이었고, 당시의 1섬은 오늘날의 144kg 정도였다고 한다. 농산물 유통정보 사이트(https://kamis.or.kr)를 보면 오늘 날짜로 쌀 20kg당 56,336원이니까, 144kg이면 약 405,619원이 될 테고, 이를 5로 나누면 1냥에 해당하는 가격으로 대략 81,123원 정도가 나온다. 그럼 이제 "수만 냥"의 "수만"를 얼마 정도로 잡으면 될까 하는 문제가 생기는데, 그냥 1에서 10 사이 평균으로 대충 5만 정도로 잡는다고 하면, 그렇게 궁금해했던 "수만 냥"의 가격은 최종 4,056,150,000원이 된다. 40억. 나는 네가 좋아서 네게 걸맞은 사람이 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한 결과 40억의 가치를 지닌 사람이 되었고, 이런 내가 너에게 곁에 있어 달라고 하면 과연 너는 어떻게 반응을 할까. 그러나 이런 식이라면 최종적으로 어필하는 게 결국 돈이 되는 것 같아 애초에 의도했던 바와 다르게 뭔가 속물적인 느낌이 든다. 하여, 숫자에 둔 가중치를 잠시 접어두고, 너를 생각하는 마음으로 처절히 노력한 결과 내가 이만큼이나 괜찮게 성장했다는 관점으로 바라본다면 어떨까. 그렇다면 내가 오랫동안 되뇌어왔던 노래가사도 나름 설득력이 있다 볼 수 있지 않을까. 나는 당신이 좋아서 수만 냥이 되었소! 그러니 제발 내 곁에!


캠릿브지 대학의 연결구과에 따르면, 한 단어 안에서 글자가 어떤 순서로 배되열어 있는지는 중하요지 않고, 첫 번째와 마지막 글자가 올바른 위치에 있는 것이 중다요하고 한다. 나머지 글들자은 완전히 엉진망창의 순서로 되어 있라을지도 당신은 아무 문제 없이 이것을 읽을 수 있다. 왜하냐면, 인간의 두뇌는 모든 글자를 하하나나 읽는 것이 아니라 단어 하나를 전체로 인하식기 때이문다.


오래전, 지금은 사라진 "이글루스"라는 플랫폼에서 글을 쓰며 지내던 중, 누군가 위와 같은 글을 게시하여 한바탕 이슈 몰이를 한 적이 있었다. 문장 속 여러 단어들이 잘못 표기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시적 시선으로 글을 읽어 가면 아무런 문제 없이 이 네 줄의 글을 자연스럽게 해석할 수 있다는 게 요지였다. 하나하나의 세부적인 오탈자에 신경을 쓰기보다는 해당 글의 전반적인 메시지를 봐야 한다는 걸 강조하는 것으로도 볼 수 있겠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접해봤을 법한데, 나무위키 사이트에 관련 내용(캠릿브지 대학의 연결구과)이 자세히 나와 있다.


익명의 불특정 다수가 방문하는 커뮤니티 게시판을 이용하다 보면, 가끔씩 맞춤법에 대해 지적하는 댓글이 달리는 걸 보곤 한다. 언뜻 생각나는 게, "정말 어의없네 / 정말 어이없네", "그걸 갖으려고 해 / 그걸 가지려고 해", "희안한 일이야 / 희한한 일이야", "공항장애로 힘들어 / 공황장애로 힘들어", "금새 떠났네 / 금세 떠났네", "거이 다 됐어 / 거의 다 됐어", "그 정도면 문안하다 / 그 정도면 무난하다"와 같은 것들. 띄어쓰기는 알고 보면 꽤 고난도라 이에 관련한 지적 댓글을 보는 건 상당히 드문 일이지만, 오자와 같은 경우엔 앞서 예를 든 것들 외에도 워낙 틀릴 만한 단어들이 많아 그만큼 지적하는 댓글들도 자주 볼 수가 있다.


그런데 나는 여기에서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익명의 수많은 사람들이 특정 분야를 심도 있게 논하는 곳도 아닌 자유게시판에 올리는 글들에 과연 얼마만큼의 진심과 성의가 담겨있을까 하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글의 소재와 주제가 무엇이건 간에 게시되는 글들이 비교적 쉽고 가벼운 내용을 담고 있는 경우가 다반사인데, 거기에다 대고 굳이 글의 내용과 동떨어진 맞춤법에 대한 지적을 하는 게 다소 이해가 안 가는 측면이 있는 것이다. 그 같은 지적 댓글을 남기는 의도라면, 맞춤법에 어긋난 단어를 쓴 사람을 타박하기 위함일 수도 있고, 아니면 정말로 순수하게 표준어 사용 계도를 위한 맞춤법 교정이라는 선의에서 비롯된 것일 수도 있다. 현실에서 보이는 양상으로는 전자의 경우가 대부분인데 문제는, 그게 어느 쪽이건 간에, 서로 간 언제든 봐도 그만 안 봐도 그만인 커뮤니티 게시판에서, 글의 내용과는 상관없이 틀린 맞춤법 때문에 공개적으로 지적을 받는 당사자 입장을 놓고 볼 때 그런 댓글이 과연 얼마만큼의 효용이 있을까 하는 것. 물론 그가 고맙다 표현하며 기꺼이 틀린 맞춤법을 교정하는 기회로 받아들인다면 좋겠지만, 실상 그런 아름다운 모습을 발견하기란 그야말로 하늘의 별따기와 같은 것. 오히려 "니까짓 게 뭔데?"라는 뉘앙스의 비아냥이 날아오지 않으면 다행이겠다.


엄밀히 말하면 내가 "순한 양"을 "수만 냥"으로 바꿔 불렀던 것이나, 한 단어 안에서의 글자 배열에 관련한 "캠릿브지 대학의 연결구과" 케이스 둘 다 틀린 맞춤법과는 궤를 살짝 달리하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이와 같이 애초에 의도했던 것과는 다른 혹은 틀린 단어들로 대체가 된 노래가사와 문장임에도 불구하고 최종적으로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원래의 것들과 비교해 아무런 변함이 없다는 측면을 고려할 때, 각종 인터넷 게시판에 올려진 맞춤법 틀린 단어가 들어간 문장과도 나름의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지 않을까. 순한 양이건 수만 냥이건 나는 네가 좋으니 내 곁에 있어 달라는 바람은 여전하고, 한 단어 안에 글자들 순서가 바뀌어도 전반적으로 어떤 내용이 실린 글인지 파악하는 데에 전혀 문제가 없는 것처럼, 상기했던 커뮤니티 게시판에서의 잘못된 맞춤법 표기 또한 글쓴이가 전하고자 하는 주된 내용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하니, 이를 지켜본 이들도 굳이 관련 문제를 지적하는 재미를 누리거나 수고를 기울일 필요 없이 그냥 자연스럽게 넘어가면 어떨까 싶은 것. 너무 비현실적인가. 그러고 보니 인터넷이란 공간에서 이를 기대한다는 것 자체가 사실 웃기는 일이긴 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커뮤니티 게시판에서 볼 수 있는 오자와 달리 다음의 경우에서 발견되는 오자는 사뭇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시, 수필, 소설, 자기 계발 등등 장르나 내용을 불문하고 오로지 글을 쓰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모여 있는 글 쓰는 공간, 그곳에서 발견하게 되는 맞춤법 틀린 글자들. 누가 봐도 단순 착오로 빚어진 것이든, 아니면 글쓴이 입장에서 정말로 그렇게 표기하는 줄 알고 쓰인 것이든 간에 해당 오자를 발견하는 순간, 그것이 꼭 제대로 고쳐졌으면 하는 바람을 갖게 되는 순간이 있는 것이다. 글을 쓴다는 사람이 이런 것도 모르냐며 핀잔을 주고자 하는 게 아니라, 가슴에 와닿는 글이긴 한데 옥에 티처럼 자리한 오자가 자꾸만 마음에 걸려 안타까워서, 그것만 없으면 보다 더 반짝이는 글이 될 수 있으리라는 생각 때문에, 누군가에겐 소소한 즐거움이 또 다른 누군가에겐 형언하기 힘든 감동이 될 수도 있는 그 글이 티끌만 한 오자 때문에 조금이라도 퇴색되는 게 가여워서.


요즘도 가끔씩 수만 냥이 되곤 한다. 내 곁에 있어 달란 말 건넬 사람은 없어도, 네가 좋다는 말의 어감이 그저 너무 좋아서 나도 몰래 연거푸 수만 냥을 흥얼거린다. "나는 네가 좋아서 수만 냥이 되었지." 이제는 순한 양이 되어야 함에도 여전히 수만 냥으로 남아야만 의미가 있을 것 같은 노래. 그래야 언젠가는 내 곁에 두고 싶은 사람 만날 수 있을 것 같아 적어도 내게는 그렇게 불려야 할 노래. 세상이 규정해 놓은 법칙에 어긋나 있는 것들에 대해 무관심으로 일관하거나 대수롭지 않게 여기거나, 혹은 그것들이 빚어내는 안타까운 상황에 가여운 마음이 드는 순간이 있다. 고작 맞춤법 하나로 빚어진 상념 때문에 잠 못 이루고 있는 나 또한 조금은 가엽다 느껴지는 어느 겨울밤. 글을 통해 누군가의 삶을 들여다 보고, 그의 마음속으로 오롯이 빠져 들어가, 마침내 공감이라는 연대의 장을 이루는 순간에 불청객 같은 그놈의 오자는 만나지 않았으면 하는 소박바람 하나 가져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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