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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허파꽈리 Feb 24. 2024

나 홀로 섀도복싱

<달콤한 인생, 2005>


엔딩 크레딧이 오르기 전 선우(이병헌)가 섀도복싱을 하는 모습. 관객으로 하여금 이 영화에 대한 서로 다른 두 가지 해석을 낳게 했던 바로 그 장면이다. 선문답 같은 스승과 제자의 말을 끝으로 영화가 마무리되는가 싶던 찰나 난데없이 등장한 이 장면 때문에, 피바람이 몰아쳤던 영화의 시나리오에 대해 어떤 이는 영업을 마친 어느 날 저녁에 선우가 그저 장난삼아 해본 상상쯤으로 여기는가 하면, 또 어떤 이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게 된 선우가 의식을 잃어가는 도중에 한창 잘나갔던 시절 자신의 모습을 회상하는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했다. 그러니까 문제는 이것이다. 한국형 누아르를 표방했던 이 영화의 주된 틀이 꿈인가 생시인가 하는 것. 아무래도 나는 후자의 입장인데, 그러지 않고서는 영화의 마지막에 나오는 이 섀도복싱 장면에 제대로 된 해석을 부여하기 힘들고, 아울러 이 모든 것이 한낱 꿈이라면 일단 관객의 입장으로서 그 같은 사실에서 밀려오는 허탈함을 감당하기 힘들 것이기 때문이다.



어느 맑은 봄날, 바람에 이리저리 휘날리는 나뭇가지를 바라보며 제자가 물었다.
"스승님, 저것은 나뭇가지가 움직이는 겁니까, 바람이 움직이는 겁니까?"
스승은 제자가 가리키는 곳은 보지도 않은 채 웃으며 말했다.
"무릇 움직이는 것은 나뭇가지도 아니고 바람도 아니며 네 마음뿐이다."


영화의 도입부에 선우의 목소리를 통해 흘러나오던 이야기. 움직이는 것은 나뭇가지도 아니요 바람도 아니요 그저 자기 마음뿐이라 하니, 이 짧은 대화 속에 뭔가 있는 척하는 분위기를 조성하려는 감독의 뻔한 속셈에 약간의 거부감이 들기도 하지만, 어쨌거나 내가 보기엔 이것이 바로 영화 <달콤한 인생>에 담겨있는 주된 메시지가 아니었나 싶다. 세상 모든 일은 자기 자신 스스로 어떻게 마음을 먹느냐에 따라 그 성패가 달려 있는 것이니 궁극적으로는 실질적인 아군도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이요 최종의 적군도 자기 자신에 다름 아니라는 것.


이 영화에 대해 실망스럽다는 평을 한 사람들은 여러 가지 이유들 중 하나로 보스(김영철)가 선우를 죽이려고 했던 계기 자체에 설득력이 부족하다는 점을 들었었다. 말하자면 관련 당사자들 모두에게 좋은 결과를 가져오기 위해 선우가 택했던 방법이 설사 보스에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손 치더라도 그것이 굳이 죽음을 부를 만큼 커다란 잘못이었나 하는 것. 이것은 대다수 관객에게 던져진 물음이기도 했고 궁극적으로는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선우가 직접 풀어내야만 하는 숙제와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선우는 보스와 대면한 마지막 자리에서 이렇게 묻는다. 나를 죽이려 했던 이유를 정말로 모르겠으니 이 자리에서 말해 달라고. 그러나 보스는 모욕감이라는, 어느 누구나 쉬이 떠올릴 수 있지만 여전히 설득력이 부족한 이유를 들면서 교묘히 핵심을 피한 채 되려 선우에게 이런 물음을 던진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흔들린 거냐? 그 애 때문이냐?"


보스가 말한 '흔들린다는 것'과 영화 초반 스승과 제자의 대화 속에 나왔던 '움직인다는 것'은 바로 이 지점에서 등가를 이룬다. 이것은 한 사람의 마음에 관한 물음이기도 하고 더불어 지금까지 살아온 그의 삶 자체에 결부된 물음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대체 흔들렸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선우가 흔들린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무엇이 그를 흔들리게 했을까. "그 애 때문이냐?"라는 물음에 선우는 잠깐 뜸을 들이는 듯싶더니 이내 보스의 가슴에 한 발의 총탄을 발사한다. 그의 대답인 셈이다. 그렇다면 이 대답은 긍정의 의미였을까, 아니면 그 반대의 의미였을까.


이 영화에서 "왜?"라는 물음은 그 자체가 하나의 키워드다. 선우가 보스에게 또 반대로 보스가 선우에게 던졌던 "왜?"는 대답을 요하는 당사자에게 납득할 만한 그 어떤 단서도 제공하지 못한 채 허공으로 사라져 버린다. 말하자면 모든 이에게 속 시원한 해답을 건네줄 열쇠인 듯 보였다가 어느 순간 열리지 않는 그저 야속한 자물쇠가 돼버린 것이다. 그러니 애초부터 질문은 상대방이 아닌 스스로에게 던져야 했고 그 대답도 스스로 찾아야 했던 것.


영화의 말미, 의식이 희미해져 가는 도중에 선우가 떠올리는 섀도복싱이 바로 이와 같은 맥락이다. 섀도복싱이 무언가. 가상의 적을 생각하며 스스로를 연마하는 복싱 기술 아닌가. 친절하게도 영화는 건물 유리창을 통해 선우의 상대방, 바로 선우 자신을 비춰준다. 일생일대 최대의 아군이면서 적군인 자기 자신을 바라보며 맹렬히 주먹을 뻗고 위빙을 하던 선우의 모습. 이렇게 죽음을 코앞에 두고서야 선우는 새삼 깨닫는다. "왜?"라는 질문은 스스로에게 던져야 했고 결국 자기 자신과 싸워서 그 대답을 얻어내야 했다는 것을. 세상의 모든 질문은 자신으로부터 생겨나며 그 대답 또한 자신으로 귀결된다는 것을. 무릇 움직이는 것은 나뭇가지도 아니요 바람도 아니요 자기 마음이라고 했던 것처럼. 그렇다면 피비린내 나는 총격전을 낳기까지 한 "왜?"라는 질문에 대한 답의 실체는 무엇이며 선우는 마침내 그것을 알아냈을까. 궁금해도 어쩔 수 없다. 그것을 아는 사람이 있다면 오로지 선우뿐일 것이나 그는 이미 죽고 이 세상에 없으니.


어느 깊은 가을밤, 잠에서 깨어난 제자가 울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스승이 기이하게 여겨 제자에게 물었다.
"무서운 꿈을 꾸었느냐?"
"아닙니다."
"슬픈 꿈을 꾸었느냐?"
"아닙니다. 달콤한 꿈을 꾸었습니다."
"그런데 왜 그리 슬피 우느냐?"
제자는 흐르는 눈물을 닦아내며 나지막이 말했다.
"그 꿈은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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