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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유아영 Nov 29. 2023

다시 돌아와 처음으로

영화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감독이라는 직업은 아무리 경험이 많이 쌓인다고 해도 결코 완숙해질 수 없는 직업인 것 같다. 언제든 스스로가 마음만 먹으면 아주 초보자였을때처럼 돌아가 영화를 만드는 것도 가능하다. 이것은 영화가 ‘기술’의 문제라기보다 ‘태도’‘의지’의 문제에 더 가깝다는 이야기이다. 기술이 문제라면 경험이 쌓임에 따라 영화는 노련해질 테지만, 태도나 의지는 결코 그렇지 않다. 


어떤 이는 평생을 아이처럼 살다가 갑자기 무언가를 깨달은 것처럼 심오한 삶을 살기도 하고, 어떤 이는 애늙은이처럼 살다가 나이가 다 들어서 어린 아이일 적 자아를 주섬주섬 꺼내보기도 하니 말이다. 무릇 영화가 삶에 대한 것이라면, 영화 감독은 언제나 노련해질 수가 없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 앞서 이런 이야기를 꺼낸 이유는, 이 영화가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성숙미 넘치는 후기작이 아니라 감독의 개인적 기억의 편린들을 모아 완성해낸 하나의 치열한 싸움에 가깝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감독으로서 만든 영화’라기보다 ‘미야자키 하야오로서 만든 영화’에 더 가깝다.


마히토는 영화 안에서 내내 말도 안되는 일들을 겪지만, 결코 감정적으로 호소하거나 스스로 침잠하지 않는다. 그러한 마히토의 태도는 의아함을 넘어 불쾌감을 주기도 한다. 아마 많은 관객들이 난해하다고 느낀 큰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역사의식을 가진 한국인으로서 가해자에 속하는 이의 구구절절한 이야기를 온전히 소화하기는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기에, 마히토의 비감정적 태도, 어딘가 의연해보이는 그 태도가 불쾌감을 주기도 한다. 


마치 세상을 책임지는 작은 영웅이 된 것처럼 작은 어깨에 모든 걸 얹고 묵묵히 나아가는 그 모습은 그가 가진 캐릭터로서의 ‘권력’을 빼앗고 싶게 만들기도 한다. 그러나 반대로, 마히토의 의연한 모습은 감정 불구가 된 애늙은이로서의 모습으로 비춰지기도 한다. 


너무나도 어린 나이에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을 경험해내면서 그 모든 사건들에 일일이 감정적으로 대응할 수 없었던 소년. 그것이 마히토의 본질이 아닐까 예상해본다. 마히토는 의연한 작은 영웅이 아니라, 다사다난한 세상으로부터 감정을 거세당한 안쓰럽고 약한 아이가 아닐까.


마히토를 둘러싼 등장인물들도 마히토만큼이나 불가사의하다. 영화의 초반부 극을 가장 강한 힘으로 끌어당기는 왜가리는 마치 마히토의 가장 큰 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후에 마히토와 왜가리는 친구가 된다. 뿐만 아니라 마히토의 이모이자 새엄마인 나츠코, 마히토의 아버지인 쇼이치는 과연 어떤 인물인지 명확하게 파악이 되지 않는다. 


나츠코는 마히토의 엄마의 자리를 위협하는 사람이기에 마히토가 혐오감을 느끼게 되는 인물이지만, 마히토를 향한 나츠코의 사랑은 생모의 사랑 못지 않게 따뜻하다. 마히토는 쇼이치에게 외적으로는 존경심과 복종 의지를 드러내지만, 군수공장의 사장으로서 일제의 일부로 여겨지며 마히토의 혐오감의 대상이 되는 것을 피하지 못한다. 온전히 마히토에게 속해있는 인물은 없다. 


마히토가 감정적으로 완전히 의지할 수 있는 인물은 없으며, 함께 이세계로 가게 되는 키리코마저도 이세계에서 낯설고 거친 인물이 되어 마히토를 외롭게 만든다. 마히토에게 공감이 되거나 위로가 되는 것이 하나도 없는 상황에서도 마히토는 아무런 불평없이 자신 앞에 놓인 것들을 해결하며 한걸음, 한걸음 앞으로 나아간다. 물론, 마히토가 언제나 옳은 선택만을 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때로 자신의 강한 억제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뚫고 나오는 감정의 폭발을 표현하기도 한다. 돌로 자신의 머리를 쳐버리며 복잡하고 서글프게 꼬여버린 스스로의 마음을 무력하게 표출하는 마히토의 모습은 너무나도 안타깝다. 


왜 이 작은 아이에게 삶의 방향을 알려줄 수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까.
그러나 전쟁이라는 상황 속에서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이들은 모두 피해자이자 약자가 된다. 


마히토에게 적대감을 불러일으키는 나츠코도 사랑하는 언니의 몫을 다하기 위해서, 그런 언니의 아들인 마히토를 돌보기 위해 기꺼이 언니의 남편의 아내가 되는 기괴한 선택을 한다. 이런 나츠코에게 마히토를 적극적으로 감싸거나 돌보는 행위는 불가능에 가깝다. 나츠코에게도 모든 선택과 모든 행동이 지극히 조심스러웠을 것이다.


마히토는 자신을 시도때도 없이 괴롭히는 이 세상을 향해 욕을 하거나, 세상을 등지거나, 도망치는 대신 자신과 비슷한 상황에 처해있는 이들을 위해 온 힘을 다해 노력한다. 그러니까, 그들과 일부가 되어 그들의 기대감을 충족시키며 더 좋은 삶을 살아가기 위해 앞으로 걸어간다. 


다만 슬픈 것은 이러한 마히토의 용감한 삶의 궤적에 마히토 자신의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히토는 이모이자 새엄마를 구하기 위해 이세계로 향하고, 왜 이모를 구해야하냐는 질문에 ‘아버지가 새엄마(이모)를 사랑하니까’라고 답한다.

이세계의 혼란함을 견뎌내는 그 강인함이 자기 자신이 아닌 가족들을 위한 마음이라는 것, 그것도 자신에게 힘이 되어주지 못하는, 어쩔 때는 타인에 더욱 가까워보이는 그 가족들이라는 점이 놀랍다. 한편으로, 마히토가 자신을 애써 지운 채 다른 누군가를 위해서만 살아가기 위해 얼마나 많은 감정과 상처들을 그 내면에 꾹꾹 눌러 담았을지 알 수 없기에, 이 소년의 담담한 표정은 나를 슬프게 만든다.


누군가를 원망하기에는 원망할 대상조차 없는 것이 마히토의 현실이다. 솔직한 혐오감으로 고개를 들면, 그곳에는 똑같이 상처받은 나츠코가 있고 가족을 위해 책임을 견뎌내는 쇼이치가 있다. 마히토가 그들에게 왜 그런 선택을 한 것이냐고 따져 물을 수 있을까. 각자의 방식으로 자신에게 주어진 삶을 아프게 견뎌내고 있다는 것을, 마히토는 너무나도 일찍이 깨달아버린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히토는 아직 너무 어리고 여린, 작은 소년이다. 영화의 서사와 영화를 장식하는 수많은 요소들, 등장인물들은 그의 전작들과 다르게 상당히 아리송한 방식으로 연출되어 있다. 앞서 언급했듯이 선과 악을 명확히 구분하기 어려운 인물들과 전작에서 보였던 이미지들의 유사한 반복(그러나 분명히 다른 의미로 쓰인 것 같은), 알 수 없는 곳으로 향해가는 서사가 관객들을 혼란스럽게 한다. 미야자키 하야오의 전작들을 충실하게 지켜봐온 팬이라면 더더욱 이 영화를 난해하게 느낄지도 모르겠다.



내게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작품은 기존에 미야자키 하야오의 작품들이 얼마나 그의 직업 정신이 투철했는가를 확인시켜주는 영화였다. 여태 그는 영화에서 대중들의 요구에 응답하려고 부단히 노력해왔고, 모든 관객들이 함께 즐길 수 있는 이야기를 만들며 함께 만들어가는 세상을 꿈꿨던 것 같다. 


환경 문제라든지, 가족과 어린 아이라든지, 전쟁이라든지. 그가 바라보는 방향성은 늘 넓은 곳에 있었다. 그리고 모두가 단번에 이해할 수 있을만큼, 그 이야기는 분명하고 단순했다. 


그러나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는 기존의 작품들과 완전히 다른 작품이다. 이번에 그 이야기의 방향성은 미야자키 하야오 자신을 향해있고, 그의 복잡하고 서글프게 얽힌 인생을 향해있다. 자신에게 닥쳐온 불행을 이겨내면서 불평 불만하지 않는 마히토의 무표정한 얼굴이 미야자키 하야오의 얼굴과 겹쳐지는 순간이 온다. 


그 순간, 나는 이해한다. 이 모든 난해함이 여태 미야자키 하야오라는 개인을 괴롭혀온 수많은 기억과 상처들의 집합이라는 것을. 그는 감독으로서, 어른으로서 여태 많은 이들의 삶의 이정표를 제시해주며 의젓하게 리더 역할을 수행했다. 그러나 모순적으로 하야오라는 인간 개인으로서는 풀지 못한 상처들이 너무나 많았던 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따가운 전기의 공격을 견뎌내면서, 자신이 대체 어디로 향해가는지도 모르면서 저벅저벅 앞으로 걸어가는 마히토의 그 방식은, 어쩌면 미야자키 하야오가 걸어온 자신의 오랜 삶의 방식일지도 모른다. 


마지막, 마히토에게 주어진 선택의 기회는 마히토에게 과연 행운이었을까. 마히토가 그 기회를 거절했던 것은 그가 권력을 가졌음에도 모든 것을 포기했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능력이 거기까지 미치지 못하는 것 같다는, 슬픈 인정을 보여준다. 


세상을 완벽하게 만들 수 있다는 큰할아버지와 세상을 완벽하게 만드는 건 어렵다는 마히토는 멀리에 떨어져있지 않다. 많은 작품을 만들어내며 세상을 위해 노력했던 과거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모습들은 큰할아버지에 가깝고,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에서의 개인으로서의 미야자키 하야오의 모습은 마히토에 더욱 가깝다. 이 거대한 세상을 인간 하나가 구원할 수 있다는 이상은 터무니 없는 착각이자 지나치게 빛나는 환상이다.


마히토는 너무나도 어리지만, 너무나도 성숙하다. 그가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와 방식은 누구도 쫓아가기 어려울만큼 단단하고 섬세하다. 세계를 위해 고민했던 그 시간들은 마히토를 일찍이 어른으로 만들어버린다. 

그러나 한편으로 마히토는 자기 자신에게 있어 제대로 자라나지 못한 아이다. 세계를 고민하는 동안 스스로를 돌보지 못했고, 스스로에게 몰아치는 아픔과 감정들을 제대로 해결하지 못했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어린 시절로 돌아가 그때의 자아를 꺼내든 이유는, 아마도 그의 마음 안에 온전히 자라나지 못한 상처받은 어린 아이가 여전히 그곳을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영화의 제목은 감독이 무언가를 가르치기 위해, 자신이 원하는 대답을 듣기 위해 던지는 어른으로서의 말이 아니다. 그것은 여전히 혼란스럽고 거대하고 겉잡을 수 없이 휘몰아치는 이 삶을 대체 어떻게 살아가야 좋을지 알 수 없는 작은 아이가 관객들에게 던지는, 아주 수평적인, 혹은 아래에서 위를 향해 던지는 순수한 ‘질문’이다. 

영화의 끝에 도달했을때 그는 감독으로서 선택을 하지만, 그 선택은 지극히 개인으로서의 선택이었으며, 사실 선택보다는 운명에 대한 순응에 가까웠다. 


나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을지도 몰라요, 그렇지만 내가 지킬 수 있는 것들, 최소한 내가 해낼 수 있는 것들, 그런 것들을 바라보면서 살게요. 


이것이 마히토의 선택이었다. 이 슬프고 악하고 혼란한 세상을, 세상이라는 삶을 우리라는 개인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그것은 확실히 어려운 질문이지만, 반드시 해야만 하는 질문이다. 


거대악으로 뭉뚱그려진 사건들 속에 무수한 개인들이 존재하지만, 어찌하여 그들이 전부 악인이라고 탓하며 그들을 교정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한 사람으로서 불가능한 일이다. 다만, 우리는 삶을 하루하루 견뎌내며 매일 생각할 수는 있다.


“우리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감독의 이 질문에 용기 있게 주먹을 쥐며 대답을 떠올리기보다 감독의 아이일 적 얼굴이 자꾸만 떠올라 서글퍼지는 나는, 나약하고 감정적인 인간이다. 그러나 그 질문을 피하지 않고 받아들일 자신은 있다.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이 거대한 세상에서, 어쩌지 못해 태어나버린 나는,
이 삶을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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