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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뉘 Apr 11. 2024

즐기는 상태에 이르려면 심즈처럼

우리는 둘러앉아 조용하게 물갈비와 막창을 먹었다. 밤 열 시가 지난 후에야 밴드 연습을 끝내고 먹는 저녁이었다. 모두들 맛있다는 말만 반복해서 말했다. 배가 찰 때쯤에 밴드 멤버 중 한 명이 미용실 얘기를 꺼냈다. 그녀가 일하던 강남의 한 미용실에서는 손님의 발까지 씻겨준다. 손님이 들어오면 다 같이 웃으며 어서 오세요를 외친다. 영화에서 대통령을 응대하는 것처럼 허리를 숙이고 두 팔을 한 방향으로 돌려 복도로 안내한다. 발을 씻겨주고 손도 마사지 해준다. 그곳은 어디일까, 돈을 많이 모아 다음에 한국에 가면 들러서 환골탈태를 하고 싶다고 생각하던 참에, 보컬 리더가 내 이름을 부르며 말했다. 

"그럼 발은 Y 씨가 씻겨야겠네요?!" 

미용실의 가장 하수 직원이 손님들의 발을 씻긴다는 말이 나온 후였다. 농담으로 던진 말이었지만 정확했다. 11명의 밴드 멤버 중 나는 가장 늦게 들어왔다. 한국 회사처럼 이 밴드에서 계급이 얼마나 뚜렷하게 나뉘는지는 첫 연습 날 직감했다. 나는 화장실 청소 담당이라는 농담을 듣고서 힌트를 얻었다. 사람들이 앉아 있는 허리의 각도, 방향, 얼굴 표정만으로도 10년 가까이 같은 밴드에서 활동해 온 사람과 최근에 들어온 사람을  구별할 수 있었다. 


계급 사다리의 바닥에 서 있는 건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 시시덕거릴 때나 나오는 얘기이지, 음악을 할 때는 그 계급의 경계가 흐릿해진다. 베이스 기타, 일렉 기타, 어쿠스틱 기타, 피아노, 드럼, 타악기와 네 명의 보컬이 다 모이면 누가 어떤 소리를 내고 있는지 모를 정도로 소리가 섞여든다. 각자의 소리는 합쳐져 하나의 곡과 경험을 만들어낸다. 기타의 3번 줄을 치려다가 2번 줄을 잘못 건드려도 다른 소리가 그 실수를 무마시켜 준다. 혹은 그렇다고 착각하게 해 준다. 


하지만 그렇지 않은 순간이 며칠 전에 찾아왔다. 여행과 일 때문에 피아노, 타악기, 베이스 기타가 빠진 날이었다. 네 명의 보컬이 내 앞에 합창단처럼 줄지어 서서 나를 뚫어지게 쳐다보았다. 멜로디를 쳐줄 사람은 나뿐이었기 때문이다. 스튜디오가 비좁아 스피커 바로 옆 가장자리에 서있곤 했는데, 내가 무대 중앙에 서도 공간이 남았다. 내 기타 소리는 적당히 들릴만큼 키곤 했는데, 이번에는 모두에게 또렷이 들리게 볼륨을 키웠다. Chasing Cars 멜로디를 치다가 한 줄을 잘못 치니 보컬 한 분이 눈을 마주치셨다. 웃으며 다음 멜로디를 계속 연주했지만 발가벗겨진 느낌이 들었다. 손에는 땀이 삐질삐질 났다. 핑커스타일로 리듬을 살려 연주해야 할 때는 오른손이 내 손이 아닌 듯했다. 보컬이 내 손에 맞춰 열창하고 있으니 움직여야 해서 손가락을 움직이기는 했다. 하지만 뜻하는 대로 움직일지는 나도 보장할 수 없었다. 


연습할 때도 이런 순간이 종종 찾아왔다. 내 머리는 완벽하게 셔플 박자를 맞추고 있었다. 하지만 내 손가락은 머리의 명령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밴드에 가입하기 전에는 한숨을 몇 번 쉬다가 내일 또 하자며 기타를 내려놓았다. 다음 날에는 기타를 보면 피곤해져서 다시 들지 않았다. 그렇게 며칠이 흘러갔고, 나중에야 기타를 집으면 같은 부분에서 손이 말을 듣지 않았다. 이제는 그렇게 연습을 미룰 수가 없었다. 레드카펫이 깔린 곳에서 공연할 날이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한숨을 쉬고 내려놓으려다가도 관객 앞에서 쩔쩔매고 있을 내가 상상되었다. 


출처: https://www.flickr.com/photos/aaronpk/4796926191

내일로 미루고 싶을 때마다 나는 그 대신 게임 심즈를 떠올린다. 어릴 때 즐겨하던 그 게임은 내 캐릭터의 능력치와 욕구의 변화를 바 그림으로 보여준다. 친구들과 파티를 열거나 게임을 하면 사회적 욕구가 초록색으로 변하며 채워진다. 혼자 집에만 있으면 빨간색으로 변하고 정신이 위기상태에 이른다. 기타도 그냥 사준다고 해서 능력치가 최대로 오르지 않는다. 처음에는 음악을 듣고 영감을 받게 하고, 그다음에는 컨트리(Country)나 발라드를 치게 한다. 그럴 때마다 천천히 음악 바 그래프가 초록색으로 채워지고 능력 배지를 받는다. 여러 단계를 거치고 나서야 음악으로 팁을 받고 자기 곡을 쓰고 멘토로 누군가를 가르친다. 


나는 그 캐릭터가 나 일수도 있다고 상상한다. 언젠가는 내 곡도 쓰고 싶고 좋아하는 모든 곡을 자유자재로 연주하며 즐기고 싶다. 하지만 그 단계에 이르려면 조금씩 초록색 바를 채워야만 한다. 너무나도 명백하다. 하지만 그 중간에서 손가락에 생긴 굳은살을 만지고 있을 때는 이를 의심한다. 어제와 오늘의 연주는 너무나도 비슷하게 들린다. 어제와 오늘을 반복해서 한 달이 지난 후에야 다음 능력 배지를 받게 된다는 걸 잊게 된다. 내 미래는 정해져 있고 나는 그 중간에 서 있을 뿐이라고 자기 암시를 걸면 신기하게 그 과정이 조금 더 즐겁다.


오늘 밤 기타를 칠 때 내 초록색 바를 0.0003% 오른쪽으로 옮겼다고 상상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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