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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예뉘 Oct 04. 2023

파이어족 미리 체험하기

일찍 은퇴하면 행복할까?

스페인의 Saint Sebastián 국제 영화제에서 보고 싶은 영화를 보기 위해 아침에 눈을 뜬다. 아직 개봉하지 않은 영화 The Successor를 보고 나오니 영화 속 배우들과 감독이 웃으며 손을 흔들어준다. 너무 춥지도, 덥지도 않은 9월 말 날씨에 파도 소리를 들으며 서핑하고 태닝 하는 사람들을 구경하다가, '이제 뭘 할까?' 남편과 서로에게 묻는다. 책도 읽고 당기는 대로 젤라또와 버블티를 사 먹는다. 아주 비싼 식당이 아닌 이상 가격에 상관없이 입맛에 따라 레스토랑과 메뉴를 결정한다. 부드럽게 혀에 닿는 초밥과 후식에 감탄하다가 사랑하는 남편의 손을 잡고 삼십 분 걸어 숙소로 향한다.

Saint Sebastián에 있는 La Concha 해변가

 

30대 초반에 남편과 나는 짧게나마 은퇴한 삶을 살고 있다. 10년에 한 번은 짧은 안식기간을 갖자고 결심했고 이를 실행에 옮기고 있다.


다시 일을 시작하면 오늘의 하루하루를 꿈같은 시간으로 기억할 것이다. 나의 욕구를 충족하는 데 집중해 하루의 속도를 조절한다. 마음껏 게으를 수도, 바쁠 수도 있다.


바라고 기다리던 안식기간이고 이런 여유에 대부분의 시간에 감사와 행복을 느낀다.




그런데 종종 무언가 빠진듯한 느낌이 든다. 이게 권태인 걸까? 2주도 되지 않았는데 평생 이렇게 살아온 것 같다. 남이 듣기에는 이상적인 일상일 수 있지만, 왜인지 모르게 공허하고, 평생 이렇게 살 수 없을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처음에는 이게 일을 하면서 좀 더 생산적으로 살고 싶은 욕구가 아닐까 생각했다. 파이어족(Financial Independence, Retire Early)이 되기를 꿈꿔본 적도 없지만, 어쨌거나 이는 내게 답이 아닌가 보다 생각했다.


하지만 여행을 하며 더 생각을 해보니, 그게 아니었다. 마음 가는 대로 여행하는 지금 이 일상에 빠진 건 소속감이었다. 그룹에서 내가 필요한 역할을 하는 구성원이라는 느낌, 배우자 말고도 다른 이들에게 중요하고 필요한 사람이라고 느끼고 싶은 욕구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일하며 살아가고 있는 지금,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일터에서 이 욕구를 채운다. 회사에 가면 상사나 직장동료가 내게 무언가 요구를 하고, 내가 속해있는 회사라는 그룹에서 그 요구에 응하며 자신이 필요한 존재임을 확인한다.


그렇다고 이 욕구를 일을 통해 채울 필요는 없다. 사람들이 일하는 데 많은 시간을 쏟는 한국 같은 사회에서는 다른 곳에서 이 소속감을 느끼기가 어려울 뿐이다. 취미생활을 하면서 사람들을 만나는 것으로 이 욕구가 충족되진 않을까? 혹자는 의문을 제기할 것이고 나도 궁금해서 실험을 해보았다. 두 달 반 동안 일을 하지 않고 한국에 거주하면서 평일 오전, 오후에 기타, 노래, 피아노, 수영을 배우며 새로운 그룹에 속했다. 이게 분명 사람에 대한 욕구는 어느 정도 채워줬지만, 위의 욕구를 채워주지는 못했다. 본인이 돈을 지불하고 타인의 지식을 습득한다는 점에서 자신이 베풀며 그룹 내에서 역할을 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내향적인 사람은 혼자 은퇴하고 관심 있는 것을 파고들어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다. 하지만 관계에서 큰 기쁨을 얻는 나 같은 사람은 나 혼자 일을 안 하면 힘들 것이다. 내가 간절히 원하는 대로 음악밴드에 들어가더라도 그렇다. 팀원들이 모두 일을 한다면 일을 하면서 취미를 즐기는 사람들이 그 밴드에 투자할 수 있는 시간과 역량은 은퇴한 사람의 그것보다는 적을 확률이 크다. 따라서 나와 비슷하게 일할 필요가 없으면서 나만큼 커뮤니티생성을 원하는 사람이 주변에 많은 게 행복한 은퇴생활을 위해 핵심적이다.


이 안식기간이 끝나면 돈을 벌어야 하니 일을 다시 해야겠지만, 내 친구들이 모두 함께 이른 나이에 은퇴를 한다거나 그런 커뮤니티를 찾을 수만 있다면 미래에는 일 없이도 행복할 수 있음을 예상해 본다. 그게 얼마나 가능할지는 나뿐만 아니라 전체 사회의 흐름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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