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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리냥 Apr 11. 2024

앵두꽃은 그리움을 안고

살아가는 이야기

  할머니! 며칠 전 봄비가 제법 내리더니, 오늘 아침 출근길엔 앵두꽃이 활짝 피었더군요. 하얀 꽃잎들이 바람에 흔들리며 봄바람을 만끽하는 듯했어요. 가지마다 소담하게 피어난 앵두꽃. 예전 우리 집에도 할머니가 그토록 애지중지하던 앵두나무가 있었지요. 집 뒤꼍에 있던 앵두나무에 하얀 꽃이 피고, 꽃 진 자리로 초록색 작은 열매가 열리면, 앵두가 다 익을 때까지 우리 다섯 남매는 안달이 났었죠. 할머니는 부엌 문턱 다 닳겠다며 혀를 끌끌 차셨고요. 그 생각을 하니 피식 웃음이 나네요. 앵두꽃은 그날의 그리움을 안고 피는 것 같았어요. 저 또한 그날이 그리워 이렇게 할머니께 편지를 써요. 


  우리가 여름 햇볕에 얼굴이 빨갛게 익을 때쯤이면, 앵두도 빨갛게 익어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뒤꼍으로 달려가곤 했지요. 어떻게든 먹고야 말겠다며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던 우리는 덜 익은 앵두를 따다가 할머니의 불호령에 눈물 쏙 빼는 날도 많았었죠. 그러다가도 소쿠리에 가득 담긴 빨간 앵두를 우리에게 내미실 땐 환호성을 질러가며 달려들곤 했지요.


  며칠 전 할머니가 꿈에 보였어요. 쪽진머리에 말끔한 모습으로 오셔서 아무 말 없이 저를 가만히 들여다보시기에, 저도 말 한마디 못 하고 마주 보고 있었지요. 그렇게 저와 눈빛만 교환하다 가겠다며 일어서는데, 제가 할머니를 잡았던 것 같아요. 이젠 꿈속에서도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걸 이미 알고 있는데 말이죠.

  작은아이가 올해 스물일곱 살이 되었으니 할머니가 떠나신 지도 그만큼의 세월이 지났네요. 

작은아이가 태어난 뒤 보름 만이었죠. 남편은 장기간 해외 출장 중이었고, 두 살 터울 위의 큰아이까지 혼자 감당하고 있었기에, 할머니의 부음 소식에도 갈 엄두를 못 냈어요. 그보다 돌아가셨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못했어요. 그냥 멍한 상태로 세상이 멈춰버렸었죠.

  할머니 돌아가시고 몇 달 뒤에야 고향 집에 갔었지요. 할머니가 누워계시던 방 앞에서 발걸음이 멈췄어요. 서러운 맘, 두려운 맘, 죄송한 맘이 한꺼번에 몰려들었죠. 그래도 현실 같지 않아 눈물은 나오지 않았어요. 그런 내 모습에 남동생은 책망하듯 한마디 했죠. 할머니가 누나를 얼마나 많이 기다린 줄 알아? 마지막 숨을 거두실 때까지도 문 쪽만 바라보셨어. 끝내 눈도 못 감고 돌아가셨는데 어떻게 눈물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아? 누나 참 독하네.


  그런데요. 이제야 얘기지만 전 차마 울 수 없었어요. 너무 죄송해서 눈물 몇 방울로 속죄하며 용서를 구할 수 없었지요. 그냥 가슴에 묻고 두고두고 죄인으로 살자 했거든요. 그렇게 삼 년을 보냈어요. 그런 어느 날, 할머니는 처음으로 제 꿈속으로 찾아와 다독이며 말씀하셨죠. 이젠 괜찮다고, 정말 괜찮다고. 그날 이후 전 정말로 괜찮아졌어요. 그래서 한동안 울보로 지냈었죠.


  요즘도 가끔 할머니가 생각나곤 해요. 오늘처럼 앵두꽃이 활짝 피었을 때라든지, 할머니처럼 한복이 잘 어울리는 어르신을 뵈었을 때라든지, 시장판 귀퉁이에서 온갖 채소를 팔고 계신 할머니를 뵙는다든지, 그럴 때마다 마치 할머니 같아 가슴이 쿵쿵 뛰곤 해요. 그 순간 전 예전 할머니 꽁무니를 졸졸 따라다니던 어린 꼬마가 되거든요.

  봄이 되니 그 옛날 일꾼들 먹일 새참을 머리에 인 할머니 손을 잡고 논둑을 걷던 때도 생각나네요. 햇살이 그리 따사로울 수가 없었어요. 논둑 길 곳곳에 피어난 제비꽃도 참 예뻤고요. 일꾼들 식사하는 동안 할머니가 만들어 끼워준 제비꽃 반지가 너무 예뻐 깔깔 웃으면, 덩달아 환하게 미소짓곤 하셨죠.


  할머니, 제 간절한 소원이 있는데 들어보실래요? 좀 엉뚱하지만, 제 과거 어느 한순간으로 잠깐이라도 돌아가는 거요. 바로 27년 전 가쁜 숨 쉬며 누운 채 문 쪽만 바라보고 계실 할머니 곁에 가는 거요. 그 옆에 앉아 싸늘히 식어가는 손 꼭 잡아드리며 그동안 할머니가 있어 행복했노라 고백하는 거요. 그러니 제 걱정일랑 말고 편안히 잘 가시라 귓속말로 전해드리는 거요. 그게 제 소원이지요. 이런 내 마음 이미 다 알고 계시겠지만, 그래서 가끔 꿈길로 찾아오시는 거겠지만, 그래도 한 번은 꼭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오늘은 유난히 할머니가 그립네요. 그리운 날엔 편지를 쓰는 거라고 하죠. 보고 싶은 마음을 글자 몇 줄로 대신할 순 없지만 행복했습니다. 앵두꽃은 할머니와 함께한 날들의 그리움을 안고 피는 것 같아요. 그리운 할머니, 안녕히 계세요.      

                                                                                     앵두꽃 피는 봄날에, 맏손녀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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