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본다’라는 수식어엔 눈으로 본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물론 이 또한 내가 예측하는 범주 안에서의 표현이다. 하지만 시에선 눈으로만 보는 걸로 한정 짓지 않는다. 마음이 그렇고, 익숙한 향기가 그렇고, 오래 묵힌 잔상들로도 본다고 표현한다. 한강 작가의 시집 『서랍에 저녁을 넣어두었다』 또한 내겐 그렇게 읽혔다.
시집을 읽는 동안 여러 시에 시선과 마음이 머물렀다. 「어느 늦은 저녁 나는(11p)」, 「해부극장(44p)」,「조용한 날들 2(62p)」, 「괜찮아(75p)」가 그랬다. 이중 가장 오래 내 시선을 잡아끈 것은 「해부극장(44p)」이다. 사람이 사람을 대하는 자세가 고스란히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내 얕은 시심으로 이해하기엔 너무 깊어 읽다가 길을 잃고 마는 시어들.
시의 제목이기도 한 ‘해부극장’은 16세기 이탈리아에서 활동한 해부학자 안드레아 베살리우스의 책으로 수년간의 급진적 해부 연구 끝에 인간의 뼈와 장기, 근육 등 정교한 세부를 목판에 새겨 제작했으며 독특한 구도의 해골 그림들이 실려있다고 하단에 부연으로 적어놓았다.
시를 읽다 보면 단어 하나하나가 선으로 이어져 마치 베살리우스의 손끝을 따라가는 듯한 착각에 빠진다. 비스듬히 서 있는 해골과 그 옆 비석 위에 놓인 또 하나의 해골. 작가가 그림 따라 시선을 옮기며 시를 완성하면 나는 그 시어와 시어 사이의 행간을 좇으며 이미지를 추적해 간다. 어느덧 시는 둥근 해골을 따라 내려와 섬세하게 뻗는 손의 잔뼈까지 내려오다 잠시 호흡을 가다듬는다. 그리고 안구가 빠진 텅 빈 눈으로 비석 위에 놓인 텅 빈 구멍을 들여다본다. 한때 웃거나 울거나 환희로 가득했을, 그러나 지금은 텅 빈 동굴 같은 구멍을.
심장이 뛰고 피가 돌던 시절엔 마음과 마음이 닿을 수 없다. 죽음에 이르러 베살리우스의 예리한 칼날에 물컹한 살과 붉은 피는 몸에서 떨어져 나가고 뼈만 덩그러니 남아 나를 이룬다. 허물을 벗고 진정한 나와 진정한 네가 텅 빈 눈으로 마주한다.
한강 작가의 소설 『희랍어 시간』에서도 보면 말을 잃은 여자와 시력을 잃어가는 남자가 서로를 이해하고 이해받는다. 소설 속 안경이 깨져 앞을 볼 수 없게 된 남자는 자신의 두려움에 대해 말하는 중간에도 거기서 듣고 있냐며 그녀에게 간간이 묻는다. 그때마다 말을 잃은 그녀는 몸으로 소리를 낸다. 근처에 있고 당신의 말을 잘 듣고 있다고. 그리고 남자의 손바닥에 자신의 손가락으로 그들만의 소통을 시작한다. 손끝의 감각이 손바닥을 통해 마음으로 흘러 들어간다.
그 둘의 교점은 시선도 아니고 말도 아니다. 그건 인간과 인간의 접점인 마음이고 감각이다. 연민이어도 좋고 애틋한 감정이어도 좋다. 덜덜 떨리는 냉골 같은 세상에서 만나는 온기가 그 둘 사이에 흐르기 시작한다.
「해부극장(44p)」 또한 내겐 그렇게 다가왔다. 어떤 모습이든 나와 어느 한 부분이 닿아있기에 나 또한 받아들인 게 아닐까. 그런 면에선 사람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서로에 대한 존중과 살아오며 애쓴 것이 위로의 손길로 가만가만 다독여지는 순간들.
한강의 시 안엔 그런 위로가 가득하다. 아픔이나 절망 속에서도 네가 있기에 견딜만한 시간이고, 너로 인해 난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는 용기를 얻는다. 그래, 지금도 괜찮고 이후도 괜찮아질 거야. 우리가 나누는 온기만으로도 삶의 의미는 충분해. 그렇게 시로, 소설로 이야기하고 있다. 내가 한강 작가를 좋아하는 가장 큰 이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