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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전병화 Sep 11. 2023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는 섬 볼음도

헛된 자신을 내려놓고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는 섬

헛된 자신을 내려놓고 진정한 자아를 발견하는 섬  

   

  사람들은 가끔 자신의 과거를 뒤돌아보거나 눈앞의 현실을 직시하게 되면 지금껏 살아 온 자기 삶의 모습이 헛된 망상을 좇아 허둥대며 살아온 것 같은 당혹감에서 벗어나지 못할 때가 있다. 그런 순간이 오면 지금 자신이 놓인 그 공간과 시간 속에 평화롭게 머무르기는 어렵다. 어디론가 떠나는 것이 그런 아쉬움과 답답함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을 수 있다. 현실 공간을 잠시 벗어나는 방법도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나, 대체로 현실과 물리적으로 멀리 동떨어진 공간으로 가서 혼자만의 시간을 갖는 일이 가장 손쉬운 방법일 것이다. 

  교직 생활에서 정년 퇴임하고 두 번째로 섬 여행을 나선 곳이 볼음도다. 볼음도를 걸으면서 나는 머릿속을 채우는 몇 가지 그림을 떠올려 보았다. 교육 공무원으로 37년간 숨가쁘게 살아온 과거가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젊은 시절에는 학생들과 함께 열정적으로 꿈을 만들어 갔고, 학교 관리자와 교육청 관료를 거치면서 치열한 경쟁의 대열 속에서 고뇌도 아픔도 많았다. 이제 그런 세상에서 벗어나니 말할 수 없을 만큼 홀가분함에 정말 머리가 맑아졌다. 하지만 어느 날 갑자기 이 모든 것을 내려놓게 되니, 나는 누구이며 무엇을 하는 사람인지 분별이 서지 않았다. 한마디로 정체성이 사라진 것이다. 

  사람들에게 나는 무엇일까. 더 작게는 나에게 나는 무엇일까. 바야흐로 대답도 정답도 없는 고독이 시작된 것이다. 그래서 고독을 재울 방안으로 세상에 놓인 모든 길을 찾아서 그 길의 의미를 살려내고 싶었다. 하지만 외국의 길보다 우리나라의 길, 그것도 섬으로 나 있는 길을 걸으면서 나의 이야기들을 만들어 가고 싶었다. 물론 똑같은 길이라고 하더라도, 이런 나의 이야기가 모든 사람에게 공감받기는 어려울 것이다. 사람마다 인생을 어떤 시각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 해석되는 의미는 제각각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의 이야기가 어떤 누구에게는 인생의 의미를 더 크게 만들어 주는 일이 될 수도 있을 것이고, 골치 아픈 현실을 잊어버리는 데 쓰이는 약이 될 수도 있을 것이기에, 이렇게 내 맘대로 세상을 바라보고 그것도 모자라서 밖으로 내보내는 용기를 가지게 된 것이다. 

     

허수아비와 종이 매를 만나다.     

  볼음도, 이 섬은 잘 알려지지 않은 섬이다. 수많은 군중 속에 고독한 어느 인간의 모습처럼 닫혀 있고 머물러 있고 쉬고 있는 섬이다. 역동성도 없고 인간의 호기심을 자극할 만한 조물주의 선물도 받지 못한 섬이다. 오히려 차별받고 내팽개친 섬이다. 제법 큰 섬이면서도 다른 섬들의 항구처럼 속속들이 들어찬 어선의 위용은 없다. 항구도 제대로 없지만, 이 섬에 주민들과 함께 살아가는 배는 오직 두 척뿐이다. 조그마한 배 2척, 아마 위급한 상황에 육지나 다른 큰 섬으로 나가기 위한 행정선인 것 같다.

  볼음도는 북한과 너무 가까운 곳에 있다. 그래서 주변 해역에 배를 띄워 고기를 잡게 한다면, 실수로 북한과의 경계를 넘어서게 되거나 납치 또는 월북 등의 사건이 생겨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어선을 사용한 어업을 금지하고 있다. 그러니 배가 있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배가 필요 없는 섬, 있어도 제 역할을 할 수 없는 배를 상상하면서 사회에 존재하는 무수한 무의미한 인간의 군상들을 떠올리게 한다, 

  어떤 조직이나 일의 틈에 끼여서 자신을 잊고 세상의 흐름에만 초점을 맞추어 온 현대인들의 삶은 진정 의미 있는 것이었을까. 무의미한 일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시간을 바치고 청춘의 기쁨을 바쳐 왔을까 생각하면 우울함의 블랙홀에서 헤어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을 위해 해 왔던 것이 자신을 위해 아무 소용이 없는 일에 쓰였다고 하더라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어디로 사라지는 것은 아니지 않을까. 자기의 삶을 만들어 가려는 노력을 아예 하지 않고 포기한 군상들이야 돌아볼 필요가 없지만, 백방으로 노력해도 쉽사리 그 존재의 의미를 드러내지 못하는 안타까운 인간들에게 위로를 건네는 섬이 아마 볼음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대체로 사람들에게 주목받는 섬들은 그 허리에 높은 봉우리를 안고 있다. 바다와 만나는 어느 지점에서는 엄청난 기암과 절벽을 두르고 위풍을 뽐낸다. 하지만 이는 거센 바람과 성난 파도,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와 영겁의 세월이 만들어 낸 것이다. 기암절벽들도 자신들이 스스로 이루어 낸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기에, 겸손하여 과잉된 몸짓을 보이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려고 한다. 이에 비하면 자기 과시 욕구에 온갖 방법을 동원하는 인간과 비교하게 될 수밖에 없다. 

  볼음도는 과시하고 싶어도 드러낼 높은 산이 없다. 거대한 위용은커녕 나지막한 암벽이 바다를 막고 나서는 일도 없다. 오직 갯벌과 제방으로 둘러싸인 논과 밭이 볼음도를 지키고 있을 뿐이다. 그런 볼음도의 무욕의 자태처럼 볼음도 주민들도 그렇게 산다. 그들에게 잘나고 못남은 없다. 모두가 존중의 대상이 되어 다정한 이웃으로 살아갈 뿐이다. 사실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살아남기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좁은 섬에서 다양성과 개성을 발휘하고 살 수 있는 여건이 전혀 안 되기 때문이다. 여행객들이라도 몰려들면 딴마음을 먹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럴 여건이 아니다. 어선의 어업도 금지하니 모두 농업에 종사하면서 생활할 뿐이다. 마을 길 어디를 가도 농업에 필요한 농기구가 가득하다. 경운기는 기본이고 이양기 등 첨단 농업 기계들도 흔한 몸짓으로 마을을 지키고 있다. 하지만 그들에게 풍족하고 여유로움이 느껴지는 곳이다.

  접이식 자전거를 타고 바람을 느끼면서 천천히 볼음도의 반듯하게 정리된 들길에 들어서니 반기는 친구들이 나를 환호하면서 반겨 준다. 첫 번째는 허수아비다. 깨끗한 옷까지 단장하고 들판을 지키는 허수아비, 멀리서 바라볼 때는 진짜 사람이 지키고 서 있는 듯 착각을 주었다. 바람을 빌어서 옷깃으로 전해주는 그의 따뜻한 인사가 즐거움을 주었다. 요란하게 떠들면서 생색내가 인간의 환영보다야 훨씬 가벼운 마음으로 인사를 받을 수 있어서 좋다. 새들로부터 곡식을 보호하고자 하기보다는, 마을을 찾는 이방인들과 사라지듯 머물고 머문 듯이 사라지는 새들의 동무가 되기 위해 즐거운 마음으로 서 있는 것 같다.

  그리고 또 하나의 친구는 공중을 날아다니는 매이다. 물론 만들어 띄운 가짜 매들이다. 그 매들 역시 새들을 위협하는 몸짓이라기보다는 새들에게 먹잇감이 있는 장소를 알리고 먼 길을 알려주려는 역할에 맘을 두고 있는 듯이 친근한 낯빛이다. 바람을 주고 텅 빈 하늘에 비행하면서 지나가는 나그네의 퍽퍽한 삶의 공허함을 보듬어 주는 것 같아 따뜻하고 포근하다. 그 길을 지나가면 그래서 마음이 편안해지는 것이다. 말을 걸어 사람을 만나기는 어렵지만, 그들이 나그네에게 웃음의 춤사위를 즐기기 위해 볼음도는 제격인 섬이다.    

 

촌로의 웃음과 어느 농장에서 맛본 삼겹살의 짜릿한 감동     

  볼음도를 만나기는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다. 배를 타기 위하여 강화도 선수포구까지 이동해야 하는데, 하루에 세 번 있는 배 시간 때문에 대중교통을 활용하기는 어렵고 자가용을 이용해야만 다른 지역에서 접근하기가 쉽다. 물론 섬 여행은 적어도 하룻밤을 그 섬에서 묵어야 한다. 밤에 만나는 섬의 향기는 낮과는 사뭇 다르다. 밤바다의 노랫소리를 들어야 하고, 섬의 밤이 주는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그것은 신비로움 그 자체이다. 고요하다가 어느 순간 벼락을 내리는 듯하고, 시끌벅적하다가 어느 순간 고독에 젖게 하는 또 다른 이야기가 밤새 나그네의 곁에 머문다,

  하지만 볼음도는 밤 바닷가에서는 그런 이야기들을 듣기가 어렵다. 해가 떨어지기 무섭게 마을과 사람들은 바다와는 단절된다. 남북 분단으로 가로막힌 철책이 주는 무시무시한 현실 때문이다. 게다가 파도 소리가 섬을 둘러싸고서 북에서 겨누는 포성보다 더 위협적으로 으르릉거린다. 하지만 볼음도는 그럴 록 더 고요하고 평화로운 섬이 된다. 밤이 되면 남북 대치의 무섬증과 공포는 오히려 사라진다. 어둠 속에 위태로운 자연과 인공의 장면들이 묻히고 인간의 얼굴빛과 마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뜻한 불빛 아래에서 편한 정감의 시간을 가질 수 있다. 낮에는 해변의 친구가 되고, 밤이면 옹기종기 대화로 순박한 섬 주민들과 대화를 나누고 소주잔을 기울이면, 포근하고 먹먹한 감동에 세상사를 잊어버리게 된다.

  들길을 가다가 만난 촌로의 미소가 아직도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경계심을 버리고 촌로에게 가볍게 인사와 목례를 보내니, 그는 누런 이를 드러내면서 씩 웃어 주었다. 무슨 말을 하여야 할지를 몰랐겠지만, 그의 웃음에는 진심으로 이방인을 환영하는 반가움이 들어 있는 듯싶었다. 육지 사람들의 사랑을 덜 받는 섬일수록 주민들의 인간적인 정감은 높다. 외부의 사람들에 대한 경계심보다는 호기심이 더 앞서고 이방인에 대한 배려의 마음이 더 큰 것만 같다. 물질이 아닌 정신적 공감의 눈으로 바라보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또 길을 가다가 왁자지껄하며 즐겁게 놀고 있는 소리가 들려서 오지랖 넓게 농장으로 들어서서 말을 건넸다. 10여 명의 사람들이 모여서 맛있게 음식을 먹으면서 신명 나게 놀고 있었다. 그들의 중심에는 삼겹살이 묵은김치를 등에 태우고 자글거리며 고소한 기름을 뿜어내면서 익어가고 있었다. 편하게 차려진 상 위로는 숭어회와 농어회가 자리를 잡고 있었다. 객에게도 술잔이 건네졌다. 짧은 시간 동안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며 즐거운 오찬을 공짜로 즐기는 행운을 가졌다. 농장 주인은 오래전 육지에서 볼음도로 이주한 분인데, 그날은 외지에 사는 농장 주인의 친구들이 몰려와서 볼음도의 봄을 즐기는 것이었다. 볼음도에서는 여러 사람 동시에 만나기 어려운 일이다.

  볼음도의 회는 모두 자연산이다. 전문적인 식당이 없어서 양식으로 키운 고기가 들어올 수도 없고, 사 먹을 사람도 없다. 주민들 집집에는 말린 생선이 많다. 잡은 것을 팔지 못하니 먹고 남은 것들은 말렸다가 나중에 조리해서 먹는다. 그러니 이런 행운이나 민박집의 호사를 입지 않고서는 살아있는 생선을 맛보기가 어렵다고 하겠다. 볼음도는 어선의 조업 행위가 허락되지 않으니, 경운기를 타고 나가서 고기를 잡는다. 밀물 때가 되어 빠져나간 바닷물 대신 긴 뻘밭이 드러나면, 이 시간이 고기를 잡는 때다. 경운기들이 달려 나가서 미리 쳐둔 그물 속에 갇힌 고기를 걷어오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볼음도를 찾는 이방인들은 대체로 특별한 사람이 많은 것만 같다. 볼음도에는 넓게 누운 논밭이 있을 뿐, 여행객을 끌어당길 매혹적인 무엇은 없다. 수백 년 수령의 은행나무를 제외하면 특별히 볼 것도 없다. 아름답고 맑은 해수욕장이 있으나 일몰 이후는 군사 목적상 출입이 금지되므로 밤빛을 즐기려는 젊은이들의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므로 핫플레이스도 못 된다. 그러니 볼음도를 방문하는 사람들이라면 단순한 관광이나 놀이를 위해 방문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간혹 강화도 둘레길 스탬프를 완성하기 위한 트레킹 애호가들의 방문이 있기는 하지만 그들조차도 예사로운 사람들은 아닐 것이다.

  나는 그 섬에서 한 분의 특별한 사람을 만났다. 강화도 선수항에서 볼음도로 가는 배에서부터 그의 모습은 나에게 관찰의 대상이었다. 평범하지 않은 레트로 감성의 복장, 구렛나루 수염이 가득한 얼굴, 그러면서도 외모에서 무엇인가 풍기는 경외감이 예사롭지 않게 나의 관심을 끌었다. 하지만 특별히 다가서서 말을 걸어 볼 용기를 내지는 못했다. 혼자 여행하면서 처음 만나는 사람들에게 쉽게 다가서는 용기를 아직은 익히지 못한 탓이다.

  그런데 볼음도는 나에게 또 다른 행운을 안겨 주었다. 볼음도의 들길을 접이식 자전거로 바람을 따라 달리다가 멈춰진 거대한 은행나무 아래에서 그를 다시 만났다. 운명이라도 생각이 불쑥 와 닿았는지, 나도 모르게 말을 걸었다. 그는 예상대로 여행객이 아니었다. 섬 노인들에게 이발 봉사를 다니려고 사전 답사를 왔다고 했다. 앞으로 그와 엮이는 일이 좀 있으면 좋을 듯하다. 나는 이발 봉사는 못 해도 이발한 노인들의 머리를 감겨드리는 봉사는 할 수 있을 것 같아서다. 하지만 그가 남긴 말이 뒷맛을 씁쓸하게 했다. 섬사람들이 별로 반가워하지 않는 기색이네요. 먹고 살기가 풍족해서 그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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