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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걷는 나무 Jan 16. 2024

귀한 손님이 떠날 때면

  

  지난밤 비가 오는 걸 알고 잠들었는데, 굵어진 빗방울이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잠에서 깬다. 깨고 나면 잠은 이미 내 것이 아니다. 불면증으로 많은 밤을 맞이하다 보니, 가끔씩 주어지는 깊은 잠은 귀한 손님이다. 요란한 비 때문에 귀한 손님이 내 품에서 떠나 버린다. 나에게서 못다 잔 잠은 다른 곳에서 다시 잠을 청하겠지.  


'잘 자요' 

 인사를 건넨다.  


혼자 깨어나 있는 시간, 이런저런 생각이 떠오른다. 


'잠을 자다 자꾸 깨는 것이, 일주일에 두 번 복용하는 약의 부작용 때문인가?'
'오늘 도서관 대출반납하려고 했는데 피곤해서 가기 귀찮네, 대출기한이 언제였더라?'
'아참! 부재중 전화가 있었는데 연락을 안 했네.'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생각 끝에 오늘은 내가 먼저 그녀를 불러낸다.




  나는 전화를 먼저 하는 성격이 아니다. 그래서 언제나 주변에서 연락이 왜 이렇게 안 되냐며 서운하다는 이야기를  곧 잘 듣는다. 하지만 그 소리를 들어도 전화가 먼저 걸어지지 않는다. 내가 그들의 바쁜 일상의 리듬을 깨트려 귀한 시간을 낭비시키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에 망설인다. 결국 이름을 검색해 놓고도 끝내 통화하기 버튼을 누르지 못하고 핸드폰을  내려놓는다.


이런 내게 가끔 전화해 안부를 묻는 친구가 있다. (생각해 보니 언제나 그녀가 전화를 한다.) 요 며칠 긴 여행으로 휴대전화를 소홀히 해서 전화를 못 했고, 연락하는 타이밍을 놓쳐버려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런데 카톡이 왔다.


외삼촌께서 갑작스럽게 돌아가셨단다. 혼자 계시다 뇌출혈이 왔고, 아무도 없이 지켜봐 주는 이 없이 홀로 그렇게 떠나셨다고. 위에서 누군가 죽거나 큰 병에 걸려서 힘들어한다는 소식을 들을 때면 내가 떠오른다는 그녀. 그러니 잘 있다는 문자 하나만 남겨달라는 메시지.


그녀의 마음을 알기에 바로 전화를 들어 이름을 꾹 누른다.


  몇 해 전 나는 희귀병을 진단을 받고 초기에 힘든 치료과정의 시간을 지나왔다. 지금은 정기적으로 병원을 다니며 치료를 받고 있는 걸 그녀도 알고 있기에, 혼자 지내고 있는 내가 혹여나 병이 더 나빠진 것은 아닌지,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 아닌지, 연락이 되지 않는 동안 걱정을 했다고 한다. 고마운 마음과 미안함이 교차했다. 그리곤 나를 걱정해 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에, 내가 현재에 존재하고 있음을 확인받는 기분이 들어 심장이 저릿했다. 


돌이켜보니 누군가에게든 걱정의 존재인 것이 싫어서 열심히 살았던 때가 생각났다. 구성원들에게 걱정을 시킨다는 건 그곳에서 존재의 가치가 없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필요 없는 존재라는 낙인이 찍힐까 봐 두려웠다. 그래서 아파도 아프지 않은 척, 힘들어도 힘들지 않은 척, 도움이 절실하지만 잘 해낼 수 있는 척했다.


그렇게 척하고 사느라 '척척이'가 되었다. 누가 봐도 혼자 똑 부러지게 잘 살아가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또한 필요한 존재로 살아남기 위해  힘들어하는 나를 무시하는데 필사적이었다. 그렇게 만들어낸 '척척이'들이 나를 대신해 살아내느라, 병들어 가고 있는 나를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 '척척이'로 살다 턱 하니 병에 걸리고 나니, 이제야 다 부질없는 '척척이'였다는 걸 깨닫는다.


  이제는 '척척이'와는 이별이다. 덕분에 지나온 시간들을 버틸 수 있었기에 고마운 마음을 담아 인사한다. 지금까 힘들어하는 걸 알았면서도 모른 척했고, 참 많이도 아프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견뎌준 '척척이'에게 너무 미안하고, 고마웠다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이제는 더 이상 찾지 않을 테니, 편히 쉬길 바란다는 말과 함께 안녕을 고한다.


이젠 아프면 아프다고, 힘들면 힘들다고, 도움이 필요하면 필요하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내게 있으니까. 그들이 있어서 오늘도 감사할 일이 더 많이 생길 것 만 같은 기분이 든다.


이렇게 오늘도 쓰레기수거차량이 후진하며 들어오는 경고음으로 새로운 아침은 시작된다. 귀한 손님이 오늘은 다시 오지 않을 거란 걸 알지만, 아직은 침대를 떠날 생각은 없다.


이불을 머리 위로 뒤집어쓴다.

귀한 손님이 떠난 자리에 좀 더 몸을 포개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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