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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로진 May 17. 2024

유목적 공동체(Nomadic Ecclesia)로의 전환

1. 초대 시대

교회 공동체가 세워진지 이천 년이 넘어가고 있고 로마가톨릭을 벗어나 성경으로 돌아가기 위해 종교개혁이 일어난 지도 오백 년이 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여전히 교회에 대한 많은 오해로 인하여 기독교계뿐만 아니라, 세상 사회에서도 시끄럽다. 왜 이런 현상들이 끊이지 않는 것일까? 

교회의 역사가 흐르는 동안 지금까지 수많은 학자들이 교회론을 연구하며 신학적인 체계를 세웠기 때문에 나는 기존의 신학적 관점에서의 교회론을 더 이상 언급하고 싶지는 않다. 왜냐하면 일부 개신교 신학자들조차도 교회론을 정의할 때 로마가톨릭의 시각에서 바라보며 정의하기 때문이다. 로마가톨릭적 시각에서의 교회론은 주로 건물 중심, 정치적 종교집단, 엘리트 성직자 혹은 제왕적 교회 리더십을 주장한다. 나는 이 글에서  로마가톨릭이라고 언급하고 있지만 사실 동방정교회들도 비슷한 맥락을 갖고 있다. 나는 이번 글들을 통하여 4세기 기독교가 공인(313년)이 되고, 로마제국의 국교로 공포(392년, 테오도시우스)된 후에 생겨난 교회론이 아니라, 좀 더 신약 성경적인 관점에서, 특별히 당시 중근동 지역의 유목적인 관점에서 교회 공동체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말하고자 한다.


1. 초대시대의 교회는 어떠했나?

교회(Ecclesia)는 건물이 아니라 공동체(고린도전서 1장)를 말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하여 거룩한 성도가 된 자들의 모임을 교회라고 한다. 이것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오해를 하여 건물로 생각하는데, 일부 개신교 목사들조차도 그렇다. 아직까지도 개신교계 안에 얼마나 많은 중세 로마가톨릭과 동방정교회의 잔재가 남아 세뇌를 시키고 있는지 놀라울 따름이다. 종교개혁 500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청산하지 않은 많은 요소들이 남아 있는데, 어떤 경우에는 비즈니스적 차원에서 이용하기까지 한다. 그중의 하나가 ‘성지 순례’이다. 


신약 성경적 관점에서 ‘성지’란 존재하지 않는다. ‘성지’란 개념은 4세기 기독교가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 정식 종교로서 인정을 받은 후, 황제의 어머니 ‘헬레나’를 기쁘게 하기 위해 창의적으로 만들어낸 아이디어가 ‘성지순례’이다. 효성이 지극한 아들을 둔 덕에 인생 말년에 호강한 ‘헬레나’는 기독교 최초의 성지순례자가 되었다. 이 성지 순례가 이슬람 사회에도 영향을 주어 지금까지 무슬림들이 메카로 성지 순례를 하고 있다. 최초로 성지 순례를 떠난 ‘헬레나’는 콘스탄티노플(현:이스탄불)을 떠나 배를 타고 비두니아/무시아지역(현:부르사 도)에 도착하여 그곳에서부터 육로를 따라 최단거리 이동을 시작하였는데, 비시디아와 갈라디아 지역 경계에 있던 이고니온(현:콘냐 도)을 거쳐 현 튀르키예 남부지역인 길리기아 다소를 지나, 2023년 대지진을 겪은 수리아 안디옥(현:하타이 도, 안타키아)을 따라 예루살렘까지 갔다.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그의 어머니가 머물렀던 주요 지역에 기념 건물을 건축하여 ‘성 소피아(거룩한 지혜)’란 이름을 붙였다. 그래서 튀르키예의 콘스탄티노플(현:이스탄불), 니케아(현:이즈닉). 이고니온(현:콘냐) 등과 이스라엘 지역에 아직도 ‘성 소피아’로 불리는 기념 건축물들이 남아있다. 


개신교 입장에서는 ‘성지 순례’가 아니라, ‘초대 기독교 시대의 유적지 여행’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적당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나는 지금까지 수차례 이런 ‘초대 기독교 시대 유적지 여행’ 안내를 도와준 적이 있는데, 그때마다 많은 개신교 목사님들은 ‘초대교회가 어디 있느냐?’고 질문을 했고, 나는 목사님들에게 교회의 성경적인 의미를 설명하기에 바빴다. 그것도 몇 번이나 반복하여 설명을 해야만 했다. 일반인인 내가(그 당시에 나는 신학을 공부하지 않았다), 신학을 공부한 목사님들에게 말이다. 이 얼마나 웃지 못할 일인가! 그만큼 개신교계는 여전히 로마가톨릭이 만들어 놓은 교회의 전통 개념 속에 갇혀있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성경적 교회의 탄생은 대부분 기독교인들이 알고 있듯이 예루살렘 교회 공동체에서 시작되었는데, 예수님의 제자 스데반의 죽음으로 인하여 예루살렘에 큰 핍박이 생기면서 공동체 멤버들은 흩어지게 되었고, 그렇게 흩어진 성도들에 의해 로마 제국 지역 곳곳에 여러 공동체들이 형성되었다. 그중에 가장 활발하게 움직였던 공동체가 수리아 지역의 안디옥에 있던 공동체이다. 이 공동체에 의해서 최초의 ‘이방인 중심의 교회‘와 ‘이방인 선교’ 그리고 ‘그리스도인’이란 칭호를 얻게 되었다. 성경적으로 보면 세계 선교의 시작점이 ‘수리아 안디옥’ 교회라 해도 무방할 것이다.


그 당시는 로마 제국에 의해 압제를 받고 있는 시기라서 공동체는 비밀리에 모여야 했다. 모일 때마다 엄청난 긴장감, 위기감으로 인해 철저히 성령의 인도함을 받아야 했고, 위험을 무릅쓰고 가정이나 시장의 한 장소에서 혹은 아무도 없는 야외에서 모이고, 때로는 무덤에서 모여야 했다.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초대 교회 당시는 특정한 장소에 국한되지 않았고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비밀리에 모이는 곳이 곧 교회(Ecclesia)가 되었다. 이러한 교회의 형태는 네로 황제로부터 국가적 차원에서 본격적으로 박해가 시작된 후 250년간 계속된 극심한 핍박 속에서도 교회가 살아남을 수 있게 했다. 현대에 와서 이러한 교회의 형태를 ‘가정교회’, ‘셀교회’, ‘소그룹교회’ ‘직장교회’ 등으로 다양하게 불려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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