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의 연기를 처음 마주했을 때, 기존의 배우와는 '조금 다르다'란 느낌을 얻었다. 그것은 약간 어색한 것일 수도 있고, 경직된 혹은 차별화된 느낌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선명한 발음과 흐름에 그다지 몰입되지 않는 표정은 어떤 면에서 신선하기까지 했다. 연예인보단 배우란 느낌이 역력했다. 하물며 배우에게도 흐름과 서사가 있게 마련. 몇 년간 왕성한 활동을 보이다가 어느샌가 기억의 회로에서 까맣게 잊은 것처럼, 그는 사라졌다.
근래 들어 몇몇 배우의 화가 작업이 두드러지고 있다. 어느 면에서 예술은 모두 일맥상통하는 바가 있으니 무리도 아니다. 일찍이 러시아에서 연기 공부를 했다는 것 외에는 자세히 알지 못하는 그였는데, 이렇게 화가가 되어 우리에게 나타났다. 더욱이 이 책은 배우와 작가의 호흡을 모두 지닌 박신양 그리고 철학가 김동훈의 코멘트가 어우러져서 마치 두 세계를 어우르며 여행하는 기분까지 들게 한다. 작가의 작품이 빼곡히 들어찬 것으로 마치 도록과 같은 느낌마저 들게 한다.
배우의 길, 러시아에서의 유학, 고마운 친구와 스승, 그리고 얼굴과 연기, 발음, 당나귀까지... 저자의 생각과 삶의 궤적이 펼쳐진다. 그것은 우리가 으레 짐작할 수 있듯 결코 쉬운 과정은 아니었다. 또렷한 결단 그리고 현실에서 감당해야 하는 복합적인 문제들이 얽혀있다. 그리고 그 무거운 짐과 힘든 시기를 이겨낸 이후에야 추억이 되고 소회가 되어 이렇게 활자로 다시 거듭난다.
집요하리만큼 하나의 주제를 파고들며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지는 박신양의 고충은 그림으로 다시 한번 태어난다. 그리고 그가 고민한 의미를 철학자 김동훈은 그만의 시각을 살려 다시 한번 곱씹어준다. 배우로서는 정점을 경험한 그지만, 아직 화가로서는 가야 할 길이 멀게만 느껴지는 것은 스크린에 투영되는 연기의 찰나보다 캔버스에 남는 붓 칠의 흔적이 더 오랫동안 박제되기 때문은 아닐까. 연작으로 살펴보는 그의 작품 세게는 그가 적어 내려간 활자와 함께 여러 생각을 들게 한다.
두 아이를 키우는 부모의 마음으로 인생은 그야말로 아주 긴 여정임에 틀림없다고 늘 생각한다. 단 하나의 직업으로 그 여정을 이겨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란 것도... 그리고 나 역시 여러 직업을 거치면서 위태로울 수 있으나 설레는 마음으로 '다음'을 준비하기도 한다. 이 책은 배우와 화가라는 어쩌면 보통의 사람이 경험하기엔 다소 괴리감이 느껴지는 분야이긴 하나, 충분히 그 속에 녹아든 주체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는데 큰 도움이 된다. 성장통 그리고 이겨내는 과정에 대한 세밀한 묘사가 아름답다.
책을 끝까지 읽고 덮었다. 4일간 배우 박신양과 하루에 한 번씩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눈 기분에 젖어 들었다. 훗날 그를 우연히라도 마주치게 된다면, 마치 오래된 친구처럼 형처럼 인사를 전할 것만 같다. 일상의 온도를 지닌 종이를 통해 나는 그의 뜨거운 체온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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