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음악 모임을 통해 인연을 맺은 지인을 십수 년 만에 만났다. 그는 내게 평범하면서 보통의 일상, 행복을 누리고 있는 모습이 참 보기 좋다며 부럽다고 말했다. 멋쩍게 들렸던 그 말이 그때는 제법 가볍게 들렸다. 그로부터 몇 년이 흘렀고, 40대 중반을 넘어서는 요즘은 '일상'과 '보통'이란 단어가 그 어떤 것보다 무겁고 진중하게 느껴진다.
일찍이 은행 빚을 싫어해 아파트 따위 장만은 포기했다. 비록 전세지만 방 3개에 여유 공간도 제법 있어 네 식구 살기 나쁘지 않다. 20년 넘게 서점을 운영하다 얼마 전 은퇴한 집주인이 마냥 고맙다. 10년을 살면서 두 번째 보증금 인상을 곧 맞이하지만, 알뜰한 아내 덕분에 큰 문제 없이 치를 수 있게 되었다. 언젠가는 되돌려 받는 돈이라 생각하면 이자 없는 저축이라 맘먹는다.
결혼하면서 쓰기 시작한 가계부에는 1원 단위 수입과 지출까지 꼼꼼하게 담는다. 한 달 단위로 들어오고 나간 것들의 가지런한 정리 정돈은 우리 가족은 물론, 양가 어르신과 함께 지내는 삶의 궤적을 숫자와 항목으로 표현한다. 이맘때쯤, 지난 한 해를 가계부를 통해 들여다보는 것은 제법 쏠쏠한 재미를 준다.
내 맘대로 써도 되는 용돈이 있다. 이 중 2만 원을 정당과 어린이 재단에 후원하고, 남은 6만 원으로 책도 사고 CD도 사고, 지인들과 술도 마신다. 턱없이 부족한 수준이지만 아끼고 아끼면 여윳돈도 적잖게 모아진다. 이를 갖고 1년 단위 정기예금을 들고 그 이자가 통장에 찍히면 그 느낌이 쏠쏠하다. 아내에게 오픈할 수 없는 출처불명(이라고 해두자)의 수입도 한몫 거든다. 이런 비밀이 너무 많아도 안되겠지만, 전혀 없는 것보단 즐겁다.
어린이날, 생일, 크리스마스까지. 두 아이에게 공식적으로 선물을 주는 날이 1년에 세 번 있다. 평소에도 필요하다고 하는 건 거의 챙겨주는 덕분에 특별하게 갈망하는 무언가가 없는 눈치다. 내가 자라던 시절과는 그야말로 격세지감이 느껴지는 부분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투박한 손길로 포장까지 맞춰 전하는 기분은 언제나 달콤하다. 돈은 이런 맛에 쓰는 것이 맞다.
매주 금요일 저녁은 외식을 한다. 열심히 일주일을 보내온 우리 가족 모두에게 베푸는 일종의 소박한 특식이다. 종교는 없지만 별 탈 없이 그렇게 일주일이 거듭나면 금방 1년에 이른다. 초등학교에 다니는 두 아이의 학사 일정을 따르면 정말이지 1년은 순식간이다. 억울한 건 자꾸 나이 먹는 것뿐. 그것 외엔 모든 것이 만족스럽다. 이젠 첫째의 키가 나와 제법 맘먹는다.
일주일 전에는 첫째가 학교에서 넘어져 손가락 인대가 살짝 부어 귀여운 깁스를 했다. 어제는 둘째가 미끄럼틀에서 넘어져 이마가 찢어지는 사고를 겪었다. 응급실에서 아내가 보내온 사진을 직장에서 보고 있자니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게 없는 그 순간의 절망감과 허탈함이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퇴근하고 돌아와 저녁을 먹으며 꿋꿋하게 참고 견디면서 낮에 있었던 일을 내게 들려주는 이제 겨우 열 살 아이의 얼굴을 보니 흐뭇하고 동시에 또 먹먹해왔다.
밤사이 눈이 조금 내렸다. 두 녀석은 주말이면 하루 3시간씩 할 수 있는 스마트폰 게임을 나란히 붙어 앉아 즐긴다. 아내는 유일한 취미인 웹 소설을 읽고 있다. 남은 방에서 나는 이렇게 지금의 풍경을 글로 스케치한다. 이른 아침 돌린 빨래가 건조기에서 뽀송뽀송해지고, 점심 메뉴를 선정해야 할 때가 임박해 온다. 플레이어에 올린 CD가 마지막 트랙에 다다른다.
가장 보통의 일상이 흐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