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박완서
"내가 너를 어떻게 키운 자식인데 장가들자마자 네 계집만 알아,
이 불효막심한 놈아.
일가 친적, 가족모임을 거하게 치룬 명절, 하필이면 이 때 딱 마주친 문장...
박완서 작가의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 책에 나오는, 뼈 때리는 문장이다. 그런데 이어지는 다음 문장이 더 따끔하다.
이런 큰 소리를 안 쳐도 억울하지 않을 만큼, 꼭 그만큼만 아이들을 위하고 사랑하리라는 게 내가 지키고자 하느 절도다. 부모의 보살핌이나 사랑이 결코 무게로 그들에게 느껴지지 않기를, 집이, 부모의 슬하가, 세상에서 가장 편하고 마음 놓이는 곳이기를 바랄 뿐이다.
<모래할만 한 진실이라도>, p.150, 박경리 에세이
엄마 마음같이 살갑지 않은 아들에게 적당히 내 욕심과 섭섭함을 드러내고야 말았던 참에, 부모가 자식을 위하는 마음의 절도, 참 사랑의 무게 앞에 내 부끄러움이 커졌다.
지금까지 작가라는 호칭으로 부를 때마다 마음을 짠하게 울리는 세 분이 있다.
박경리 작가, 박완서 작가, 한 강 작가이다.
요즘처럼 '작가'라는 말이 흔한 떄가 있었을까 싶다.
작가란 단어는 화가나, 피아니스트, 작곡가등 만큼이나 일반인으로서는 범접하기 힘든 '진중한' 단어로 여겨졌다. 그런데 어느 순간 내 기준으로 작가라는 말의 무게가 한없이 가벼워졌다.
넓은 의미로 '작가'라 불려지는 요즘의 대부분의 작가님들은 또다시 내 기준으로 보자면, '스토리텔러'에 가깝다. 특히 수많은 자기계발서, 에세이, 심지어 필사책에 이르까지 자기의 이름으로 인쇄된 책이 나오기만 하면 자연스럽게 작가로 불려지는 현실에선 더욱 그렇게 느껴졌다.
작가라는 단어가 작고 가벼운 허들같아서 누구나가 작가임을 자처할 수 있다는 것은 매우 밝고 활기찬 분위기임에 틀림없다. 이런 기분좋은 변화와는 별개로 나는 그 대부분의 책들에서 치열하게 '글을 짓는' 이의 모습보다 자신만의 특별한 경험, 치유, 성과, 실패의 과정을 전하는 탁월한 '스토리텔러'의 이미지를 지우기가 어렵다.
그런데 박경리 작가나 박완서, 한 강 작가의 작품을 읽을 때면 단순히 전하는 이야기뿐만 아니라 그것을 표현하는 문장 하나하나의 깊이가 어마무시하다는 생각을 한다. 그 한 문장, 한 단어를 취하기 위해 그들이 얼마나 사력을 다해 사유했는가를 느낄 수가 있어 더욱 그러하다.
<모래알만 한 진실이라도>라는 책에서도 그런 주옥같은 문장과 감정들을 발견하며 설레이고 또 설레였다.
몇 번이고 읽던 페이지를 멈추고 반복해서 읽은 문장들이 수두룩 하다.
이 책은 박완서 작가가 1970년부터 2010년까지 생전에 쓴 660여 편의 에세이 가운데, 추리고 추린 글들을 모아 반행된 에세이집이다. 총 6개의 장으로 34편의 에세이가 담겨있다.
개인적 에세이이기에 생각지도 못했던 성품의 단면, 솔직하고 거짓없는 속마음, 거침없는 고백, 작가로서의 철학, 일상의 작지만 빛나는 에피소드 등이 읽는 재미까지 더하며 '인간 박완서'의 모습에 가까이 다가가게 만드는 책이다.
우리가 아직은 악보다는 선을 믿고, 우리를 싣고 가는 역사의 흐름이 결국은 옳은 방향으로 흐를 것을 믿을 수 있는 것도 이 세상 악을 한꺼번에 처치할 것 같은 소리 높은 목청이 있기 때문이 아니라, 소리 없는 수많은 사람들의 무의식적인 선, 무의식적인 믿음의 교감이 있기 때문이라고 나는 믿고 있다.
¶ 수많은 믿음의 교감, 선함을 믿는 마음이 세상을 살아갈 만한 곳이라는 생각을 하게 한다.
인생이란 과정의 연속일 뿐, 이만하면 됐다 싶은 목적지가 있는 건 아닙니다.
¶ 삶 자체가 과정이기에 ing를 먼추면 삶도 멈추는 것임을 깨닫는다.
근심도 기쁨도 없이 목석처럼 살아낼 수 있으리라고 믿은 건 거짓말이었다. 입으로는 살고 싶지 않다고 하면서도 얼마나 살고 싶으면 그 작은 생명에게 마음을 붙이고 울고 웃고 하였을까. 그 애의 생명력이 눈부시다면 내 생명력은 또 얼마나 징그러운가. (.....) 그 한장의 사진은 잊고 지내던 당시의 태산같은 고통과 함꼐 온갖 자질구레한 기쁨과 슬픔을 불러내어 나를 부끄럽게도, 하염없게도 한다.
¶ 아들의 죽음으로 인한 절망감을 손녀를 통해 치유해 가면서도 그녀는 끝없는 죄책감에 자신을 돌아본다.
그 조그마한 게 피어나기 위해 악착같이 뿌리 내린 흙의 저 깊은 속살의 꿋꿋함과 그 조그마 것까지 골고루 사랑한 봄바람의 어질고 부드러운 마음까지를 맡을 수 있을 것 같았다.
¶ 작디 작은 민들레꽃 향기에도 우주의 섭리가 스며있음을 묘사하는 문장 앞에 감탄하고 또 감탄하게 된다.
비켜나 있음의 쓸쓸함과, 약간 떨어진 위치에서 사람사는 모습을 바라보며 그 거리를 가장 잘 보이게끔 팽팽하게 조절할 떄의 긴장감은 곧 나만이 보고 느낀 걸 표현해 보고 싶은 욕구로 이어졌다.
¶ 어린 유년시절 '시골뜨기'로 소외받던 상처는 작가로서의 훌륭한 시선을 가지게 했다고 고백한다.
박완서 작가는 '작가'의 시선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이 말을 몇 번이고 읽으며 진정한 '작가다움'이 단순한 스토리텔러에 비해 어떻게 다른지를 분명히 알수 있게 되었다.
작가의 눈엔 완전한 악인도 완전한 성인도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사람한테 미움받은 악안한테도 연민할만한 인간성을 발굴해 낼 수 있고,
만인이 추앙하여 마지않는 성인한테서도
인간적인 약점을 찾아내고쟈 하는 게 작가의 눈이다.
그리하여 악인과 성인, 빈자와 부자를 층하하지 않고
동시에 얼싸안을 수 있는 게 문학의 특권이자 자부심이다. (p.236)
시간이 나를 치유해준 것이다. 이 나이까지 살아오면서 깨달은 소중한 체험이 있다면 그건 시간이 해결 못할 악운도 재앙도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신의 다른 이름이 아닐까.
¶ 시간이 곧 신의 다른 이름이라는 사실은 얼마나 경이로운 사유인가? 어떤 절망이나 희망도 시간 앞에서는 이기지 못한다는 것, 이 자체가 지혜로운 신의 섭리임을 꺠닫게 된다.
가을만 되면, 유독 박완서 작가의 작품을 읽고 싶은 강렬함이 솟구친다. 그녀의 문장이 그립고 그 속에 푹 빠져있고 싶은 욕구가 일렁인다. 올해 또한 이렇게 박완서 작가의 책으로 가을 맞이를 한다.
또 다른 작가님의 책으로 이어질 가을의 시간들이 벌써부터 설레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