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팔티가 싫었다.
반팔티가 안 어울리는 사람이 있다. 반팔만 입으면, 갓 구워 나온 통통한 식빵 같다. 어깨도 한 세배쯤 더 둥글어 보이고, 없던 배도 나와 보인다.
게다가 굳이 보여주지 않아도 되는 짧고 똥똥한 팔뚝을 드러내야 한다. 제일 정이 안 가는 건 반팔티의 넥라인이다. 높이 올라오는 라운드넥 반팔티는 목을 두껍고 짧아보이게 한다.
그래서 반팔티는 내 눈 밖에 났다. 여러 해 동안 잠옷, 운동용, 요리용, 작업복 취급을 받으며 핍박받았다. 물론, 햇빛 알레르기기 때문에 반팔을 선호하지 않은 이유도 있었다. 그러나 미용적인 이유로만 봐도 반팔티는 내게 굴욕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직업을 갖게 된 이후로는 반팔티를 사입은 적이 거의 없다. 가지고 있던 반팔티는 운동용이거나, 대학생 때 샀거나, 엄마 옷장에서 훔쳐온 것이다. 그리고 그 몇 없는 반팔티를 가지고 제주에서 공유오피스 일을 시작했다. 그런데 나는 제주의 여름이 어떨지 몰라도 너무 몰랐다.
공유오피스의 공간 여기저기를 헤집고 다니는 것은 그야말로 전쟁이었다. 가만히 있어도 땀이 흐르는 여름날, 쉴 새 없이 움직이고 공간을 돌보다 보면 얼굴 부기가 절로 빠진다. 그뿐이 아니었다. 그렇게 더위와 씨름을 해놓고도, 해가 지면 저녁에 크로스핏을 하며 땀을 잔뜩 빼고 다녔다. 그래서 긴 팔로 여름을 나는 건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돼버렸다.
하루, 이틀, 시간이 지날수록 눈앞이 캄캄해졌다. 가지고 있는 반팔로 연명하기엔 무리다. 반팔을 살 것인가, 돌려 입을 것인가, 아니면 가지고 온 긴팔을 꺼내 입을 것인가.
'반팔티를 사야 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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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오일장에 가서 소심하게 반팔티 두장을 샀다. 그때만 해도 반팔티가 주는 굴욕감을 받아들일 마음의 공간은 딱 두장 정도였다. 그런데, 오일장이 주는 매력 때문인지 제주시골에 취했는지 시간이 지날수록 그 반팔티에게 애착이 생겼다. 건조기를 돌릴 때마다 '그만 줄어들었으면' 하고 두 손을 모으게 되는 날도 있었다.
여전히 반팔티를 입으면 빈티 나고 펑퍼짐해 보이고 뚱뚱해 보이는 것은 변함이 없는데, 오일장에서 사 온 반팔티를 입은 내 자신이 조금씩 마음에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몇 개월이 지난가을, 나는 반팔티를 수집하는 사람이 되었다. 제주에서 무슨 변화가 있었던 걸까.
옷으로 설명되지 않는 것들
사계리와 모슬포에선 명품을 걸친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다. 당당한 웃음, 자연스러운 매력, 자연과 벗하는 자유가 이곳 사람들을 빛나게 해서일까. 여기에 명품을 더한다 해도 아무 의미가 없어 보였다. 누구는 한라산을 입었고, 누구는 바다를 입었다. 누구는 오름을 입었고, 누구는 일몰을 입었다. 모두들 저마다 제주의 비싼 햇빛과 바람, 자유를 걸치고 다니니 얼마짜리 옷을 입었는지는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
그리고 옷으로 설명되지 않는 것이 하나 더 있다. 매일 하루 두 시간씩 크로스핏을 하며 운동에 진심인 사람들과 섞여 살았다. 그 사람들을 관찰한 결과, 자신을 계속해서 단련해 온 사람들에게는 남다르게 뿜어져 나오는 에너지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 기세와 여유 덕에 그들이 무슨 옷을 입었는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오직 떠오르는 건 그 사람의 기운뿐이다. 잘 가꿔진 건강함이 주는 압도감은 그 어떤 옷이 주는 임팩트와도 비교가 안된다는 걸 그제야 깨달았다. 그래서 좋은 옷보다 좋은 몸(몸매를 뜻하는 게 아니다)을 갖는 게 더 좋아졌다.
누가 뭘 입었는지 눈에 들어오지 않는 삶을 사니까 나 역시 내가 반팔을 입든, 민소매를 입든, 라운드넥을 입든 상관이 없다. 물론 운동을 하며 부기와 살이 조금씩 빠진 것도 분명 도움이 되었다. 내 몸에서 감추고 싶었던 것들이 자리를 잃기도 했으니. 그렇다고 해서 몸매가 엄청나게 좋아진 건 아니었다. 체지방만 2kg가 빠졌을 뿐이다. 그리고 이보다 더 날씬할 때도 반팔티는 안 꺼내 입었다. 반팔티를 입게 만든 건, 그러니까 더 중요한 건 '내 관점'이었다.
다른 사람의 시선보다 내가 더 중요해졌어
의식주란 인간 생활의 세 가지 기본 요소로 옷과 음식과 집을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그중에 의, 그러니까 의복의 의미를 살펴보면 이렇다.
의복 : 몸을 싸서 가리거나 보호하기 위하여 피륙 따위로 만들어 입는 물건.
뜻을 살펴보면 옷은 본래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이기보다는 본질적으로 자신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그런데 도시에서의 나는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 옷을 입었다. 예뻐 '보이는' 옷, 날씬해 '보이는' 옷, 인사담당자다워 '보이는' 옷을 고르고 골랐다. 그런데 이곳에서 살다 보니 점차 다른 사람의 시선보다 내가 더 중요해졌다.
첫 번째 이유 :
'이 모습도 괜찮구나' 받아들여지는 경험
제주도에서 대부분의 사람들과 반팔티를 입고 마주했다. 공유오피스에서 일하던 첫날도 반팔티를 입었고 크로스핏에서도 반팔티를 입었다. 스스로 가장 굴욕스럽다고 생각한 모습부터 보여주고 시작한 만남이었다. 꾸미지 않은 가장 내추럴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에서 시작한 관계였고, 그 관계 속에서도 충분히 받아들여지다 보니 그 이후로는 내가 어떻게 보이는지 크게 걱정이 없었다.
사실 두꺼운 화장과 예쁜 옷을 입지 않아도, 심지어 땀범벅으로 만나도 유지되는 관계들이 생긴 건 꽤 오랜만이었다. 그 관계들 속에서 시간을 보낼수록, 갖추어진 모습이 아니어도, 잔뜩 헝클어진 나여도 괜찮다는 메시지가 내 내면에 계속해서 쌓이고 쌓였다. 그래서인지 무엇을 걸치든, 내가 편하고 좋은 옷을 선택할 수 있는 용기가 넘쳤던 것 같다. 그리고 돌이켜보면 그건 용기가 아니라 자유였다.
두 번째 이유 :
다른 사람을 위해 옷 입는 사람이 없어 보였음
그곳에 사는 사람들이 패션에 관심이 없다는 뜻은 아니다. 하나같이 자신을 위해서 옷을 입을 줄 아는 사람들 같았다. 내게 옷은 결점을 감추거나 혹은 원하는 이미지를 보여주기 위한 '연출'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제주에서 옷은 의복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심지어 크로스핏에선 자신을 위해 옷을 벗기도 한다. 운동하다가 더워서 상의를 벗어던지는 사람들과 함께하다 보면 옷은 대체 무슨 의미일까 생각하게 된다. 그들이 입는 옷은 몸을 써서 가리거나 보호하기 위한, 그 본질적인 의미에 가장 가까운 것 같았다. 운동복을 입든, 일상복을 입든, 옷을 입든, 옷을 벗든, 꾸몄든 안 꾸몄든 그건 내가 잠깐 선택한 포장지에 불과하다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그래서 나는 다른 사람의 시선보다 옷을 고를 때 줄곧 나를 살피기 시작했다. 내가 불편한지, 내가 더운지, 내가 괜찮은지를 생각하며. 반팔티를 입는다는 건, 의도적으로 나의 무게중심을 타인의 시선이 아닌 나에게로 돌리는 일이 되었다.
내게 의미 있는 것들
오일장에서 반팔티를 산 이후로, 나는 2달 동안 6장의 반팔티를 수집했다. 나를 위한 옷을 고르는 것을 넘어서서, 반팔티는 일종의 '기록'의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내가 지낸 공유오피스의 반팔티, 크로스핏 박스 반팔티, 후쿠오카에서 친구들의 즐거움을 추억하기 위한 반팔티까지. 어느새 반팔티는 굴욕감의 상징이 아니라 행복했던 기억을 추억하는 방식이 되었다.
반팔티를 입을 계절이 지났는데도 반팔티를 사서 모으고, 서랍에 고이 모셔둔다. 내가 받아들여졌던 경험들, 다른 사람의 시선이 아닌 나로서 사는 것에 집중했던 시간들, 사람들의 옷보다 눈빛에 집중했던 기억들을 더듬어보면서 계절을 보내고 또 보낸다.
지금은 흰 눈이 한창 쌓인 계절, 벌써 내년 여름이 기다려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