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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근주 Jul 19. 2024

안온한 관찰자

6. 숨겨진 책 관찰(3) - 울분

 울분이라는 단어는 참 복잡하다. 답답하고 분함 또는 그런 마음이라고 국어사전이 정의하고 있지만 '답답함'과 '분함'을 넘어서는 어떤 감정이 더 내재되어 있음을 사람들은 직감적으로 감지한다. 억울함도 조금 섞여 있는 것 같고 서러움도 몇 방울 들어있다. 그런 다양한 감정들을 적당한 비율로 잘 조합하는 순간 울화통도 분통도 아닌 '울분'이라는 단어가 탄생한다.

 나는 필립 로스 작가를 전혀 알지 못했다. 덧붙이자면 <울분>이라는 책을 언제, 왜 구매하게 되었는지도 기억나지 않는다. 책장을 서성이다가 우연히 손에 잡힌 책이 마침 <울분>이었다.

 두께가 얇아 쉽사리 펼쳤다가 강렬한 감정의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1950년 대 미국, 한국전쟁 발발로 징병이 이루어지던 때를 살아가던 청년이, 자신의 삶을 결정지으려는 주변으로 인해 불안과 갈등, 혼란을 경험하는 이야기다. 이 감정들의 끝에는 울분이 있다. 내 뜻대로 내버려 두지 않는 부모, 배려라곤 전혀 없는 룸메이트, 징집을 피하기 위해 대학에 온 학생들을 비판하는 학과장, 폐쇄적인 학교 시스템은 울분을 쌓기에 더없이 좋은 환경이다. 주인공 마커스는 자신의 삶을 좌지우지하려는 이런 주변 환경들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발휘한다. 자신의 선택으로 자신의 삶을 설계해 보려는 노력은 번번이 실패한다. 거듭되는 실패 속에서 결국 고꾸라지고 마는 마커스. 쌓였던 그의 울분은 여기서 폭발한다.

 작품 속에 울분을 터트리는 사람은 마커스뿐만이 아니다. 마커스를 자신이 원하는 방향의 사람으로 키우기 위해 노력했던 마커스의 아버지, 마커스를 감싸주는 듯하면서도 그의 연애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간섭하는 마커스의 어머니, 징집을 피해 대학교에 와서는 여자 기숙사에 들어가 여성 속옷이나 던지고 노는 것을 알게 된 학과장 모두가 각자의 위치에서 각자가 생각하는 방식대로 삶이 결정되지 않는 것들에 울분을 터트린다. 독자는 자신이 현재 사회에 속한 직책, 관계에 따라 각자 다른 울분에 공감한다.




 울분의 파편들을 자주 경험하는 반면 그것들의 복합체인 울분을 경험할 기회는 많지 않다. 부정적 감정에 가까우므로 경험하지 않는 게 좋겠지만 세상을 살다 보면 내가 원하지 않는 감정을 언제까지고 배제시킬 수 없다.

 특히 자녀를 둔 분들은 자녀가 커감에 따라 울분을 마주하는 빈도가 높아지는데, 부모가 삶의 선배로서 건네는 조언과 더 나아지기를 바라며 제안하는 것들을 자식이 따르지 않는다는 점과 자식을 독립된 하나의 개체로 인정해 주는 것 사이에서의 갈등이 울분을 발생시키는 주요 요인이라고 본다. 이러한 울분은 자기 정체성이 강한 10대 사춘기를 정점으로 찍고 점차 사그라드는데, 성인의 모습에 점차 다가가는 자신의 자녀를 보고 있으면 그들을 독립된 개체로 인정할 수밖에 없음과 그럼에도 놓아주고 싶지 않은 상반된 감정이 충돌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울분>에서도 자신의 결정으로 삶을 설계하고 싶었던 마커스였지만 그의 뜻대로 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오히려 더욱 진창으로 빠져든다. 그의 부모는 우리의 부모가 흔히 말하는 '부모 말 들었으면 그런 일이 생기지 않았을 것'이라는 결과론적 푸념을 늘어놓는다. 부모의 간섭으로부터 피하기 위해 노력을 들이는 행위 자체가 삶을 설계하는 데 있어서 상당한 장애로 작용한다는 것을, 1950년 대 미국의 부모들은 이해하지 못했고, 현재의 한국도 여전히 그 상태에 머물러 있는 듯하다.

 신기하게도 울분은 어느 한쪽이 일방적으로 터져 나오지 않는다. 한쪽은 누름으로써 한쪽은 눌림으로써 팽팽함을 유지하다가 그 팽팽함의 긴장이 터지는 순간 전자는 튕겨나감으로써 후자는 폭발함으로써 울분이 표출된다.

 완전하지 않은 사람들이 선이라 믿고 행했던 합주가 만들어낸 비극, 통쾌함이 아닌 것들의 폭발. 나는 타인의 울분을 이해하는 가장 빠른 방법은 <울분>을 읽는 것이라고 감히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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