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근주 Sep 16. 2024

상실된 사람들

1. 말(2)

 피부를 뚫을 것 같은 뜨거움에 잠에서 깼다. 창문으로 들어 온 빛인가 싶었는데, 눈을 뜬 장소가 침실이 아닌 바짝 마른 땅 위였다.


 "에아아……."


 어제 본 꾀죄죄한 여자가 옆에 웅크리고 앉아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내가 눈을 뜨자마자 바로 옆에 있던 쉐마프와 가방을 내밀었다. 내것들이었다.

 나는 곧바로 상황을 알아차리고, 가방을 빼앗듯이 낚아채고는 지퍼를 열었다. 가방에 있던 약이 전부 사라졌다. 칠흑같은 잠에서 깨어난 것으로 봐서 아무래도 음식에 수면제를 탄 모양이었다.


 '절대 잃어버려서도, 빼앗겨서도 안 돼. 그곳에 도착할 때까지 마을 사람들이 널 배척할 수 없도록 해줄 약이니까.'


 마을을 떠나는 내게 약이 담긴 봉투들을 가방에 허겁지겁 넣어주며 남겼던 의 당부에도 네 번째 마을에서 결국 약들을 모조리 빼앗기고 말았다. 앞서 들렸던 마을의 호의에 심리적 경계를 내려놓은 것이 이 사태를 불러들였다. 텅빈 가방의 옆주머니에 느껴지는 묵직한 수통의 무게만이 내가 이 마을에 들어갔다 나왔음을 증명했다.

 마을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안에 분명 사람이 있는데도 한참을 두드려도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제자리 뜀으로 담장 너머를 보니 아무일 없다는 듯 마을 사람들이 각자가 맡은 일을 하고 있었다. 담장 너머로 나타났다 사라지는 나와 시선이 마주친 사람들은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한참을 고함을 질러도 돌아오지 않는 반응에 지쳐 바닥에 주저 앉았다.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앉아있자 여자가 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내 뭔가를 적기 시작했다. 종이를 아끼기 위해 글씨를 얼마나 깨알같이 쓰는지 알아보기 위해 코앞까지 가져가는 것으로도 모자라 미간을 잔뜩 찌푸려야만 했다.


 - 같이 다음 마을로 가요. 내가 길을 알아요.


 그녀는 그 글과 함께 자신이 쓴 글들 중 동그라미 친 부분 하나를 가리켰다. '내 이름은 미야'라고 적혀 있었다. 자세히보니 그녀가 쓴 글 곳곳에 동그라미가 그려져 있었는데 자주 사용하는 말이나 단어는 종이와 잉크 낭비 없이 보여줄 수 있도록 머리를 쓴 흔적이었다.

 미야는 왼손 검지로 자신의 관자놀이를 톡톡 쳤다가, 내 수통을 가리키기를 두 번 반복했다.


 "당신은 길을 알고 있고, 나는 물을 가지고 있으니 다음 마을까지 갈 수 있다는 건가요?"


 미야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다시 종이를 꺼내 동그라미 친 부분과 자신의 목을 번갈아 가리켰다.


- 물이 필요해요.


 나는 수통을 꺼내 그녀에게 내밀었다. 그녀는 무게를 가늠하는 듯 양손으로 신중하게 들었다가 뚜껑을 열고 안쪽을 확인하더니 한 모금 크게 마셨다.


 "이봐!"


 남은 것이라곤 물 밖에 없는데 아껴 마셔도 모자랄 소중한 물을 입안 가득 잔뜩 마셔버린 그녀의 행동에 나도 모르게 소리쳤다. 그녀는 물 한 모금에 숨이 트인 듯 길에 숨을 내뱉었다. 미야는 수통 뚜껑을 단단히 잠그고 내게 다시 건넸다. 그리고는 종이를 펼쳐 빠르게 적은 글자를 보여줬다.


 -하루만 걸으면 다음 마을로 갈 수 있어요. 이 정도 물이면 충분해요.


 나는 빼앗듯이 수통을 낚아채고는 손으로 무게를 가늠했다. 건넬 때보다 확연하게 줄어든 느낌이었다. 그녀를 따라가는 것 외에는 별다른 방법도 없으면서도 물을 빼앗긴 것에 대한 기분이 잘 숨겨지지 않았다. 나는 쉐마프로 언짢은 표정을 가리며 그녀에게 앞장서라고 했다.




 마른 땅이었던 곳이 끝이 나고 모래 사막으로 진입한 지도 꽤 시간이 흘렀다. 태양빛이 너무 뜨거웠지만 몸을 숨길 만한 곳은 아무데도 없었다. 입이 바싹 말라서 물을 꺼내 한 모금 마시자 미야가 자신도 한 모금 달라며 손을 내밀었다. 나는 내키지 않지만 물통을 건넸다. 야는 또 입안 가득 물을 들이 부었다.


 "적당히 좀 마셔!"


 나도 모르게 그녀에게 고함쳤다. 그녀는 놀라는 기색도 없이 주머니에서 종이를 꺼내 펼치고는 동그라미 친 부분 중 하나를 검지로 가리켰다.


 - 괜찮아요.


 대체 무엇이 괜찮다는 걸까. 이 물은 내 물이고, 그녀는 단순히 물을 마시고 싶다는 핑계로 길을 안다고 말한 건지도 모른다. 나침반도 없이 사막에서 어떻게 길을 찾는단 말인가. 줄어드는 물과 뜨거워지는 태양빛에 불안과 막막함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내색하진 않았지만 죽음의 두려움도 조금씩 커져만 갔다.

 그녀는 다시 가던 길을 걸었다. 달리 뾰족한 수가 없어서 그녀를 뒤따라 걸었다.

 해가 조금 기울었을 때, 우리는 사막 언덕을 등지고 그늘에서 잠시 쉬기로 했다. 고운 모래가 매트리스처럼 몸을 부드럽게 감싸 안았다. 뜨끈한 모래에 배고프고 지친 몸을 기대고 있으니 빨려들어가는 기분이었다. 눈을 감은 채 조금만 잤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데 누군가가 팔을 잡아당기는 바람에 깨어났다. 온몸이 모래에 묻혀 있었다. 미야가 모래로 빨려들어가는 나를 꺼내기 위해 필사적으로 팔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나는 놀라 허우적거리면서 모래늪을 빠져나왔다.

 사막에서 종종 있는 일이었다. 사람을 집어삼키는 모래늪. 바람이 불어 만든 모래언덕 중에서 유독 밀도가 낮은 것들이 간혹 생기는데, 거기에 몸을 기대거나 올라서면 늪처럼 사람을 서서히 안으로 빨아들였다. 미야가 아니었으면 나는 모래늪에 묻혀 죽었을지도 몰랐다. 사막을 통과할 때 모래늪을 확인해야하는 것은 기본 중의 기본인데 이마저 잊을 정도로 정신적으로 지친 상태였는데, 나는 애써 그것을 부정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녀가 괜찮냐는 듯 쳐다보는 게 괜히 민망해서 아무렇지 않은 듯 옷에 묻은 모래를 툭툭 털어냈다. 목숨을 구해준 은인인데 이상하게 고맙다는 말이 목끝에 걸려 나오지 않았다.

 미야가 몇 발 떨어진 곳의 다른 언덕을 가리켰다. 저기서 쉬어도 된다는 뜻이었지만 나는 충분히 쉬었으니 괜찮다고 말했다. 심장박동 소리가 귀에 들릴 정도로 가슴이 요동치고 당장이라도 다리에 힘이 풀릴 것 같았지만 이 악물고 아무렇지 않은 척했다.

 다시 미야가 앞장 서서 걸었다. 이제야 느낀 것이지만 그녀는 사막을 걷는데 아무런 망설임이 없었다. 이미 몇차례 걸어 본 익숙한 길인 마냥 성큼성큼 걸었다. 모래늪을 밟지도 않았고 길이 맞는지 확인하려 방향을 확인하는 척도 하지 않았다. 조금 전 나를 구해준 상황 때문이었을까. 아무 말 없이 길을 안내하는 그녀에게 모종의 신뢰가 생겼다. 따라가기만 하면 정말로 마을이 있을 것 같았다. 그녀는 뒤돌더니 또 다시 괜찮냐는 표정을 지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웃음을 보였다. 그녀를 만난 뒤 처음보는 웃음이었다.




 어김없이 밤이 찾아왔다. 나와 미야는 5미터는 족히 넘을 듯한 거대한 모래 바위 옆에 짐을 풀었다. 더위에 물만 마시며 걸어서 지칠대로 지친 상태였다. 나는 어제 제대로된 음식을 먹기라도 했지, 미야는 이틀 째 공복상태일텐데 한 번도 자신의 허기짐을 드러내지 않았다.

 나는 반쯤 남은 물을 그녀에게 건네며 물었다.


 "배고프지 않아?"


 그녀는 부드러운 표정으로 오른손을 주먹 쥔 상태에서 새끼손가락만 편 후 턱 밑에 댔다가 앞으로 떼었다가 붙이는 동작을 2회 반복했다가, 아차 하는 표정을 짓더니 검지와 엄지를 동그랗게 붙여 괜찮다는 표시를 했다. 앞서 보여줬던 동작은 '괜찮다'는 뜻의 수화였던 듯했다. 수화의 뜻은 몰랐지만 그녀의 표정과 움직임에서 '괜찮음'이 내게 온전히 전해졌다.

 불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지만 불을 피우고 유지할 그 어떤 것도 없었다. 겉옷을 모래 위에 깔고 가방을 베개삼아 베고 누웠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고 별은 바닥에 쏟아질 것처럼 눈이 부신데 배에선 천둥이 요란하게 울렸다. 유난히 밝은 별 몇 개를 머릿속으로 이었더니 물고기 모양이 그려졌다. 일주일 전 그가 내게 생선을 구워줬던 것이 기억났다.




 사막에서 생선을 구하기란 하늘의 별 따기만큼 어려운데 그는 어디서 구해왔는지 내게 손바닥만한 생선 한 마리를 불에 구워 주었다. 크기는 손바닥만 했지만 살이 오르지 않았던 데다가 소금에 절여 건조시킨거라 발라먹을 살이 많지 않았다. 적당히 그슬려 구운 생선을 한 입 베어물자 고소하고 짭쪼름한 맛이 입안 가득 퍼졌다. 육고기와는 다른 부드러움. 나는 생선을 구해준 그에게 한 입 내어줄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야무지게 발라먹었다. 뼈만 남은 생선을 보고 나서야 미안함과 부끄러움이 몰려왔다. 내가 사과하자 그는 내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그는 내 아버지도 아니었고 나를 특별히 챙겨야 할 이웃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늘 마을에서 혼자 겉돌던 나를 먼저 챙겼다.


 "사람이 사람을 위해 애쓰는 것에 이유를 붙일 필요가 있을까?"


 그가 웃어보였다. 내게 아버지가 있었다면 이런 사람이었을까. 나는 그가 내 아버지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언젠가는 그를 위해 애쓰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그러나 그날이 그의 웃음을 볼 수 있던 마지막 날이었다.




 주변의 밝아짐이 느껴져서 눈을 떴다. 밤하늘의 별을 보며 물고기를 그려보다가 잠시 눈을 감았던 게 곧바로 잠으로 이어진 모양이었다. 지평선은 붉지만 머리 위 하늘은 아직 어둠이 모두 물러가지 않았다. 미야는 두 발짝 쯤 떨어진 곳에서 새우처럼 옆으로 뉘운 몸을 웅크린 채 자고 있었다. 조심스레 다가가 그녀 옆에 앉았다. 가까이서 본 그녀의 얼굴은 상당히 앳되어 보였다. 나와 비슷한 또래일 거라 생각했는데 지금보니 성인도 되지 않은 게 분명했다.

 나는 그녀의 어깨를 살짝 건드려 깨웠다. 미야가 힘겹게 눈을 뜨며 몸을 일으켰다. 나는 물통을 그녀에게 먼저 건넸다. 그녀는 몽롱한 표정으로 물통을 받아 흔들었다가 안쪽을 살피듯 한참을 보더니 한 모금 가득 입에 넣었다. 그리고 남은 물을 내게 돌려줬다. 바짝 마른 입 속에 한 모금 물을 가득 채우니 물통이 바닥났다. 오늘 중으로 마을을 찾지 못하면 우리의 여정은 여기까지였다.


 "오늘 중으로 마을을 찾아야 할 텐데. 찾아도 문제긴 하지만."


 나는 약을 약탈당해 비어버린 가방을 허탈한 시선으로 쳐다봤다.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방랑자를 받아줄 마을이 있을지가 의문이었다. 하지만 미야는 자신만 믿으라는 듯 주먹 쥔 손으로 제 가슴을 툭툭 두드렸다.

 더위가 사막을 지배하기 전에 움직이기로 했다. 몸이 활동을 시작함과 동시에 뱃속에서 천둥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미야가 앞장 서서 걷다가 나를 한 번 흘끔 쳐다보더니 키득거리고 다시 제 갈길을 걸었다. 그 모습이 아이처럼 귀여웠다.

 이런 마음의 여유도 잠시, 우리는 오로지 걷는 것에만 집중하고 걸었다. 공복의 강렬한 신호와 그로인해 찾아오는 어지러움은 다른 생각할 겨를을 주지 않았다.

 해가 하늘을 환하게 밝혔을 때, 사막 모래 언덕 너머로 마을이 보였다. 전에 본 마을보다는 몇 배는 더 큰 마을이었다. 나는 살 수 있다는 안도감에 환호하며 미야를 앞질러 모래 언덕을 내려갔다.

가까이서 보니 진흙을 빚어 세운, 제대로 된 벽을 갖춘 마을이었다. 미야가 뒤따라 천천히 걸어오다가 문에서 열 발짝 쯤 떨어진 곳에서 걸음을 멈췄다. 나는 어서오라고 손짓했지만 미야는 고개를 저을 뿐 더는 다가오지 않았다.

 나와 미야가 그렇게 마주보고 있을 때 마을의 문이 열렸다. 큰 마을인 만큼 출입문을 지켜보는 사람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문 안쪽에서 갈색 피부에 깡마른 여자가 뛰쳐나왔다.


 "미야!"


 마을은 내가 아닌 미야를 보고 문을 열어 준 것이었다. 그녀가 이미 알고 있는 마을이었던 것일까. 나는 문에서 뛰어나온 여자와 미야를 번갈아 쳐다봤다. 여자는 미야를 부둥켜 안고 머리를 쓰다듬는 등 애정을 아끼지 않고 발산했다. 하지만 미야는 그런 그녀의 행동이 부담스러운지 뻣뻣한 자세로 어색한 웃음만 짓고 있었다. 여자는 한참을 그러다가 뒤늦게야 나의 존재를 알아차린 것처럼 화들짝 놀랐다.


 "당신이 미야를 여기로 데려왔군요. 고마움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 지."


 여자는 거리낌도 없이 내 양손을 붙잡아 흔들었다. 얼마나 세게 잡던지 손을 빼기가 힘들었다. 나는 그녀가 내 손을 놓아줄 때까지 기다렸다가 말했다.


 "미야가 절 여기로 데려왔습니다."


 내 말에 여자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여자는 고개만 돌려 미야를 쳐다보며 말했다.


 "잘 생각했어. 네가 쪽지 하나만 두고 사라졌을 때 얼마나 놀랐는지 아니? 다들 네게 얼마나 잘해줬는데 가출해서 속을 썩이고 그러니."


 미야는 화가난 듯 수화를 하는 손짓이 거칠었다. 말아들을 수 없는 외침을 섞어가면서, 미야는 자신을 반겨주는 여자를 거부했다. 둘 사이에 오고 가는 대화를 짐작해보건대 미야는 모종의 이유로 마을을 떠났었고, 마을 사람들은 그런 미야를 걱정한 모양이었다. 마을로 들어가자고 재촉하는 여자의 말에도 미야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대로 미야가 마을로 들어가지 않는다면, 그들이 나만 반겨줄 것 같진 않았다. 나는 미야와 이야기해보기 위해 그녀에게 되돌아갔다.


 "무슨 일이길래 들어가지 않는 거야?"


 미야는 종이를 꺼내 적었다. 아주 긴 문장을 적는 듯 그녀는 한참을 바닥에 엎드렸다가 다 적은 종이를 내게 내밀었다.


 - 나는 이 마을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사람이에요. 내가 그들에게 당신을 받아주라고 얘기할테니 당신을 들어가서 다음 마을로 갈 준비를 하세요. 저는 쉬었다가 다음 마을로 가 볼게요.


 이틀을 굶었는데 다음 마을로 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최소한 마을에서 먹을 것을 구한 뒤에 같이 다음 마을로 가자고 설득했다.


 "나도 여기 오래 머물 생각이 없어. 네가 날 여기까지 데려와줬는데 내가 어떻게 널 여기서 죽게 내버려둘 수 있겠어?"


 미야는 한참을 고민하는 듯하다가 못이기는 척 나를 따라왔다. 우리를 지켜보던 여자가 환하게 반기며 마을 문을 열어주었다.

 이곳은 내가 그와 함께 생활했던 마을만큼 크고 넓은 마을이었다.

작가의 이전글 상실된 사람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