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말(1)
바람이 저쪽에서 이쪽으로 불어온다. 모래 산이 아이스크림처럼 녹아내린다. 바람에 실린 고운 모래가 세상을 노란빛으로 물들였다.
나는 제자리에 서서 정확하게 뒤로 돌아 모래바람이 멎을 때까지 그 자세를 유지했다. 사막의 모래는 입자가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너무 고와서 쉐마그를 쉽게 통과하기에 정면으로 맞으면 호흡기에 상당히 치명적이다.
바람이 멎고 나는 다시 정확하게 반원을 그리며 뒤로 돌아 걸었다. 사막은 이정표가 없어서 자칫 잘못하면 길을 잃기 십상이다. 나침반을 잃어버려서는 안 되었는데. 고리가 달린 끈으로 허리춤에 단단히 고정해 놓아서 너무 안심해 버렸다. 정작 나침반의 고리구멍이 닳아 부서질 줄이야. 불행 중 다행인 것은 목적지까지 직진만 남았다는 것이다. 나의 걸음은 조금도 방향이 흐트러져서는 안 된다.
체감 상 삼십 분 정도 걸었을 때 모래구역이 끝이 나고 마른땅으로 바뀌었다. 옛날엔 몇몇 사막식물들이 살았다고 하는데 지금은 그것들의 잔해만 드문드문 보였다. 지금의 사막은 수분을 거의 요구하지 않는 식물들마저 살 수 없을 정도로 수분이 부족한 땅이다. 이 땅이 모래사막으로 변하는 것은 시간문제다.
저 앞에 커다란 바위가 보여 그곳에서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사막의 그늘은 놀랍도록 시원하다. 햇빛과 그늘의 경계가 이토록 뚜렷하다는 것에 마음속에 감사함이 절로 생겨난다.
바위 옆 바닥에 내가 가야 할 방향을 발끝으로 긁어 표시를 남겼다. 바위에 등을 기대고 가방에서 수통을 꺼내 물 한 모금 들이켰다. 타는 듯한 더위 속을 걷다 마시는 시원한 냉수 한 모금은 어느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강렬한 쾌감을 선사했다. 나는 더 마시고 싶은 갈증을 겨우 억누르고 수통 뚜껑을 닫았다. 물은 겨우 두 모금 정도 남았다. 물이 바닥나기 전에 마을에 도착해야 한다.
쉬는 동안 신발과 옷 속에 들어간 모래를 털어냈다. 그동안 태양은 정수리 위를 지나친 뒤 조금 내려왔다. 밤이 오기 전에 마을에 도착해 볼 요량으로 몸을 일으켰다. 햇빛으로 나가자 시원한 그늘에 적응돼 있던 피부가 깜짝 놀라 파르르 떨렸다.
얼마쯤 걸었을 때 저 멀리 초록색이 보이기 시작했다. 사와로 선인장이었다. 선인장이 보인다는 건 그곳에 사람이 살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의 말이 맞았구나. 나는 그와 헤어지기 전 마지막을 떠올라 살짝 뭉클해졌다.
마을은 오래된 내 어깨 정도 높이의 플라스틱 판을 이어 붙인 뒤 그 위로 마른 선인장을 묶은 담장 안에 있었다. 담장 너머로 어른 키의 두 배가 넘는 사와로 선인장의 위풍당당한 모습이 보였다.
마을 출입문을 찾아 담장을 따라 걷다가, 출입문 옆 벽에 기대어 앉은 넝마차림의 여성을 발견했다. 꾀죄죄한 모습이었지만 젊었다. 그녀는 쉐마프는커녕 스카프 한 장도 두르지 않은 채 다가오는 나를 힘겹게 쳐다봤다.
"아아아……."
그녀는 반도 채 못 들어 올린 손을 내게 내밀었다.
"아아아……."
그녀의 손은 마을로 들어가려는 나를 붙잡으려는 듯했다.
"들어가지 말라는 뜻인가요?"
그녀는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 몇 번을 더 소리를 내었는데 '아', '어', '에'만 섞인 그녀의 말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이것이 이 마을의 언어인 것일까. 아주 먼 옛날, '국가'라는 것이 존재했었을 때에는 각 국가마다 자신만의 언어가 있다고 들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하나의 언어로 통일된 지 오래되었고, 마을을 전전하면서 다른 언어를 마주한 적이 없었기에 갑작스러운 다른 언어의 등장은 나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내가 말을 알아듣지 못한 채 서 있자 그녀가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다. 그것은 종이와 펜이었다. 종이! 이 누추한 여자가 저 귀한 종이를 가지고 있었다. 그녀는 네 번 곱게 접힌 종이를 펼쳐 아주 작게 무언가를 쓴 뒤 내게 보이도록 내밀었다. 종이의 맨 위에는 조금 크고 굵직한 글자가, 그 아래로는 깨알같이 쓴 글자들이 슬래시 사이에 빼곡하게 적혀있었다. 그녀는 맨 위의 큰 글자와 빼곡하게 쓴 글자의 맨 끌을 번갈아 가리켰다.
- 저는 말을 못 합니다.
- 이 마을엔 들어가지 않는 게 좋아요. 아주 위험합니다.
"도대체 무엇이 위험하다는 건가요? 저는 이번 마을에서 먹을 것과 마실 것을 구하지 않으면 안 돼요."
나는 가볍게 참방거리는 물통을 그녀 앞에 흔들어 보였다. 물통을 본 그녀가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위험한 것을 알려달라는 말에는 아무런 대답도, 글도 써주지 않았다.
"이걸 드리면 알려주실 수 있나요?"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위험하다는 말만 믿고 다른 마을로 이동할 것인지, 이야기를 들어보고 위험을 판단할 것인지 잠시 고민하다가 다음 마을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고작 두 모금의 물로 떠날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나는 뚜껑을 열어 그녀에게 수통을 내밀었다. 그녀는 물통을 받아 들고는 단 번에 물을 들이켰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마시려는 듯 그녀가 고개를 뒤로 젖힌 채 수통을 탁탁 두드렸다. 마지막 한 방울까지 핥아먹고 나서야 그녀는 내게 수통을 돌려주었다. 그리고 바닥에 엎드려 종이에 뭔가를 쓰기 시작했다.
- 마을 사람들이 우호적이지 않아요.
그녀의 내게 보여준 글은 모호했다. 마을은 원래 외부인에게 우호적이지 않았다. 바꿀만한 물건이 없거나 마을에 필요로 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다면 단연코 우호적일 수 없었다. 마을의 물과 식량은 마을사람들만 이용하기에도 빠듯하기에 거저 얻으려는 외부인은 전혀 달갑지 않았다.
"저는 의사예요. 약도 가지고 있고요. 마을에서 저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을 겁니다. 저는 그들을 돕고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얻을 거예요."
내가 그렇게 말을 하고 출입문 손잡이를 쥐자 그녀가 내 옷자락을 잡았다.
"아에어……."
그녀가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나는 그녀의 손을 뿌리치고 마을로 들어가는 문을 두드렸다. 잠시 후 중년의 남자가 문을 열어주었다. 그는 내게 누구냐고 물었고, 나는 옆 마을에서 온 의사라고 얘기했다. 남자의 표정이 밝아지면서 어서 들어오라고 손짓했다. 나는 가벼운 마음으로 남자를 따라 들어갔다. 그녀는 마을로 들어가는 나를 따라 들어오지 않았다.
마을이 워낙 좁다 보니 각자의 자리에서 일하던 사람들의 시선이 내게로 쏠리는 것을 곧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남자는 나를 의사라고 마을 사람들에게 소개했다. '버나드'라고 자신을 소개한 중년의 남자는, 마침 마을에 고열을 앓는 사람이 늘어나기 시작했는데 마을에 의사도 없고 약을 가진 이도 없어 난처한 참이었다고 토로했다.
"제가 아픈 분들의 치료를 도와드릴 테니 먹을 것과 마실 것 좀 얻어갈 수 있을까요?"
버나드는 흔쾌히 준비해 주겠다고 했다. 버나드는 선인장에서 물을 채취하고 있는 키가 크고 비쩍 마른 남자를 부른 뒤 내게서 수통을 받아 그에게 건넸다. 그는 수통을 들고 선인장 밭으로 돌아갔다. 나는 버나드에게 어디서부터 진료를 도우면 되는지 물었다.
마을은 열 가구도 채 안 될 정도로 작았다. 마을 입구 가까이에는 거대한 사와로 선인장이 모여있는 밭이 있었고 그 옆으로 여덟 개로 구획을 나눈 텃밭이, 나머지 자리엔 흙으로 벽을 쌓고 그 위에 플라스틱 판을 여러 개 덧대어 지붕을 만든 집이 일목요연하게 지어져 있었다.
내가 제일 먼저 방문한 곳은 선인장이 모여 있던 곳에서 가장 가까운 집이었다. 집들 중에 가장 작은 집이기도 했다. 집 안은 시큼한 땀 냄새와 무엇을 해 먹었는지 알 수 없는 음식 냄새로 가득했다. 나는 불쾌한 내색 없이 남자를 따라 들어갔다. 그는 침대에 누워있는 중년의 여성 앞까지 나를 인도했다. 나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그녀의 이마를 짚어 열을 확인하고, 코 가까이 귀를 가져다 대 호흡을 확인했다. 가까이 가지 않으면 들리지 않을 바짝 마른 쇳소리가 호흡에 섞여 있었다. 사막모래병이었다.
"사막모래병이 퍼진 것 같군요. 최근에 거센 바람이 많이 불었는데 아무래도 그때 모래를 많이 마신 듯합니다. 전염병도 아니고 크게 문제 될 병도 아니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치료에 소금이 필요한데 구할 수 있을까요?"
버나드가 손짓하자 등 뒤에서 소금을 구하러 가는 사람의 발소리가 들렸다.
"바람이 많이 불 때면 사막의 모래가 마을까지도 많이 날려오거든요. 평소에도 스카프를 두르고 바람이 많이 부는 날은 외출을 삼가는 게 좋습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모래사막이 있으니까요."
소금을 구하러 간 사람이 금세 돌아왔다. 나는 소금과 물을 적절히 섞어 식염수를 만들었다. 가방에서 끝이 뭉툭한 주사기를 꺼내 식염수를 담았다. 환자를 옆으로 눕힌 뒤 주사기의 뭉툭한 부분을 코에 대고 피스톤을 눌렀다. 식염수가 그녀의 코를 통해 들어갔다가 입을 통해 흘러나왔다. 모래가 섞여 탁해진 물을 본 사람들의 입에서 감탄이 흘러나왔다.
나는 가방에서 갈색 가루가 담긴 봉투를 꺼내 빈 컵에 가루를 조금 덜어 남자에게 건넸다.
"이건 버드나무 가지를 갈아 만든 해열제입니다. 환자분이 깨어나면 물에 섞어 마실 수 있게 해 주세요."
그렇게 다섯 집을 돌았다. 버나드는 아픈 마을 사람들에게 도움을 준 내게 연신 고마움을 표하며 오늘 저녁은 자신의 집에서 묵고 가는 게 어떻겠냐고 제안했다.
"다음 마을까지는 이틀은 족히 가야 한다오. 하루쯤 푹 쉬었다 가는 게 여러모로 좋지 않겠소?"
이 마을에 도달하기까지 쌓였던 피로도 가득했기에 나는 기꺼운 마음으로 수락했다. 마을 대표라고 해서 다른 집과 크게 다른 점은 없었다. 마을을 방문하는 손님을 위한 객실인지 모르겠지만 침대가 놓인 방 하나가 더 있는 게 유일하게 다른 점이었다. 침대 옆에 가방을 내려놓고 쉬고 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버나드가 방문을 두드렸다. 나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들어와도 좋다고 말했다. 그는 물통을 들고 내 방으로 들어왔다.
"올해는 다행히 비가 좀 내려서 선인장에 물이 꽉 들어찼다네. 작년에 왔다면 반도 채워주기 힘들었을 거야."
나는 감사의 인사를 전하며 물통을 건네받았다. 물이 가득 채워져 묵직해진 물통의 무게에 나도 모르게 안도감이 밀려왔다.
버나드의 부인이 저녁 식사가 다 되었다고 알렸다. 나는 수통을 가방 옆 주머니에 넣고 식당으로 내려갔다.
오랜만에 맡은 맛있는 음식 냄새에 침이 고였다. 버나드와 그의 부인은 이미 식탁에 앉아 있었다. 식탁에는 방금 끓인 야채 스튜에 다진 고기 요리가 올려져 있었다.
"의사나 수리공이 없는 이런 작은 마을엔 그들이 우리 마을에 들려주기만을 바라야 한다네. 자네가 여길 들리지 않았다면 우린 마을 사람이 왜 아픈지도 모르고 속이 타들어갔을 게야."
의자에 앉는 나를 보며 버나드가 칭찬과 감사를 아끼지 않았다.
"여보, 그 얘긴 식사 끝나고 해도 되잖아요. 손님이 부담스러워서 제대로 식사나 하겠어요?"
부인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계속 얘기하려는 남편을 말렸다.
"기분이 너무 좋아서 나도 모르게 말이 길어졌구려. 자, 식기 전에 먹읍시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식사가 끝나자 부인이 차를 내어왔다. 차는 연분홍빛을 띄었는데, 선인장 꽃을 말려 우린 차라고 부인이 설명했다. 버나드는 곧 밤이 찾아올 테니 장작을 더 넣고 오겠다고 잠시 자리를 비웠다. 태양이 하늘에 있을 때의 사막은 뜨겁기 그지없지만, 달이 하늘을 지배할 때의 사막은 불이 없으면 서늘할 정도로 기온이 내려간다. 섭씨 20도 이상의 일교차는 사람들이 사막 생활을 힘들게 하는 데 한몫했다.
배가 부르고 달콤한 향이 나는 차도 마시니 잠이 밀려왔다. 여기까지 걸어오느라 지친 몸도 잠을 재촉했다. 눈꺼풀이 감기는 것을 억지로 참고 있던 것을 알아차린 부인이 괜찮으니 방으로 들어가 쉬어도 된다고 말했다. 나는 양해를 구하고 방으로 돌아와 침대에 몸을 내던졌다. 푹신한 베개의 감촉, 피부에 닿는 면의 부드러움, 모래 걱정 없는 벽으로 둘러싸인 공간, 기분 좋은 포만감은 나를 순식간에 잠의 수렁으로 끌어들였다.
정기연재는 아니지만 열심히 쓰는대로 올려보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