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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근주 Sep 22. 2024

상실된 사람들

말(3)

 이곳은 그와 함께 생활했던 마을만큼 크고 잘 정비된 마을이었다. 무엇보다 물을 공급받을 수 있는 사와로 선인장이 심어진 밭 외에 우물이 마을 한가운데에 있었다. 대부분의 생활이 아날로그로 돌아간 지금, 지하수가 흐르는 곳까지 땅을 파는 것도 상당히 힘든 작업이지만, 무엇보다 지하수가 흐르는 곳 자체를 찾는 것이 거의 불가능한 시대였기에 우물이 있다는 건 충분히 놀랄만한 일이었다.

 자로 잰 듯 도로가 놓여 있고, 도로를 기준으로 주거지와 시설이 좌우로 구분되어 있었다. 거리를 오가는 사람들의 표정에서는 여유가 느껴졌다. 지금까지 거쳐 온 마을들에서는 볼 수 없었던 삶에 대한 만족감이 마을 전체에 퍼져 있었다.

 우리를 마을로 들여보내 준 여자는 자신을 도로시라고 소개했다. 눈가와 입가에 중년의 주름이 자리 잡고 있었지만 여전히 젊고 예쁘다고 부를 만한 여자였다. 무엇보다 그녀가 내뿜은 밝고 긍정정직 에너지가 곁에 있는 사람을 기분 좋게 했다. 도로시는 이 마을에서 태어났으며 미야와는 옆집 이웃 관계라고 했다.

 도로시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는 미야가 그녀를 싫어하는 이유를 찾지 못했다. 미야는 내 옆에 딱 붙어 그녀와 최대한 가까이 가지 않으려 했고 말도 섞지 않았다.

 미야의 집 앞에 도착했을 때, 도로시는 자신과 미야가 미야의 집에서 지내고 나는 그녀의 집에서 하루 묵는 것이 어떻냐고 물었다.


 "둘이 사귀거나 결혼할 생각이라면 내가 빠져 줄게!"


 나는 그런 사이가 아니라고 했고 도로시에게 집을 빌려주는 것에 대해 감사의 인사를 전했다.

 우리는 우선 도로시의 집에서 식사를 하기로 했다. 하루를 넘게 꼬박 굶었던지라 식욕이 머릿속을 지배한 상태였다. 도로시는 금방 준비해 줄 테니 기다리라고 말하고 주방으로 들어갔다. 나와 미야는 거실의 낡은 소파에 앉았다. 미야는 계속해서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않았다.


 "좋은 사람으로 보이던데."


 나는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미야는 그저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식사가 끝나고 우리는 거실에 모여 앉았다. 도로시는 내게 무엇을 하는 사람이냐 물었고 나는 의사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전에 들렸던 마을에서 약재를 모두 약탈당하고 말았습니다."


 나는 가진 게 없다는 뜻으로 양손을 펼쳐 보였다.


 "그래도 의사라니, 대단하다. 우리 마을에는 아직 의사가 없거든. 물론 어르신들이 민간요법을 잘 알고 계시고, 아직까지 의사를 필요로 할 정도로 큰 병이 돌진 않아서 의사의 손길을 필요로 한 적은 없었지만 말이야. 특별히 목적지가 있는 게 아니라면 이 마을에서 머무는 건 어때? 이 정도 마을은 다른 곳에서도 찾기 힘들고, 마을은 의사를 확보할 수 있으니 서로에게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는데."


 마을에서 이런 제안을 먼저 해주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었다. 전 세계가 사막화가 된 이후 자급자족 해야 하는 마을들이 늘어나면서 인구의 증가는 아주 예민한 요소가 되었다. 자녀를 낳는 것도 마을이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있어야 할 정도인 곳도 많아서, 이방인을 받아주는 것은 더욱 흔치 않은 일이었다.

 도로시는 내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꿰뚫어 보기라도 한 듯 말했다.


 "무작정 받아준다는 게 아니야. 우린 의사가 필요하고, 도움을 받기 위해 마을의 공간을 제공해 주겠다는 거니까. 일방적 선의가 아니라 협력하자는 거지."


 그녀의 제안은 내게 안정을 제공해 줄 수 있는 더없이 좋은 것이었지만 내겐 목적지가 있었다.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거대한 터널. 그것이 북동쪽 어딘가에 있다고 가 말했었다. 내가 그곳에 대해 말하자 도로시가 놀란 듯 웃으며 말했다.


 "그런 곳이 정말 있다고 생각해? 그거 다 마을 밖으로 사람을 내보내기 위해 지어낸 거야."

 "그가 그런 거짓말을 할 리가 없어."


 내가 목소리를 높이자 도로시는 알겠다는 듯 양손을 들어 흥분하는 나를 제지했다.


 "네가 꼭 떠나야 한다면 붙잡진 않을게. 대신 이곳에 머무는 동안 아픈 사람들을 만나서 한 번씩 돌봐줬으면 좋겠어. 어르신들의 도움으로도 낫지 않는 사람들도 있거든."


 나는 그렇게 하겠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우물이 있다는 것은 마을 사람들 뿐만 아니라 마을에서 자라는 다른 생명체들에게도 축복이었다. 사와로 선인장과 식용을 목적으로 재배하는 곡식 말고도 식물들이 꽤 보였다. 물이 주는 여유 때문인지 마을 사람들의 표정엔 하나같이 여유가 묻어 있었다. 통통하게 부푼 사와로 선인장 만으로도 마을의 물 공급은 충분히 안정적이었기에 우물을 이용하는 사람은 극히 적었다. 그들은 개인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우물의 물을 길어 쓰는 것이 아니었다. 마을 내 심긴 식물들에 물을 주고, 가축의 목을 축이게 하는데에 썼다. 공공시설의 청소를 위해 길어 쓰기도 했다. 우물은 개인의 생존이 아닌 마을 전체의 이익을 위해서 사용되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마을을 돌며 약재가 될만한 식물들을 찾았다. 미르라에서 나오는 몰약이라든지, 마황에서 나오는 에프드라는 쉽사리 구할 수 없는 것들이었는데 마을 곳곳에 이것들이 심겨 있었다. 특히 몰약은 바르면 소독과 항염에 탁월하고, 먹을 경우엔 소화불량 해소와 호흡기 질환 호전, 진통제로서도 효과가 있어 만능으로 불리는 귀한 녀석이었다. 나는 몰약을 충분히 채취한 뒤에 숙소로 돌아와 이를 곱게 갈아 여러 주머니에 나누어 담았다. 가 그랬던 것처럼.




 다음날 도로시와 함께 아픈 사람들을 찾아갔다. 가는 길에, 어제 봤던 미르라를 가리키며 여기서 나오는 것이 지금 내가 들고 있는 약재와 동일한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우린 그냥 여기서 잘 자라니까 키웠을 뿐인데 이게 약재일 줄은 전혀 몰랐네."


 도로시는 곳곳에 심겨 있는 미르라를 보고 놀람과 허탈함이 섞인 투로 말했다. 나는 그녀에게 몰약을 채취하는 법을 간단히 알려주고 나서 환자가 머무는 첫 집에 도착했다.

 환자는 일흔이 조금 넘은 할머니였다. 할머니는 도로시를 매우 반갑게 맞아주었다. 


 "이 분은 의사예요."


할머니가 경계를 갖기도 전에 도로시가 재빨리 얘기했다. 의사라는 말에 나를 보던 긴장한 눈빛이 누그러졌다. 할머니는 걷는 게 불편한 듯 기우뚱하게 걸어 침대에 걸터앉았다. 나는 할머니께 어디가 많이 편찮으냐고 물었다. 할머니는 머리도 어지럽고, 속이 메스꺼워 음식 먹기가 힘들고, 몸이 무겁고 기운이 없다는 얘기를 두서없이 나열했다. 나는 할머니의 이마와 손목의 맥을 짚었다. 열이 높았고 맥박은 약했다.


 "마실 물 한 컵과 열을 식혀줄 물수건이 필요해요."


 나는 옆에 있던 도로시에게 필요한 것들을 부탁했다. 그녀는 이 집의 구조를 잘 알고 있는 듯 요구한 것을 재빠르게 들고 왔다. 마실 물에 몰약을 적당히 덜어 넣고 잘 흔든 뒤에 할머니께 내밀었다. 할머니는 내게 의심의 눈초리를 한 번 줬다가, 도로시가 괜찮다고 말하자 눈빛을 거두고 단숨에 컵을 비웠다.


 "자리에 누우시면 물수건을 올려 드릴게요. 조금 나을 거예요."


 할머니가 자리에 눕고 나는 이마를 충분히 덮을 정도로 물수건을 접어 이마 위에 조심스럽게 올렸다. 차가운 물수건이 이마에 닿자 할머니의 몸이 흠칫 떨렸다.


 "할머니, 이따 저녁에 한 번 더 들릴게요. 나중에 물수건이 불편하시면 내려놓으셔도 돼요."


 나는 할머니의 손을 잡고 손등을 부드럽게 두드려드렸다.

 집 밖으로 나와 도로시에게 할머니가 언제부터 저랬냐고 물었다. 그녀는 할머니가 불편을 호소하신 건 이 주쯤 되었다고 말했다.


 "생각보다 큰 병일지도 몰라요. 해열제가 없어서 물수건을 올려드렸는데, 사흘간 아침저녁으로 물수건을 갈아주시고 이 가루도 한 스푼 물에 타서 먹여요. 그래도 낫지 않는다면, 더 이상 제가 할 수 있는 건 없을 것 같아요."


 도로시는 할머니의 병이 노년에 찾아오는 죽음의 시작점이라는 것을 곧바로 알아차렸다. 그녀는 비장하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내게서 몰약이든 작은 주머니 하나를 받았다.

 그렇게 오늘은 다섯 집을 돌았다. 처음 만났던 할머니를 제외하고는 다들 자잘한 병치레거나 상처를 제때 치료하지 못해 조금 곪은 것이 전부였다. 그들은 모두 활동하는데 지장이 없어서 약재가 든 주머니를 건네며 상용법과 용량을 알려주었다.

 돌아가는 길에 처음 들렸던 할머니 집에 들렀다. 큰 병이 아니길 바라는 마음으로 문을 두드렸다. 인기척이 돌아오지 않았다. 도로시가 다시 문을 두드리려는 것을 나는 제지하고 손잡이를 잡아당겼다. 문은 잠겨있지 않았다. 우리가 나갈 때 할머니가 배웅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대로 잠이 드셨고 아직도 잠들어 있다면 문이 잠겨 있지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맞아떨어졌다.

 불안한 고요가 집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땀이 아닌 다른 종류의 시큼하고 불쾌한 냄새가 집 안에 옅게 감돌았다. 할머니는 침대에 처음 자세 그대로 누워 있었다. 눈을 감은 채 아무런 미동도 없다. 나는 조심스레 다가가 손목의 맥을 짚어보고 코 앞에 손을 가져다 댔다. 생명의 징후가 어느 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불과 네 시간 전에는 살아 계셨는데……."


 도로시가 말을 잇지 못했다. 나는 할머니가 이마에 덮고 있던 수건을 펼쳐 얼굴을 가렸다. 근육이 이완되어 흘러내린 분비물이 침대에 흥건했다. 우리는 침묵 속에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해야 할 일들을 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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