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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근주 Nov 05. 2024

상실된 사람들

3. 바다(1)

 깨어나기 싫은 아침이었다. 그와 함께 했던 기억이 꿈으로 재생될 때, 나는 그 꿈에서 영원히 깨고 싶지 않았다.

 정신이 들면서 어제 겪었던 일들이 거대한 해일처럼 밀려와  꿈을 집어삼켰다. 내가 살던 마을을 덮쳤던 바로 그 무장단체의 습격. 황색 두건을 두른 채 칼과 활로 무장한 살육 집단. 준은 그들이 삼국지에 등장하는 황건적을 닮았다 하여 '황건적'이라고도 불렀다. 삼국지가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이름 하나는 잘 지었다고 생각했다. 황건적은 사막화가 되고 각 마을들이 스스로 안정화를 꾀할 때, 자립보다 약탈을 선택한 집단이었다.

도망쳐 나오는 중에도 뒤에서는 사람들이 죽어나갔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가까운 사람이었던 도로시의 죽음은 내게도 미야에게도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혼란스러운 와중에 밖에서 바라본 마을은 거대한 불덩이였다. 악몽 같은 어제가 현실이고, 현실이길 바랐던 먼 과거는 꿈이었다는 게 가슴 아팠다.

 정신을 놓고 걷다가 모래 늪에 빠질 뻔한 것도 여러 번이었다. 미야가 구해주지 않았다면 그대로 빠져 죽었을지도 몰랐다. 평소라면 잘 피해 다녔을 모래늪이 오늘은 전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미야는 나를 챙기면서 묵묵히 길을 찾아 걸었다. 나보다 더 마음이 아플 텐데. 굳게 닫힌 입술이 그녀가 짊어진 슬픔의 크기를 보여주는 것만 같았다. 이젠 더 울 수조차도 없는 마음이겠지.

 다음 마을까지 얼마나 가야 하는지 묻지 않았다. 마을을 발견하면 거기서 쉬어가는 것이고, 그렇지 않으면 이 여정이 사막에서 끝나버리는 것도 좋다는 생각이 들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눈앞에서 죽어가는 걸 두 번이나 목격하면서 삶의 의지가 꺾여버렸다. 그가 말했던 과거로 가는 터널이 있다면, 그가 말했듯이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발달된 문명을 가지고 있다면, 그들은 왜 사막의 사람들을 구원해주지 않는가에 대한 의문이 어제 불타던 마을의 연기처럼 내 머릿속을 뿌옇게 가득 채웠다.


 "그런 건 없겠지."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는 내가 마을을 벗어나 멀리 도망갈 수 있도록 이야기를 지어낸 것이 분명했다. 그가 늘 내게 들려준 이야기가 거짓이었듯이, 과거로 가는 터널 또한 나를 위한 거짓말이었을 것이다.

 잘 걷던 미야가 멈춰 돌아섰다. 그리고 도로시에게 건네받은 노트를 꺼냈다. 어제의 참상이 떠올랐는지 몇 초간 인상을 찌푸린 채 가만히 서 있다가 겨우 빈 페이지를 찾아 넘겨 무언가를 적기 시작했다.


 - 해가 많이 기울었어요.


 하늘은 서쪽 사막의 모래언덕 너머로 천천히 넘어가는 태양 주위의 주황빛부터 이쪽의 옅은 곤색까지 황홀한 그러데이션을 품고 있었다. 더 어두워지기 전에 머물 곳을 선택해야 했다. 불빛 하나 없는 사막에서 밤에 움직이는 것은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암흑이 내려앉는 사막은 그런 곳이었다.

 마땅히 쉬어갈 곳이 보이지 않았다. 바위든 뭐든 모래로부터 안전한 곳이 있으면 좋으련만. 사방 어디를 둘러보아도 그런 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미야가 다시 노트에 무언가를 적어 내밀었다.


 - 저 언덕만까지만 갔다 올게요. 여기서 기다려요.


 미야는 내 대답을 듣지 않고 성큼성큼 모래 언덕을 올라갔다. 나는 너무 지쳐서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았다. 쉐마프를 내리고 식어가는 사막의 공기를 들이마셨다. 건조한 모래향이 옅게 밴 건조한 공기가 폐 깊숙이 들어왔다. 상쾌하다고 말할 순 없지만 쉐마프 없이 숨을 들이마신다는 것만으로도 온몸에 산소가 도는 느낌이었다.

 미야가 언덕 위에서 한참을 두리번거리다 제자리로 돌아왔다. 그녀는 낙망한 표정으로 내 앞에서 고개를 가로저었다. 언덕 아래에서 야영을 하는 건 죽여달라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갑자기 거센 바람이 불어 모래가 덮치기라도 하면 그대로 파묻혀버리는 수가 있었다.

 우리는 미야가 조금 전 올라갔던 언덕까지 함께 이동했다. 언덕 위는 아래보다 바람이 조금 더 세게 불었지만, 크게 걱정할 정도는 아니었다. 배낭을 내려놓고 얇은 모포를 바닥에 깔았다. 내가 먼저 4시간, 그다음 미야가 네 시간 불침번을 서기로 했다.

 미야는 얇은 외투를 이불 삼아 덮고 곧바로 잠이 들었다. 본인도 힘든 와중에 나까지 챙기려 했으니 두 배로 힘들었을 것이다. 외투가 짧아 삐쳐 나온 다리에 내 외투를 덮어주었다.

 준이 해준 이야기에 따르면 과거에는 사막에도 생명체가 있다고 했다. 전갈이라든지 뱀이라든지. 심지어 여우도 있다고 했다.


 "예전에 이 마을에 살았던 할아버지가 해준 얘긴데, 사막여우라는 게 있었대. 귀가 크고 뾰족하고 얼굴은 조막만 한데 눈이 밤하늘처럼 검고 반짝인다고 했어. 심지어 사막에 서식하는데 털도 있어서 만지면 부드럽다고도 했지."


 할아버지에게 들은 것이든, 그가 지어낸 것이든 내게 왜 그런 거짓 이야기를 들려준 것일까. 그의 이야기에 매번 신기해했기 때문일까. 물을 구할 수 있는 특정한 장소가 아닌 이상 사막에서는 그 어떤 것도 살 수 없었다. 마을을 전전하며 사막을 가로지르면서 그가 내게 했던 이야기들이 하나씩 거짓이었음을 알아차렸다.

 언덕 아래로 끝없이 펼쳐진 사막을 물끄러미 쳐다봤다. 간혹 바람이 불어와 모래가 쓸려 이동하는 것 외에 어떠한 생명의 징후도 찾아볼 수 없었다. 얼굴이 작은 송아지에 귀가 크며 털이 자란 녀석이 사막 한가운데 있는 모습을 상상했다. 사막여우는 그런 모습이었을까.

 미야의 잠꼬대 소리에 상상 속 사막여우의 모습이 연기처럼 사라졌다. 딱히 추운 것도 아닌데 미야는 몸을 잔뜩 웅크리고 있었다. 질끈 감은 눈가에 굵은 눈물이 한 방울 맺혀 있었다. 꿈에서도 도로시와 이별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나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듯 살포시 토닥여주었다. 질끈 감았던 눈가에 긴장이 풀리면서 맺혀있던 눈물이 흘러내렸다. 꿈에서만큼은 도로시와 행복한 시간을 보내길.




 아침이 밝았다. 기상시간보다 더 일찍 눈이 떠졌다. 눈을 뜨고 싶어서 떴다기보다 점차 밝아지는 햇빛과 달궈지는 열기에 누워있을 수가 없었다. 미야는 내 잠자리에서 두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 무릎을 껴앉은 채 고개를 끄덕이며 졸고 있었다.

 내가 부스럭거리자 미야가 졸고 있지 않았다는 듯 눈을 번쩍 떴다. 미야의 옆얼굴과 태양이 겹치면서 그녀의 얼굴 주위로 빛이 퍼지며 성녀의 분위기를 연출했다. 나는 잠시 그 모습을 넋 놓고 보았다. 내 시선을 알아차린 그녀가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가려졌던 태양이 눈에 들어오면서 고개를 옆으로 돌려 눈이 마주치는 것을 피할 수 있었다.

 말린 음식과 물로 주린 배를 채운 뒤 다음 마을을 향해 이동했다. 식사 때 물어본 바로는 바짝 걸으면 내일 밤에 도착할 수 있는 작은 마을이 있다고 했다. 미야의 마을과 사이도 좋아서 걱정할 필요도 없다는 말도 덧붙였다.

 머릿속은 어제 살육의 현장에서 한 발짝도 떨어지지 못했다. 지금 걷는 것에 집중해야지 하면서도 몇 번이나 모래늪에 빠질 뻔했고 미야는 그런 나를 단 한 번도 놓치지 않고 구해주었다. 발이 모래늪을 디뎌 빨려 들어갈 때면 기억뿐만 아니라 나의 몸 전체가 어제 그 마을로 되돌아가는 기분이 들었다. 미야가 내 손을 잡고 구해줄 때만 나는 그 장소에서 구원되었다. 어쩌면 나는 그 구원의 맛이 너무 달콤해서 무의식적으로 모래늪을 찾아 밟는 건지도 모르겠다.

 한낮이 되었을 때, 사막의 모래가 꽤 줄어 있었다. 미야는 여기서부터 암석 사막이 시작될 거라고 했다. 멍하니 바닥만 보고 걸어서 몰랐었는데, 깎아지른 거대한 암벽들이 그 크기가 가늠될 만큼 가까이에 있었다. 알고 나니 단단한 바닥을 딛는다는 감각이 또렷해졌다.

 암석과 암석 사이 성인 세 명 정도가 나란히 설 수 있을 정도의 작은 길 입구 앞에서 갈증도 해소할 겸 잠시 쉬어가기로 했다. 그늘은 햇빛 아래에 비하면 달콤하리만치 시원했다. 몇 발자국만 움직여 햇빛으로 나가면 탈 듯이 뜨거운데 그늘로 들어오는 경계를 넘어오는 순간 다른 세계로 넘어온 것만 같았다.

 내가 바위에 기대 쉬는 동안, 미야는 자기 키 만한 높이의 튀어나온 암석 위에 올라가 걸터앉아 있었다. 저 멀리 우리가 걸어온 길을 바라보는 눈빛에 고요한 슬픔이 가득했다. 그녀는 사막을 횡단하는 것으로 자신을 혹사시켜 슬픔을 잊으려 했던 게 아닐까. 쉬는 순간 도로시와 마을 사람들에 대한 추억이 밀려와 더 견디기 힘든 것은 아닐까. 충분한 시간이 지난 뒤에도 나는 그녀가 자리에서 일어설 때까지 기다려주었다. 해가 높은 암석의 꼭대기에 걸릴 때가 되어서야 그녀가 앉은자리에서 뛰어내렸다.

 해가 완전히 넘어가 어둠이 깔리기 직전까지 걸었다. 샛길은 좁아지기도 하고 넓어지기도 했으나 둘이 나란히 걷기엔 전혀 무리가 없었다. 다만 가끔 부는 바람에 암석 위에서 작은 돌들이 굴러 떨어져 부스럭 소리를 낼 때면 흠칫 놀라곤 했다. 혹시 황건적이 이곳에 매복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걱정이 되었으나 사람의 흔적은커녕 작은 짐승 하나 보이지 않았다.

 오른쪽 암벽이 반원처럼 움푹 팬 곳에서 오늘 밤을 넘기기로 했다. 안 그래도 어두운 사막인데 사방이 거대한 암벽으로 막혀 있으니 더욱 어둡게 느껴졌다. 불을 피울 수 있으면 좋겠지만 불을 피울 도구도, 불을 유지할 땔감도 없었다.

 준이 말했던 사막 여우 이야기가 생각났다. 도저히 상상이 되지 않는 모습의 동물.


 "사막 여우라고 알아?"


 사막의 정적을 깨고 미야에게 물었다. 검은 배경 속에서 어떤 경계가 희미한 형체가 살짝 움직였다. 나는 그것이 긍정인지 부정인지 알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그냥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내가 준에게 들었던 그대로, 생김새와 서식지에 대해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 여우와 함께 지냈다던 '어린 왕자'의 이야기도 함께. 이 이야기는 우리가 처한 상황과 아무런 연관이 없는데도 이야기를 하는 것만으로, 또 누군가 들어주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스며들었다. 준이 내게 계속 이야기를 해주었던 것도 사막 생활의 힘듦과 외로움을 버티기 위해서였을까.

 미야가 귀담아듣고 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사람 형태의 검은 실루엣은 조금 전 고개를 흔들었던 자세 그대로였다. 나는 계속 기억을 상기시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그러다 목이 말라 잠시 물을 마시기 위해 고개를 치켜들었는데, 암벽 사이로 갈라진 틈을 비집고 나오듯이 별빛이 쏟아지고 있었다. 늘 보던 광활한 밤하늘의 조각만 떼어놓고 보니 이것대로 황홀한 장관이었다.


 "미야, 하늘 좀 봐."


 검은 실루엣이 움찔거렸다. 미야의 입에서도 감탄이 새어 나왔다. 그녀는 곧바로 어둠 속에서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 치 앞도 잘 보이지 않는 곳에서, 그녀는 뭔가를 열심히 써서 내게 내밀었다. 밤하늘의 별빛이 아무리 쏟아져 내려도 지상의 글자 하나도 제대로 비추지 못했다. 나는 그 글씨를 보기 위해 얼굴을 가까이 대고 있는 대로 눈살을 찌푸려봤으나 헛수고였다.


 "뭐라 쓴 거야?"


 미야가 종이를 휙 거둬 가더니 "아이아."라고 말했다. 그녀가 그 종이에 무엇을 썼는지 확인하는 건 지금으로부터 한참이 지난 뒤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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