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는 공짜일까?
오늘의 소비 요약
총 사용비용 : 34만 원
가성비 : 2.5 /5
재구매 의사 : 2/5
좋았던 점 : 친구와 관계가 돈독해진 느낌이 들었다.
아쉬웠던 점: 5성급 호텔인데 침구류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나에게는 소중한 친구가 한 명 있다.
그 친구와는 고등학교 동창이다. 우리는 10대 때부터 생일날 서로 편지를 주고받았다.
어떤 해의 생일 편지에서 난생처음 읽은 말이 있었다.
"많은 사람 중 빛나는 너의 생일을 축하할 수 있어서 기뻐"
그 맘 때쯤 나는 시작이 언제인지 모를 우울증 치료를 시작한 때였다. 죽은 듯이 살고 있었다.
편지를 처음 읽었을 때는 말도 안 된다고 생각했다. '빛나는', '너' , '기뻐'이 세 단어의 조합이 나에겐 낯설었다. '이런 말을 들을 자격이 없는데... ' 죄책감이 들었다. 죄책감은 우울증의 대표적인 증상 중 하나이다. '나랑 친구 하는 바람에 우울증 환자에게 편지를 써야 했겠네.' 하는 생각이 들어 잘못을 저지르는 기분 들었다. 상당히 비약적인 사고이지만, 그맘때 나는 그 생각이 잘못된 줄도 몰랐다. 죄책감은 며칠이고 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래서인지 그 문장이 내 마음에 단단히 박혔다.
죽고 싶은 날이 오면 신기하게 그 문장이 떠올랐다. '그 얘 말이 진짜 일 수도 있으니 속는 셈 치고 살아볼까?' 하는 마음으로 많은 밤을 보냈다. 내가 언젠가는 빛날지도, 축하받아 마땅할지도 모르니까.
그 얘는 내 친구였고, 선생님이자, 부모였다.
내 일기장 첫 장의 유서에는 그 친구에게 모든 재산을 주겠다고 썼다.
모든 것을 줘도 아깝지 않은 사람이라서가 아니다. 내 모든 것이 그 친구로 인해 유지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다니는 회사는 1년에 한 번 창립 기념일이 있다. 올해 창립기념일에 혼자 제주도에 갈 계획을 세웠다. 숙소를 알아보다 산속에 있는 듯한 넓은 수영장 사진을 보게 됐다. 꼭 가보고 싶었다. 숨겨진 절벽이라니... 내 마음을 울리는 단어였다. 게다가 최근에 생긴 5성급 호텔이었다. 기대감이 급 상승했다. 5성급 1박에 17만 원. 서울이랑 비교하면 합리적인 가격이다.
나는 여행을 다니면서 새로운 숙소 찾기를 좋아한다. 내가 좋아하는 거니까 고민운 짧게, 결제는 빠르게.
예약한 후로 회사에서 일하기 싫을 때 숙소 사진을 꺼내봤다. '침대에 누우면 얼마나 달콤할까...?'
숙소가 너무 좋아 혼자 가기 싫었다. 어떤 순간을 함께 기억하는 사람이 있을 때 더 가치 있게 느껴지니까. 그 친구와 같이 가고 싶었다. 내가 다녔던 여행의 대부분은 이 친구와 함께 갔었는데, 이상하게도 제주도는 함께 간 적이 없었다. 여행이 채 3주도 남지 않은 시점이라 친구가 휴가를 내기 어려울 것 같았다. 그래서인지 말을 꺼내기 어려웠다. 너무 급작스럽게 물어보는 거라 함께 갈 수 있을 거란 기대는 하지 않았다.
"같이 제주도 갈래?"
"너무 좋아"
의외의 대답에 기뻤다. 제주 여행이 기대되기 시작했다.
숙소는 이미 예약한 김에 같이 묵자고 했다. 숙소 사진을 검색해 보더니 좋아했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누군가 같이 해준다니 기분이 좋아졌다.
기대감이 커졌다. 34만 원에 기대감을 산 셈이다.
돈이라는 게 참. 사람 기분을 좋게 만드는구나. 좋으면서도 무섭네 참.
우리의 첫 여행지는 동유럽이었다. 내가 20살 때였다. 모든 숙소는 오만 원이 넘지 않는 곳을 골랐다. 극강의 가성비를 추구하던 때였다. 가격만 보고 골라 관광지까지 시외버스를 타야 하는 곳도 있었다. 정말 20살 이기에 할 수 있는 여행이었다.
이후에도 그 친구와 여행을 다녔다. 숙소는 항상 내가 골랐다. 한옥 숙소, 호스텔, 호텔, 리조트, 에어비앤비 등 다양한 숙소를 경험했다. 그러면서 나만의 기준이 생겼다.
첫째, 침구류가 좋아야 한다.
나는 침구류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더울 때는 몸에 착 감기는 모달 소재의 이불이 좋고, 추울 때는 푹신하면서 따뜻한 구스다운 이불이 좋다. 호텔은 대부분 면으로 된 이불 커버와 매트리스 조합이다. 면의 촉감이 침구류의 질을 결정한다.
베개를 빼놓을 수 없다. 나는 낮은 베개를 선호하는데 대부분의 숙소는 높은 베개를 두는 곳이 많다. 이 점은 늘 아쉽다.
둘째, 사람이 너무 많지도 적지도 않아야 한다.
내가 말하는 '사람의 적다'의 기준은 0명이다. 다시 말해, 내가 유일한 투숙댁이 아니라면 한적할수록 좋다. 나는 바깥활동을 하면 체력이 떨어진다. 여행을 위해 떠나는 순간부터 체력이 급감한다. 중간중간 숙소 들러 에너지 충전 해야 한다. 한적할수록 회복이 잘 된다.
셋째, 접근성이 좋아야 한다.
차가 없는 여행이라면 무엇보다 중요하다. 돈이 없을 때는 숙소의 위치를 크게 고려하지 않았다. 시간이 영원할 줄만 알았던 대학생 때는, 싼 게 최고인 줄 알았다. 숙소까지 가는 길이 험해도 '싸니까 좋다' 생각했다. 나이 들어보니 시간만큼 소중한 게 없다. 그래서 요즘은 접근성 좋은 곳에 돈을 지불하는 것을 아끼지 않는다. 시간으로 돈을 살 수 있다면 산다. 망설이지 않고.
기준을 열심히 말했지만 제주도에서 머문 숙소는 사실 가기 전에 그 값을 다했다. 자린고비가 굴비 보듯이, 두 직장인의 굴비노릇을 톡톡히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가격에 불만은 없다. 비단 2박 하는 동안의 값어치뿐만 아니라, 그 숙소를 보며 제주여행을 기대했던 시간도 같이 샀으니까.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은 침구류가 기대만큼 좋지 않았다는 점. 그냥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정도였다. 그래서 다시 방문할지는 모르겠다. 아마 새로운 숙소를 또 찾지 않을까.